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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것만 좋아하면 내 세계는 쪼그라든다

1도 관심 없었던 봉산 탈춤을 배운 후기

by 노르키

“좋아하는 것만 하면서 살아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그러나 좋아하는 것만 하면서 사는 삶에는 우려되는 점도 있다. 자칫 '좋음 감옥'에 갇혀버리게 될 수도 있는 노릇이다. 감옥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면 위험하고 싫은 것투성이다. 좋아하는 것만 하다 보면 내 세계는 확장되거나 변형되지 못한다.


게다가 살다 보면 싫어한다고 믿었던 것을 좋아하게 되는 놀라운 일도 생긴다. 나는 파충류를 질색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남동생이 도마뱀을 키우겠다며 집에 데리고 왔다. 처음에 나는 꺅 소리를 질렀지만 그 일이 없었더라면 우리 집 '마뱀이'의 순둥순둥한 성격을 알 기회가 전혀 없었을 것이다.


KakaoTalk_20220112_021702094_02.jpg 사진은 봉산 탈춤은 아니고, 하회 별신굿 포스터. 하지만 이것도 좋아하게 됐다

지난해 내게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 석 달 동안 봉산 탈춤을 배운 것이다. 여태껏 살면서 단 한 번도 탈춤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예전에 고등학생 때 우리 반에 ‘취발이’(술 취한 중, 탈춤의 주요 인물 가운데 하나)를 흉내 내던 여자애가 있었다. 기억 속의 그 여자애는 몸을 쓰는 데는 소질이 없었고, 그래서 그 애가 따라 하던 취발이도 그저 그랬을 뿐 감흥은 없었다. 그러니까 탈춤에 관한 기억은 그 정도였다.


봉산탈춤을 배운 것은 아주 우연한 계기였다. 매 학기 우리 지역의 예술대학 평생교육원에서 시민을 대상으로 예술 강의를 연다. 마침 내가 가능한 시간대의 수업이 딱 그거 하나뿐이었다. '아니 그런데 탈춤이 웬 말이냐... 코로나에 어디 가기도 어려우니 그냥 운동 삼아 하자.' 이 정도의 깃털처럼 가볍디 가벼운 동기였다. 우리 무형 문화유산인 탈춤에는 죄송하지만, 탈춤 배운다고 어디 가서 말하기에도 왠지 부끄럽기만 했다.


처음 두 달 동안은 비대면 줌 수업으로 진행됐다. 코로나 때문이었다. 수강생 예닐곱은 한 명씩 일어나서 컴퓨터 앞에서 춤을 췄다. 한 주가 지나고 보름이 지나자 수강생 다섯 명에게 불가피한 사정들이 생겼다. "제가 일이 생겨서요." "업무상 급한 일이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강아지가 아파서요."


마침내 수강생은 딱 세 명이 남았다. 20대 남자사람은 선생님의 제자이자 이 강의를 홍보하는 바람잡이인 것이 틀림없었다. 다른 한 명은 중학생 아들을 키우는 여성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명은 나. 빠져나갈 핑곗거리를 차마 찾지 못했다. 결국은 을지로 3가의 국악원에 가서 '한삼(희고 긴 천)'도 사 왔다. 탈춤에 꼭 필요한 준비물이다. 노트북으로 줌을 켜놓고, 소매에 한삼을 끼운 채 팔을 돌리는 내가 뭐 하나 싶어졌다.


선생님은 줌으로 수강생들의 춤을 날카롭게 관찰하며 진지하게 피드백을 주었다.

"팔이 다 틀렸어요.”

“아직은 우스꽝스럽고 볼품없지만 그래도 애썼습니다.”

이런. 퇴사하고 노트북 앞에서 봉산탈춤을 추고 있어도 되는 걸까? 영어 단어라도 외워야 하나?


'위드 코로나'로 전환되면서 4주 동안의 대면 수업이 시작됐다.

나는 소매에 한삼을 끼운 채로 팔을 휘두르는 법에 제법 능숙해졌다. 봉산 탈춤은 보이는 것과는 달리 몸을 아주 많이 쓰는 춤이다. 한 목을 통과할 때마다 땀이 줄줄 흐른다. 그래서 시작 전에는 다치지 않도록 20-30분가량 충분히 스트레칭을 해야 한다. 먼저 준비물이 있다. 탈춤에 꼭 필요한 한삼(희고 긴 천)이다. 한삼을 끼고 팔을 움직이는 법을 익혀야 한다. 그중에서도 외사위와 겹사위는 초보자인 내게는 매우 어려웠다. 팔을 감았다가 푸는 방식인데 이 방법을 확실히 배워둬야만 한다. 익히는 데만 몇 주가 걸릴 정도로 어려운 동작이었다. 동시에 발바닥도 다리와 직각으로 곧게 세워야 한다. 봉산 탈춤을 출 때는 왼쪽 팔을 움직이면 왼쪽 다리를 올리고, 오른쪽 팔을 움직일 땐 오른쪽 다리를 올린다. 몇 주만에 몸에 익으니 성취감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런! 움직임을 외우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대사를 외우지 않으면 봉산탈춤을 절대로 출 수 없습니다. 반드시 외워야만 합니다."

선생님은 대사를 못 외우는 사람에게는 봉산탈춤을 가르치지 않겠다고 했다.

"낙양동천 이화정~"

기세 좋게 소리치면서 탈춤을 시작해야 한다.


수업은 끝났고 시간이 흐른 뒤 나는 봉산 탈춤을 좋아하게 됐다. 유튜브로 봉산 탈춤 공연을 찾아볼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안동 하회마을에 가서 하회별신굿을 구경하고 올 줄 과연 누가 짐작했겠는가? 나도 내가 그럴 줄 몰랐다. 우리 산과 바다의 자연스러운 곡선을 닮은 춤사위...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흥겨움을 모두가 알아야 하는데... 종강 날에 휴대전화로 찍은 영상을 가족에게만 보여줬다. 그랬더니 엄마 왈, "너도 참.... 대단하다." (GREAT이라는 뜻이겠죠?)


무관심했거나 싫어했던 것을 좋아하게 되는 마법. 그건 좋아했던 것을 좋아하는 것보다 훨씬 짜릿하다. 내가 알았던 영토가, 미지의 세계로 확장되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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