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불황, AI 고도화, 자동화솔루션 시대에 기획자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지난주 한가로운 어느 날에 OTT 플랫폼으로 많은 평론가들이 호평해 마지않던 미야자키 하야오의 은퇴작이자 마지막 작품이 될 가능성이 큰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봤다. 아름다운 작화와 몽환적인 연출력은 가히 훌륭하긴 했지만 호평일색이었던 기사들로 접했을 때의 기대감보다는 훨씬 못 미치는 스토리였다. 두 번이나 보다가 까무룩 잠에 들기도 했다. 지루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영화임은 틀림없다. 미야자키는 한 인터뷰에서 ‘직선을 없애고 따스하지만 삐뚤어져서 마법이 존재할 수 있는, 흔들리고 뒤틀리는 세계‘를 그리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 세계에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영화를 통해 미야자키는 이렇게 말한다.
-아름다운 세계가 될지, 추악한 세계가 될지는 전부 네 손에 달려있어.
-아까 그 나무 쌓기 탑도요?
-여기에 네가 하나를 더 쌓을 수 있다. 이 세계를 더 평화롭게 할 수 있지.
올 하반기부터 기업들은 예정했던 프로젝트들을 모두 내년으로 미루거나 잠정적으로 홀딩하면서 지출을 최소화하고 있고, 공공기관 또한 자금줄을 풀지 않고 있는 상황이라 IT업계는 최고 불황을 겪고 있다. 나를 포함해 프리랜서 기술인력들도 노는 사람들이 많다. 요즘 업계사람들을 만나면 어디 일이 없냐, 어디서 일하냐를 먼저 인사로 주고받는 게 당연시되었다. 대부분 힘들었다는 코로나 시즌에도 우리 IT 기술자들은 호황을 누렸다. 비대면 서비스의 시작으로 다양한 프로젝트가 많이 진행되었고 찾아주는 기업들도 많았는데 지금은 프로젝트 자체를 찾기가 힘들 정도다. 일이 없으니 인력단가도 1년 전에 비해 많이 절감된 상태다. 고급 등급 기술자를 데려다가 중급 단가를 주고 부려먹는 기업들도 많아졌다. 불합리한 계약 조건임을 알면서도 경제적인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하는 친구들도 많다. 사무실 규모를 축소하고 정규직 직원들을 프리랜서로 전환하는 회사도 있다. 코로나 시즌에도 못 겪어본 불황의 시기다. 주변 업계 종사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들도 거의 처음 겪는 일이라 한다.
여기에 너무 잘 만들어진 솔루션 프레임워크도 인력 생태계를 위협하는 요인 중 하나다. 촉촉한 단비처럼 최근에 들어온 일 하나가 있는데 이런 솔루션 프레임워크에 들어갈 UI템플릿을 만드는 일이었다. 단순히 템플릿 기획 작업인 줄 알았는데 일의 내용을 자세히 듣고 나서 위기감을 느꼈다. 해당 솔루션을 구매한 기업은 솔루션 사용 방법만 익히면 기획/디자인/퍼블리싱 없이 간단한 모바일 웹이나 앱을 만들 수도 있다.(해당 솔루션 모토도 디자이너와 퍼블리셔 없이도 개발자가 만들 수 있는 웹/앱이다.) 물론 기업의 브랜드와 정체성을 위해 더 잘 만들려면 템플릿만 가지고는 불가능하다. 기획/디자인/퍼블리싱 작업은 필수적이므로 인원을 투입시키긴 해야 하는데 그 인력을 최소한으로 할 수 있다는 장점을 솔루션이 제공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모바일웹/앱을 만들기 위해 기획자 세 명, 디자이너 세 명, 퍼블리셔 세 명이 투입되었다면 해당 솔루션을 사용한다면 그 투입 인원수를 50% 가까이 줄일 수 있게 된다. 기업이라면 비싼 인력비를 들여 프로젝트하는 것보다 비용절감을 위해 솔루션을 사용하는 게 훨씬 이득이다. 우리가 그동안 해왔던 기획의 노하우를 토대로 금융/이커머스/공공기관 어디에서든 사용하기 편한 보편적인 UI 템플릿을 만들어줘야 하는데 직업적인 딜레마를 불러일으킨다. 너무 자세하게 잘 만들어주면 기획자를 대신하는 작업물이 될 테고 대충 만들면 기획자 본인의 명성에 금이 갈 테니 말이다. 이 일을 맡긴 기획자에게 적당히 대충 너무 자세히는 말고 보편적으로 대략적으로 설계해서 기획하라고 노티 해줬더니 그게 더 어렵다고 토로한다. 잘하고 싶은데 너무 잘하면 장기적으로 봤을 때 불리하고, 적당히 하면 기획자로서의 퀄리티 문제가 대두되니 어려운 일은 맞다.
