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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봄여기 Oct 16. 2024

보통의 위기

일하면서 겪게 될 보통의 위기에 대처하는 문학적 사고.

모자수야
내는… 가끔 궁금하데이
와 이 세상에 누구는 살아남고 누구는 몬 그라는 건가
지 그림자를 찾는 사람
몬 찾는 사람
근데 그 몸뚱이는
그림자 없이는 몬 사는 거다
그기…우리가 어디 있는지 보여주는 긴데
우쨌든 간에 니랑 내랑은 여 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 다 떠났어도
우리는 여…식탁 앞에 앉아있는 기다.
<파친코 시즌2>


파친코2의 시즌 마지막화를 보면서 윤여정 배우의 잔잔하고 울림 있는 목소리로 저 대사를 들었을 때 나는 얼굴도 모르는 나의 어머니, 나의 어머니의 어머니, 나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어머니의 어머니들의 뼈와 살과 피를 먹고 우리가 지금, 여기, 이곳에 있다. 우리는 태생적으로 누군가의 희생을 먹고 자라난다. 그 희생 덕에도 누군가는 여기에 있고, 누군가는 여기에 없다. 지구 반대편에서는 몇 년째 전쟁이 지속 중이고, 조그마한 섬나라들은 선진국들의 수입된 쓰레기 산 위에서 살고, 내전으로 죽은 아이들의 시신이 거리에 방치되어 있다는 소식을 뉴스로 소비하면서 자신이 서 있는 이곳의 아늑함과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깨달으며 매일의 일상을 살아간다. 누군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전쟁 속에서 죽어가고 누군가는 편안하게 앉아서 이런 글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면 한 없이 불공평한 세상이다. 이러한 불공평함은 신의 섭리도 아니고 신의 뜻도 아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뜻에 따라 선별된 것도 아니고, 치밀하게 짜인 시나리오 속에 놓인 캐릭터들도 아니다. 우리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들이 살아남았기 때문에, 그들의 희생을 먹고, 어쩌다 보니 70년째 전쟁이 멈춰있는 한국에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안정된 환경 속에 놓이게 돼서 매일 되풀이되는 일상을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간에 지금 우리가 여기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 제일 중요하다.


이것은 내가 오랜 시간 불평등한 관계에서 불평등한 고용으로, 불평등한 계급에서 더 나아가 불평등한 세계로에 대한 문제에 천착해 얻은 해답이다. 당신의 삶이 어떤 나라, 어떤 부모, 어떤 환경에 놓이느냐에 따라서 생과 사의 기로에 놓인다고 생각해 보라. 여기에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떤 섭리가 있을까. 우리는 그저 살아갈 뿐이다. 매 순간 “우리가 어디 있는지”를 잊지 않으면서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아갈지 선택하면서 말이다. 처음은 우리가 선택할 수 없어도 미래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삶이다. 무수히 많은 갈등과 위기 속에서 열심히 싸우고 일하고 사랑하면서 살아남는 것. 그것 말고는 이 불공평한 세상을 견뎌낼 방법을 나는 알지 못한다.


1. 영원한 갑과 을의 공생관계

작은 회사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대표의 위치라고 해서 내가 ‘갑’의 위치에 있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어느 조직의 대표가 된다는 것은 동시에 또 다른 더 큰 조직의 ‘을’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프리랜서들은 각자가 1인 회사나 다름없으므로 직접 고용해 주는 회사가 ‘갑’이 되는데, 프로젝트에 들어가게 되면 더 큰 ‘갑의 고객’을 만나게 된다. 나와 계약한 회사와는 ‘갑(용역회사)=을(프리랜서)’이 되지만 프로젝트에 들어가게 되면 ‘갑(사업주체)>을(사업수행)>병(사업수행 업체 소속 용역회사)>정(프리랜서)’ 의 관계가 된다. 갑자기 ‘을’에서 저 밑의 ‘정’의 위치로 바뀌게 되는데 이때 기획자는 센스 있고 눈치 있게 전복된 관계를 잘 읽고 처신해야 더 큰 갈등과 위기를 피할 수 있다.

