맨체스터 바이 더 씨, 케네스 로너건, 2016
‘불행배틀’의 결말은 모두가 불행하다. 자기가 가장 불행하다는 걸 인정받은 승자는 그래서 불행하고, 자기 불행은 불행 축에도 못 낀다는 면박을 들은 패자는 또 그래서 불행하다. “세상에 너보다 힘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냐?”는 일방적인 질문이 반복되는 동안 우리는 힘든 마음을 감추고, 별거 아니라고 말하는 것에 익숙해진다.
괜찮다, 괜찮다 하면 거짓말처럼 괜찮아진다는 건 거짓말이다. 괜찮다, 괜찮다는 말에 가려 안 괜찮은 상태로 오래 방치된 채 억눌려 있던 감정들은 예측하지 못한 순간에 밖으로 터져 나오거나, 안에서 멍울져 병이 된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우울한 영화다. 주인공 격인 리와 패트릭 모두 ‘가족의 죽음’이라는 불행을 떠안고 있다. 형이 남긴 유언에 따라 조카의 후견인이 된 리(케이시 애플렉)는 형의 집으로 와 조카를 돌본다. 사실 그에겐 이 동네에서 사는 것 자체가 괴롭다. 몇 년 전 이곳에서 자신의 실수로 집이 불탔고, 그날 세 아이를 잃었기 때문이다. 언뜻언뜻 지옥 같은 기억을 떠올리면서도 담담하게 슬픔을 안으로 삭이는 리의 모습이 더욱 마음 아프다.
리의 거대한 슬픔에 압도되어서인지, 조카 패트릭(루카스 헤지스)의 불행은 상대적으로 가볍게 느껴진다.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른 날 밤에, 여자친구와 같이 자도 되냐고 삼촌에게 묻는 그는 철없는 열여섯 살. 기껏 와준 삼촌에게 틱틱거리기나 하고, 여자친구와의 데이트에 삼촌을 이용하는 모습은 얄미워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패트릭은 냉장고에서 냉동 닭고기를 거내다가 갑자기 오열한다. 안에 고여 있던 감정이 뜬금없는 상황에서 터져나와 버린 것. 그제야 아이스하키 연습을 하다가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망연자실하던, 꽁꽁 언 땅에 아버지를 묻을 수 없다고 따지던 패트릭의 마음이 안쓰러웠다. 그래서 미안했다. 아버지를 잃은 패트릭의 마음은 자식을 잃은 리의 마음만큼이나 아팠을 텐데, 나도 모르게 두 사람의 불행에 순위를 매기고 슬퍼할 자격을 따지고 있었던 것 아닐까.
어릴 때는 걸핏하면 울었다. 슬퍼서, 미안해서, 아파서 등등 인간이 느끼는 감정의 종류만큼 눈물의 이유도 다양했다. 반면 어른들의 반응은 비슷비슷했다. “또 우냐?” “뭘 잘했다고 울어?” 이상하게 이 말을 들으면 눈물이 멎었다. 잘한 건 없었으니까. 그런 식이라면, 나에겐 울 자격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이제 어지간한 일에는 눈물이 안 난다. 좋게 포장하자면 어른스러워진 것일 테고, 솔직히 말하자면 내 감정을 잘 모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