마이크로소프트(MS)가 링크드인과 함께 제작한 연례 보고서 업무동향지표 2024' 보고서에 따르면 전체 근로자 4명 중 3명이 직장에서 AI를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근로자 75%(한국 73%)가 AI를 사용하고 있으며, 6개월 전부터 AI를 사용한 비율은 46% 증가했다.
리더의 79%가(한국 80%) AI 도입이 경쟁력 유지에 필수적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중 60%는(한국 68%) 조직 내 비전과 명확한 계획이 부족한 것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고 답했다.
더불어 Al 사용량에 비해 인공지능을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게 돕는 가이드라인이 부족하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보안뉴스, 2024년 5월 14일자 ‘MS-링크드인, 2024 업무동향지표 발표 'AI가 여는 미래 일자리의 변화와 혁신' 중에서>
위의 기사에서 보듯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AI 고도화 시장 또한 기획자의 자리를 무섭게 위협한다. 매출 보고서, 방문자 통계, 일정관리, 마케팅 현황조사, 제품 제안서, 홍보 기사 작성 등 이러한 업무에 AI를 활용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주변에서 심심찮게 듣는다. 아무리 AI가 발전해도 기획자의 자리는 대체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나의 단순한 무지였음을 깨닫는다. 365 코파일럿 AI는 주제만 던져주면 거기에 맞는 비슷한 틀의 PPT를 만들어줘서 자료조사하는 시간을 아껴주고, 통계 관련 엑셀 파일은 90% 가까이 정확률이 높아서 예전에 소요됐던 업무 시간을 반이나 줄여준다고 한다. AI가 제품의 카피문구도 뽑아주고, 제품 벤치마킹을 요청하면 비슷한 스타일로 알아서 찾아주니 여러모로 업무에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예전에는 이런 걸 다 사람이 했는데 AI만 잘 활용하고 다룰 수 있다면 이런 일을 하기 위해 인력을 새로 뽑을 이유가 없어진다. 아직은 기획자가 그리듯 섬세하고 세세한 스토리보드 작성은 안 되는 것 같지만 이런 추세로 고도화된다면 앞으로 모를 일이다. AI를 모르면 기획도 어려운 시기다. 얼마 전 챗지피티에게 금융가입프로세스를 알려달라고 했더니 가입시작부터 동의서작성하기, 본인인증하기, 가입완료까지 텍스트로 나열해 줬다. 다시 PPT 문서로 달라고 명령어를 입력했는데 텍스트 박스에 화살표만 적힌 문서를 만들어줬다. 당연히 이런 퀄리티로는 개발은 불가능하다. 거기에 적힌 내용이 맞는지 검증도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직까지 AI를 활용해 기획을 해보진 않았다. 검증하는 시간을 벤치마킹과 자료 조사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으로도 계속 AI를 사용 안 하고 지금의 내 스타일대로만 해도 되는지는 의문이다. 사람이 직접 기획하고 정리해야 하는 부분은 확실히 남아있지만 앞으로 더욱 고도화될수록 많은 부분에 있어서 AI가 기획의 많은 부분을 대체할 가능성이 높다. 단순운영직이나 문서관리직은 대체 가능한 시기가 빠르게 도래할 것이다.
기획자로서 내가 얼마나 더 일하고 살아갈지는 아직 미지수다. 나의 방법론과 작업물도 언젠가는 올드해지는 시기가 올 것이다. 지금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업해야 하는 시기가 도래할지도 모른다. 지금과 다른 위협이 미래에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고 전혀 다른 형태의 노동 환경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이러한 경기불황에 UI솔루션의 발전과 AI의 고도화의 위협 속에서 우리는 앞으로 어떤 기획자로 살아가야 할까. 나는 그 해답을 문학에서 듣는다.
「델포이 보고서」에 참여한 전문가 289명의 평가에 따르면, 기술로 대체될 수 있는 것 은 중기적으로든 장기적으로든 모두 사라질 거라고 한다.
살아남는 것은 주로 <공감>과 관련된 직업군이다.
예를 들면 누군가를 보살피고, 간호하고, 희망을 주고, 훈련시키고, 교육시키고, 개인적인 고민과 불행을 완화시켜 주고, 문제 해결을 돕는 직업들이다.
<장차 대다수의 사람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델포이 보고서」는 이렇게 답한다.
