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두 1일, 그녀를 만나기 7시간 전
분만실에서 휴대폰 메모장에 출산 과정을 적어두었다. 나의 기록이 언젠가 우리 아기에게 선물이 되기를 바라면서.
40주 2일, 진통이 시작됐다
출산 예정일 이틀 뒤. 새벽 5시에 집에서 깼다. 간밤에 속옷에 핏물이 배어 있었다. 병원에 전화했더니, 양수가 터진 것 같다며 지금 병원으로 오라고 했다. 냉장고에서 두유를 꺼내 먹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2개 집어들었다. 내 것 하나, 남편 것 하나였다. '드디어 오늘이구나. 아이를 보게 되는구나.' 손꼽아 기다린 날인 만큼, 마음은 의연해졌다.
5시 50분, 남편과 병원으로 갈 채비를 마쳤다. 나는 미리 챙겨뒀던 출산가방과 산모수첩을 꺼내왔다. 남편은 택시를 타자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마을버스를 타고 싶다고 했다. 아직까진 하나도 아프지 않았고, 병원까지는 차로 10분 거리였다. 걸을 수 있을 만큼 걸으면서, 햇볕과 바람을 쐬고 싶었다. 남편 손이 떨리고 있었다. 남편의 머리와 뺨을 쓰다듬었다. 병원에 도착해 병원복으로 갈아입었다. 가족분만실이라서 남편도 함께 들어왔다. 분만실 침대에 누워 태동검사와 내진을 받았다. 이때까지도 진통은 없었다. 오히려 간호사 선생님의 내진(자궁 입구에 손가락을 넣고 자궁 입구가 열린 크기를 재는 것)이 아파서 "윽" 소리가 났다.
"양수가 새는 게 맞네요. 자궁은 원핑거, 손가락 하나 들어갈 정도예요." 간호사 선생님은 '아직 자궁이 열린 것이 아니'라는 뉘앙스로 말했다. 바로 입원하면 된다고 했다. "두유 먹어도 되나요?" 물었다. 입원하면 아무 것도 먹을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간호사는 수액을 놔줬다. 항생제 테스트도 했다. "양수가 터졌으니 항생제를 놓을게요." 유도분만제도 아주 소량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관장도 했다.
아침 9시
5월에 맞이할 아기
'내가 좋아하는 5월에 아기가 태어나는구나. 내가 태어난 5월에.'
출산예정일까지도 소식이 없어 6월에 유도분만 날짜를 잡아놨었다. 그래도 내심 내가 좋아하는 늦봄에 낳고 싶었다. 5월은 내겐 언제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늦봄이다.
아침 9시, 담당 의사 선생님도 나를 보러 들어왔다. "조금씩 자궁이 수축되고 있네요." 선생님이 내진을 하자고 했다. 아까 간호사 선생님의 내진도 아팠기 때문에, 한 번은 건너뛰고 싶어서 외쳤다. "아까 아침 7시에 한 번 했어요!" 선생님은 "한 번 더 할게요~"라고 하더니 손가락을 찔러넣었다. 아파서 "윽" 소리가 나와 입을 틀어막았다. "투핑거, 손가락 두 개 들어가요." 자궁 문이 2cm 열렸다는 뜻이다. 아기가 나오려면 10cm까지 열려야 한다.
아침 10시
첫 진통 시작, 아직은 참을 만하다
아침 10시쯤부터 첫 진통이 시작됐다. 불규칙적으로 간간히 진통이 왔다. 그러다가 얼마 뒤, 진통은 4~5분에 한 번씩 규칙적으로 바뀌었다. 힘을 주지 않아도 되는 진통이었다. 1시간 반~2시간 정도 진행됐다. 설렘과 긴장을 담아, 행복한 시간이었다. 나는 분만대에 누워 손가락으로 '브이'를 하고 사진도 찍었다. (이후의 어마무시한 진통은 상상조차 못하고...!) 이때까진 덜 아팠다. 그래서 분만 과정을 휴대폰 메모장에 기록해둘 수 있었다.
