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는 그런 삶을 부끄러운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틀에 박힌 삶은 살지 않을 거야. 절대로!”
고등학생 때는 밤마다 잠들기 전에 이렇게 다짐했다. 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오직 졸업만 기다렸다. 50분 수업과 10분 쉬는 시간이 10번씩 되풀이되는 하루를 1,000일 가까이 보내야 하는 사실이 막막하기만 했다. 매일 아침 나를 움직이게 한 원동력은 졸업 하나뿐이었다.
그즈음 나를 매혹했던 사람들은 나와는 정반대로 살아가는 인물들이었다. 자기 몸과 마음이 부서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학교에 다니지도 않는 악당들 말이다. 빚진 술값을 갚기 위해 그림을 그렸던 이탈리아의 화가 카라바조라든지, 버찌가 먹고 싶으면 토할 때까지 먹어버린다는 그리스인 조르바... 그들은 효자 효녀도 아니었고 착한 이웃도 아니었다. 자기 욕망을 가장 앞세우는 그 매력적인 악당들은 착하고 모범적인 나보다도 훨씬 재밌게 사는 것 같았다. 반면에 나는 싫은 것을 견디는데도 '재미없게 산다'는 벌을 받는 기분이었다.
몇 해 전 어느 날 회사에서 퇴근하는 길에 과호흡이 왔다. 아무리 숨을 크게 들이마셔도 숨이 모자랐다. 그 무렵 회사에선 부서 이동이 있었고, 회사에선 누군가가 희생해야 한다며 “책임감이 강한 네가 헌신해줘야 할 것 같다.”라고 말했다.
틀에 박힌 삶을 살지 않겠다던 어린 날의 기도가 무색할 만큼, 나는 지금껏 안정적인 둥지를 만들고자 있는 힘껏 애썼다.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하고, 일하고, 번아웃을 경험하고... 왜 그렇게 안간힘을 쓰며 버티려고 했는지 이젠 정확한 이유도 모르겠다. 옷 한 벌 편히 사기 어려웠던 처지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고, 부모님을 위해서였던 것 같기도 하다. 무엇에도 지기 싫었고, 돈을 벌어 자립하고 싶었다.
"이게 내가 원하던 삶이었을까? 나는 마치 아바타 같아. 가끔은 우리 엄마가 살고 싶어 했던 인생을 대신해서 살아주는 느낌마저 든다니까."
내 얘기를 듣던 친구가 말했다. “힘들지. 나도 그렇지. 하지만 사람이란 누구나 싫고 힘들었던 일에서도 분명히 덕을 본 게 있대. 그러니까 과거에 일어난 어떤 일에서든 덕 본 점도 있었던 거야. 거기에서 얻은 것을 발판 삼아 앞으로 나아가는 거야."
왜 마음 가는 대로 살지 못하는지 스스로 탓했던 날들이 있었다. 시원하게 사직서를 던지지도 못하고, 지구 반대편으로 훌쩍 떠나 독한 술을 마셔대며 글을 써 내려가는 예술가가 되지 못하는 내가 바보 같았다. 어째서 나는 이렇게 틀에 박힌 인간인 거야?
그러나 돌이켜보면 모두 나의 선택이었다. 직장생활을 이어나가며 경력을 쌓고 돈을 벌겠다는 선택을 한 것도 내 선택이었다. 분명 그 순간 내게 도움이 됐기 때문에 스스로 결정했던 일이었다. 내 발로 걸어 들어간 틀 속에서 많은 것들을 얻기도 했다. 성실하게 공부하고 학위를 받고, 회사에서 월급을 받고, 영어학원에 다니고, 책과 옷을 사고, 가보고 싶었던 곳을 여행했다. 막연히 꿈꿨던 것들을 차근차근 이뤄고 있는 셈이다.
어린 시절 동경했던 카라바조나 그리스인 조르바 같은 삶을 내가 똑같이 살 수는 없다. 물론 그들의 생명력 넘치는 삶과 이야기는 나를 매혹했다. 하지만 술도 못 마시는 내가 어떻게 카라바조처럼 술값을 갚겠다며 그림을 다니겠는가? 꽃으로도 때리지 못하고, 모기도 놓아주는 내가 어떻게 카라바조처럼 사람을 패고 다니겠느냔 말이다.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는 자기 새끼손가락이 거추장스럽다고 잘라버리는데, 내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 조르바 씨, 그 말 못 들어보셨냐고요!
지금은 두 아이를 기르며 애쓰는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틀에 박힌 너의 삶,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