<어떤 것이 됐든 다들 무언가를 할 것이다. 하지만 그중 많은 것은 더 이상 생업과 관련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다들 무언가를 생산한다. 즐거움이건, 소음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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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르그와 와일드가 꿈꾸던 사회, 그러니까 임금 노동과 생업 노동이 점점 줄어드는 사회가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다.
우리의 노동 및 경제 시스템과 사회 안전망은 지금처럼 유지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재편될 수밖에 없다.
성공은 이제 창의력을 갖추거나, 적응력이 뛰어나거나, 공감 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돌아간다.
미래 사회에선 (측정 가능한)가치를 창조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가치를 상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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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하루를 자유롭게 만들어 나가고, 자발적으로 어떤 일에 매진하며, 계획을 세우고, 또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은 채 목표를 추구해 나가는 것, 이 모든 능력이 생업 노동을 하지 않는 좀 더 행복한 사람과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로 느끼는 좀 더 불행한 사람들을 구별하는 요소이다.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의 ‘사냥꾼, 목동, 비평가_디지털 거대 기업에 맞서 인간적 삶을 지키는 법’ 중에서>
삼 년 전 코로나시기 때 읽었던 책을 다시 꺼내 들었다. 그때도 지금과 비슷한 위기를 느꼈는데 AI와 비대면 전환 시대에 맞춰 디지털 전환시대가 본격적으로 펼쳐질 것이라는 두려움에서였다. 리하르트는 디지털로의 대전환시대에서 디지털 자동화 시대가 우리에게 더 많은 부와 시간을 안겨줌으로써 인간은 더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에 시간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한다. 자동화 기계와 AI에 인간이 대체될 것이라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리하르트는 반대로 오히려 기계가 벌어주는 돈을 기본소득으로 받으면서 “모두가 그때그때 마음 내키는 대로 아침에는 사냥을 하고(사냥꾼), 낮에는 고기를 잡고, 저녁에는 가축을 몰고(목동), 저녁 식사 후에는 비평(비평가)을 하는” 그런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기계가 대체할 수 없고 흉내 낼 수 없는 가장 인간적인 인간다움으로 살아남는 것, 임금을 받고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사무실에 얽매이는 노동 대신 ‘자유롭게 생각하고, 계획을 세우고, 목표를 추구하며 가치 있는 것을 만드는 것‘에 몰두하면서 호기심을 잃지 않는 오로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 미래를 대처해야 한다고 말이다.
9-6시라는 정해진 업무시간에서 해방돼서 스스로 할 일을 찾고, 자유로운 환경에서 가치를 창출하는 일, 아직은 꿈만 같은 이야기일 수 있다. 업무적인 환경은 꾸준히 시간이 흐르면서 바뀔 가능성이 높다. 지금과 같은 시스템은 이제 오래지 않아 사라질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낡은 시스템이 아니라 자동화 UI솔루션도 만들 수 없고, AI도 만들 수 없는 것에 있다. 더 나은 목표를 설정하고, 가치 있는 독창적인 성과물을 생각하고,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기획물을 만들어내는 것. 이것은 어떤 자동화 기계에도 대체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능력이자 영역이다. UI 솔루션이 아무리 자동화가 잘 되어있어도 서비스의 브랜드며 목표, 서비스 가치 설정은 솔루션이 해줄 수 없는 영역이다. 단순히 문서 작성하고 스토리보드 그리고 제안서나 만드는 것이 기획자의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지금은 당장 일할 수 있어도 앞으로는 힘들 것이다. 그런 인력은 무수히 많은 다른 인력으로도 대체 가능하기 때문이다.
무슨 일을 하고 있든 우리는 그 상황 속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고 어떤 세계관으로 살아야 할지 매번 생각하고 선택해야 하는 존재다. 생각을 게을리하면 잘못된 선택을 하기 쉽고, 잘못된 선택은 비관과 우울을 낳는다. 목적이 돈뿐인 일 또한 그렇다. 높은 단가를 받으면서도 일이 재미없을 때에는 돈을 낙으로 삼아 일을 하고, 일이 재미있으면 월급이 작아도 수고롭지 않다. 목적과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비관이 낙관이 되기도 하고 낙관이 비관이 되기도 한다. 비관과 우울이 팽배한 요즈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살아가야 하므로 문학전공자 기획자는 문학을 위로삼아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것이라고 막연히 낙관하면서 요즘 새로 쓰게 된 AI 코파일럿 기반의 에이닷을 요리조리 살펴볼 예정이다.
<참고도서>
1. 사냥꾼, 목동, 비평가_디지털 거대 기업에 맞서 인간적 삶을 지키는 법/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지음(박종대 옮김)/열린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