간호사와 의사가 상시 나를 봐주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나중에 출산 뒤에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 우리 둘만 덩그러니 남겨진 기분이었어."
분만실에서 남편은 유튜브 맘똑티비에서 본 호흡법을 시범해서 보여줬다.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워서 웃었다. 그러다가 남편의 천진난만한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남편의 해맑음을 오래오래 지켜주고 싶었는데…. 내가 남편을 아빠로, 어른으로 만들어버린 것 같아서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남편이 말했다. "누워서 좀 자. 체력 보충해 놔." 하지만 허리가 점점 허리가 아파와서 자기도 어려웠고 체력은 더 떨어졌다. 11시 50분쯤, 남편에게 요청했다. "무통 놔줄 수 있는지 물어봐줘." 자랑은 아니지만, 여태껏 살면서 나는 뭐든 잘 참았다. 싫고 괴로운 일들도 슬플만치 잘 참고 넘겼다. 하지만 분만실에서까지는 그러지 못했고, 그래야 할 이유도 없었다. 내가 화타 앞의 관우는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낮 12시 30분
무통 주사를 맞고 잠들었다
분만 중에도 잘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자궁 문이 5cm까지 열려야 무통 주사를 놓을 수 있다고 했다. 그날 병원의 사정 때문인지, 무통 주사를 놓을 수 있는 대표원장님이 바빠서 도착 시간이 지연됐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진통을 참았다. 그 사이 대표원장님이 분만실에 도착했다. 때마침 자궁 문도 5cm까지 열렸다. 곧바로 무통 주사를 맞을 수 있었다. 이때가 낮 12시 반쯤이었다. 아침 7시부터 12시 반 사이 4시간 반 동안, 열려야 하는 자궁 문 10cm의 절반이 열렸다. 그래서 막연히 '이만큼의 시간이 더 걸리겠구나' 했다. 하지만 곧 이런 생각조차 사치스러워질 만큼 노곤해졌다.
남편에게 점심으로 설렁탕이라고 먹고 오라고 했다. 엄마도 나를 낳을 때 아빠에게 "설렁탕이라도 먹고 와요."라고 했다던데. 아빠가 잠시 설렁탕 드시러 간 사이에 내가 나왔다고 했다. 출산 시 짬이 날 때 남편에게 권할 음식으로는 파스타나 캘리포니아롤보다는 뜨끈한 설렁탕이 낫다.
희한하게도 어제와 오늘, 남편과 몇 년 전 여름에 놀러갔던 어느 곳이 떠올랐다. 어디인지도 잊었다. 평소엔 생각조차 안 나던 곳이었다. "저수지가 있었고, 산이랑 풀이 많았어. 거기가 어디였지? 통영인가?" 남편이 하동이라고 했다. 연애시절, 여행을 좋아하지 않았던 남편을 꼬드겨서 데려간 하동이었다. 그때 여름 날씨와 푸릇푸릇한 풀이 그냥 떠올랐다. 슬프지 않은데도 눈물이 흘렀다. 왜 갑자기 생각날까. 남편과 또 그 길을 걷고 싶다. 배가 아파왔다. 빨리 아기를 만나고 싶으면서도 진통을 늦추고 싶었다.
갑자기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아이 다섯을 낳은 우리 할머니가 떠올랐고, 나를 다섯 시간만에 낳았다는 엄마도 생각났다.
병원도 의사도 없던 조선시대, 고려시대, 신라시대엔 어떻게 다들 낳았을까.
건강하고, 동시에 아주 운 좋은 여자들이 아이 대여섯씩 낳으며 할머니가 됐을 것 같다.
이미 수십만 년 동안 이어진 보편적인 경험인 출산. 내게 오면 이렇게 특별하고 개별적인 경험이 되고, 여태껏 출산했던 여성들과 빛의 속도로 연결되는 기분이었다.
무통 주사를 맞고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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