여기서 기획자가 놓치지 말아야 할 단 하나의 진실은 ‘정’의 위치에 있는 기획자에게는 갑, 을, 병 모두가 그에게는 고객 즉 대통합 ‘갑’이라는 점이다. ‘병’의 위치에 있는 용역회사가 계약한 회사는 ‘을’이므로 ‘을’의 기업과도 틀어지면 안 되고 ‘갑’의 고객과도 갈등이 생기면 프리랜서 기획자의 계약기간이 아슬해지기 때문에 둘 사이의 관계에서 아슬한 줄다리기는 필수다. 촘촘하게 짜인 먹이사슬 현장에서 언제나 최하층은 프리랜서 기술 용역들이고 그 위에 기업들이 많이 껴 있을수록 최하층의 용역에게 가는 인력비는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 단계라도 건너뛰고 싶은 게 나 같은 작은 회사도 소망이라면 소망이다. 나는 주로 ‘병’에 해당하는 위치에 처하는데 위에서 많이 떼고 오니까 사실 나한테 떨어지는 용역비는 그다지 높지 않다. 그래서 나와 계약하는 프리랜서들에게 지급하게 될 금액도 적어지니 가끔은 고민이 많아진다. 용역비로 저울질하는 ‘갑’을 만날 때마다 자존심도 상하고 우리 팀원들이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나 부들부들 떨기도 했다. 이러한 구조속에서 내가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지 이러한 모멸감을 견딜 수 있을지 자신이 없는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우리가 노예일지라도, 아무런 권리도 없을지라도, 갖은 수모를 겪고 죽을 것이 확실할지라도, 우리에게 한 가지 능력만은 남아있다.
마지막 남은 것이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해 지켜내야 한다. 그 능력이란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 중>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자신의 경험을 <이것은 인간인가>를 통해 고통스럽고 처절하게 드러낸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다. 그의 책을 읽는 일이란 어렵고 힘든 일이다. 내가 나의 방에 있음을, 커피를 마시면서 이 책을 읽을 수 있음을, 마음대로 화장실에 갈 수 있다는 지극히 일상적인 매 순간을 감사하게 여기게 만드는 책이므로 나는 정신적으로 피폐해질 때마다 이 책을 조금씩 꺼내 읽었다. 큰 틀에서 구조를 바꿀 수 없다면 그 구조를 이해해 보기로 마음먹게 한 책이랄까. 모욕감에 동의하지 않지만 내 신념을 잃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타협하고 작은 것을 내어주고 큰 것을 얻는 현명함으로 조금씩 나를 바꿔나갔다. 이 세계보다 더 참혹하고 냉혹한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만큼 내가 모욕적인 상황에 처하긴 어렵다. 내가 누군가에게도 갑이 되듯, 갑도 어느 상황에서는 을이 된다. 절대적인 ‘갑’도 없고, 절대적인 ‘을‘도 없는 커다란 공생관계에 놓여있다고 생각하면 모욕적인 순간도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2. 이기적인 타인을 만났을 때

기획, 디자인, 퍼블리셔가 한 팀으로 있는 UI팀을 총괄하게 되다 보면 각자의 포지션에서 첨예한 이해관계로 대립할 때가 있다. 한 팀이지만 각자의 역할이 달라서 업무적인 이해갈등 관계에 놓이기 쉽기 때문이다. 디자이너는 기획이 디자인하게 쉽게 나왔으면 좋겠고, 퍼블리셔는 간단한 모션 스크립트로 화면을 구성하길 원한다. 기획자는 상상하는대로 화면이 나왔으면 좋겠고, 서로가 각자 욕망하는 바가 다르고 일할 때 방식도 다르니 갈등은 발생할 수밖에 없는데 그럴 때 내가 피하고 싶은 작업자의 유형은 자신의 편의를 위해서 공통의 작업물을 변경하고자 하는 유형이다.


작년에 파트너사 홈페이지를 기획하는 일을 수주받은 적이 있다. 기간이 두 달밖에 안되고 상장 일정에 맞춰 홈페이지를 오픈하고 싶다고 해서 일정이 얼마 없다고 했다. 기획은 우리 회사에서 하고 디자인은 파트너사에서 한다고 했다. 일주일 만에 홈페이지 개편안에 대한 컨셉시안서를 만들고 파트너사 임원진들과 담당자에게 컨펌을 받고 상세기획에 들어갔는데 해당 회사 디자이너가 기획서와 전혀 다른 디자인을 만들어놓고 기획서를 해당 디자인에 맞춰달라고 요청했다. 다행히 해당 디자인을 담당자가 마음에 안 들어해서 기획서를 바꾸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 디자인이 기획서의 퀄리티를 따라오지 못한다고 해서 나중에 디자인도 우리 회사에서 다시 맡아서 했던 일이 있었다. 기획서가 나오고 그 기획서를 바탕으로 디자인을 하는 것이 통상적인 진행방식이며 기획서를 디자인에 맞춰서 수정해 달라고 하는 경우는 디자인의 퀄리티가 너무 좋고 모두가 동의했을 때나 간혹 있을 수 있다. 일할 때 생기는 대부분의 갈등과 다툼도 이런 일의 진행방식, 각자의 편의에 맞춰서 다른 사람의 작업물을 변경하려고 할 때 온다.


0을 아무리 많이 더해도 절대로 하나의 단위를 만들 수 없는 것과 똑같이,
하나의 공동체의 가치는 그것을 구성하는 개인들의 정신적 및 도덕적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칼 구스타프 융 ‘무엇이 개인을 이렇게 만드는가?’ 중>


일할 때든 사교로 사람을 만날 때도 나는 이기적인 사람들에게 취약하다. 융의 말처럼 이기적인 사람들이 모여서 이기적인 소리를 내면 계속해서 쌓이는 것은 이기적인 목소리일 뿐이다. 우리는 정해진 시간 내에 고객이 원하는 바를 빠르고 명확하게 만들려고 임시로 만들어진 하나의 공동체다. 그 구성원들이 저마다 자기만을 위한 목소리만을 낸다면 단시간 내에 우리가 목적한 바를 빠르게 이룰 수 있을까. 조금 느리고 성과가 더뎌도 일할 때 이기적으로 일하지 않는 사람을 팀원으로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이기적인 성향의 팀원이 내가 포함된 공동체에 있다고 하면 빠른 시간 내에 공동체에서 제외시키는 것이 그 팀 자체의 정신적, 성취적 성과를 높이는 일일 것이다.


3. 신세대와 구세대와의 갈등 속에서


나는 나의 자력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나는 남들에게 전혀 신세를 지지 않았다고 생각할 만큼 거만하거나 스스로에게 만족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나보다 먼저 와서 나를 가르치고 키워준 이들에게 모든 것을 빚지고 있다. 나는 과거의 결실이요, 과거로부터 나왔다.
기원이 여러분 모두와 무관치 않듯 나와도 무관치 않다. 나는 기원에 관심이 간다.
 <장 도르메송 ‘어디서, 어디로, 무엇을’ 중>

어느덧  IT 업계에서의 경력이 이십여 년간 되어간다. 처음 모바일 기획부터 시작했을 때에는 IT 업종이 이제 막 한국에 부흥되는 시점이었고 선배들도 젊었고 나도 어렸다. 이제 그 선배들은 한 업체를 이끄는 대표가 되었거나 한 기업의 임원진이 되었다. 내가 이십 대에 일할 때만 해도 선배들과의 세대 간의 갈등이 그리 크지 않았다. 다르지 않은 문화를 공유했고, 똑같이 서로 잘 몰랐기 때문에 선배들도 배워서 우리들에게 알려줬고 우리도 같이 공부하면서 일을 한다는 개념이었다면 지금은 조금 다르다. 이미 고도로 발전한 이 세계에서 무수히 많은 경험을 한 우리 세대와 이제 막 이 세계로 나온 2-30대 친구들 간의 갈등은 경험과 무지의 싸움처럼 보인다.


경험이 많아서 안정적인 것은 있지만 무지 속에 숨겨져 있는 잠재적 능력도 무시할 수 없기에 나는 매 순간 후배들을 어떻게 이끌 것인지 그리고 내가 선배들에게 무엇을 배웠는지를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3년 전 한창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할 무렵 J금융권 모바일웹 구축건으로 30대 중급 기획자와 일할 기회가 있었다. 나이는 삼십 대 중반이었는데 기획 경력이 2년밖에 되지 않았다. 정확히는 스토리보드도 제대로 그려본 적이 없는 디자이너 출신의 초급 기획자나 다름없는 친구였다. 본인 또한 그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어서 초반에는 열심히 배우겠다고 의지를 다지기도 했다. 처음이었던 것 같다. 처음 내가 기획자를 계속해도 될지 위기감을 느낀 것은.


고객도 30대 중반의 나이였고, 중급 기획자도 비슷한 나이였는데 경력은 각자 10년 남짓 미만으로 나름 중간관리자급까지 했던 경험들이 있어서 그런지 자기주장은 강한데 IT 쪽 경험은 나보다 적어서 잘 모르면서도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피력하거나 다른 리더들을 무시하는 경향을 자주 보였다. 그러다가 중급기획자가 선을 넘는 행동을 해서 크게 부딪힌 적이 있다. 프로젝트 투입 당시 기획 기간은 3.5개월로 통합테스트는 지원하지 않는 것으로 업무를 협의하고 갔는데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총괄 PM이 와서 통합테스트 시나리오를 적어달라고 중급기획자에게 슬며시 요청한 것이다. 통합테스트 시나리오는 개발이 완료된 후 혹은 완료되기 직전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한 케이스를 시나리오 형태로 적는 것으로 프로젝트가 크면 클수록 품질검증관리팀에서 나와 작성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프로젝트 규모가 작고 비용을 아끼기 위해 간혹 기획자에게 작성해 달라고 요청하는 경우가 있는데 때에 때라서 한 달이 걸릴 수도 있고 최소 2주는 소요되는 작업이었다. 내가 기획팀 리더고 팀원이었던 중급 기획자는 나에게 이 사실을 물어보고 보고했어야 하는 위치였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협의 없이 PM에게 작성하겠다고 대답한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을 알고 그 친구를 커피숍으로 불러 얼마나 선을 넘는 행동을 했는지에 대해서 다그쳐 물었는데 그 친구는 되려 나에게 큰 소리로 그까짓 시나리오 적어주면 되지 왜 그렇게 난리냐고 따져 물었다. 통합테스트 시나리오를 작성해 본 적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당당하게 대답하길래 보여달라고 했는데 그녀는 싫다고 우겼다. 그래서 내가 지금까지 적었던 통합 테스트 시나리오를 보여주면서 이런 걸 네 말대로 며칠 만에 적을 수 있냐고 물었더니 목소리가 작아지면서 아니라고 대답했다. 제대로 된 통합테스트 시나리오는 본 적도 없고 적어본 적도 없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그 친구에게 고백했다. 앞으로 너 같은 후배들이 계속 밀고 들어와 이렇게 경험도 부족하면서 자기 경험이 최고라고 우기며 따지고 들 텐데 이걸 감당할 자신이 없어 기획자를 그만둬야겠다고. 그랬더니 그 친구도  앞으로 이런 일들을 하는 게 기획자라면 자기는 못할 것 같다고 고백했다. 우리는 서로의 고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어정쩡한 채로 웃으며 헤어졌다. 결국 테스트 시나리오는 써줄 수밖에 없었고 그 모든 책임은 그 친구가 아니라 리더인 내 몫이었다. MZ세대, 젠지세대 뭐 세대를 부르는 말들은 많지만 어쨌든 나로부터 십 년 이상 차이 나면 나는 세대가 다른 것으로 간주한다. 어쩌다 보니 나도 이제는 구세대로 넘어가는 시점이고 활발히 일하기보다는 가르치고 양성하고 더 많은 친구들일 일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줘야 하는 세대가 된 것 같다. 지금은 직접 팀을 꾸리기 때문에 기획자는 좀 더 꼼꼼히 하나부터 열까지 체크하는데 동시에 그들 각자의 개성이 훼손되지 않도록 신경 쓰는 것도 나의 몫이다. 내가 가르쳐 주는 많은 방식들에 자기들을 맞추다 개성이 사라질까 봐 두렵기도 하다. 그래서 기획서 리뷰할때면 먼저 그들의 의견을 물어보려고 노력한다. 너무 아니라고 생각될 때 빼고는 기획서 작성자에게 먼저 어떤 것이 좋냐고 물어보고 실현 가능성이 있다는 전제하에 새로운 아이디어는 적극 채용해주고 싶다. 너무 잘하는 친구를 만나서 위기감을 느껴보고 싶다가도 한편으론 그런 후배들이 나타날까 봐 두렵기도 하다.


지금 여기 이곳에 내가 서 있도록 나를 “가르치고 키워준 이들에게” 나 또한 빚지며 살아가고 있다. 후배들을 가르치면서 내가 고객과 싸우고 올 때마다 대신 가서 수습해 줬던 대표님들이 떠오르고, 나의 기획서대로 해달라고 싸웠던 개발 팀장님들도 떠오른다. 빚지고 살아간다는 마음은 모든 순간에 있어서 나를 겸손하게 만든다. 내가 ”과거의 결실“이고 ”과거로부터 나왔음 “을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 무수히 많은 갈등 속에서 나를 버티게 한다. 신세대인 후배들도 부디 이런 마음으로 지금 이곳에서 버텨주기를 바란다.



<참고 도서>

1. 이것이 인간인가 / 프리모 레비 / 이현경 옮김 / 돌베개

2. 무엇이 개인을 이렇게 만드는가? / 칼 구스타프 융 / 김세영 옮김 / 부글

3. 어디서, 어디로, 무엇을 / 장 도르메송 / 이세진 옮김 / 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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