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계에서 나를 생존하게 해 준 기획자의 삶에 대해여.
이 세계에서 나를 버티게 해 준 것은 ‘문학’이지만 이 세계에서 생존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건 ‘기획자로서의 삶’이다. 태생이나 부모의 배경 없이 오롯이 나의 노력과 견딤으로 얻어낸 나의 직업, 이 세계 속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방식을 알려주고, 글쓰기 다음으로 내가 이 세계에서 나를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기획자로서의 삶.
사십 대 중반에 이르러서도 나는 나의 존재적 의미에 대해서 늘 생각한다. 아무 의미 없이 타의에 의해 이 세계에 기투된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삶의 의미를 다양한 곳에서, 여럿의 사람에게서 찾으려고 했다. 종교도 예술도 친구도 애인도 가족에게서도 나의 존재적 의미는 찾을 수 없었다. 공허하고 외로운 시간 속에서 나는 문학을 통해 의미 없는 삶에 대한 ‘원래 의미 없음’을 깨닫고(알베르토 까뮈, 카프카, 니체, 밀란쿤데라, 하이데거의 영향으로) 의미를 찾는 대신 의미 있는 사람이 되는 것으로 나의 존재를 증명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기 위해선 ‘작가로서의 삶’ 보다는 ‘기획자로서의 삶’이 내겐 조금 더 실존적인 측면에서 의미 있어 보였다. 그래서 대학원 졸업 후 나는 작가로서의 삶을 위해 더 노력하고 견디는 대신 다시 사회의 구성원이 되어 하루하루 일상을 살아내고, 돈 걱정 없이 다른 사람들과 밥을 먹고, 아픈 고양이를 병원에 데려갈 수 있는 경제적 자유를 위해 그렇게 혐오해 마지않던, 다신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던 기획자로서의 삶으로 돌아갔다. 지금까지 내가 기획자로서의 삶에 대해서 찬미하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한 때는 자본주의 세계로 돌아가기 싫어서 혐오해 마지않던 직업이기도 했다. 물론 그때는 틀렸고 지금은 맞지만.
나는 초인적인 행복이란 없고, 하루의 흐름 이외에 영원한 건 없음을 깨닫는다. 부질없으나 핵심적인 이 행복, 이 상대적 진실만이 오직 나를 감동시킨다.
<알베르토 카뮈 ‘제밀라의 바람’ 중에서>
경제적인 활동이 전혀 없는 부모였어도 어쨌든 부모라는 그늘이 있고, 미성년자라는 울타리가 있는 상태라면 그 사람은 가족의 구성원이지 한 사회의 구성원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한 사회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투표권을 획득하고, 경제적인 활동을 지속하며 자기 이름으로 세금을 내는 경제적, 정신적 독립을 이룬 사람을 의미한다. 스무 살이 되고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해서 드디어 한 사회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 그 당연한 흐름 속에 한 번도 놓여보지 않았던 어린 시절을 경험한 사람에게는 단 하나의 목표가 ‘사회의 구성원으로 당당하게 살아가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문학을 전공한 나는 다른 문학을 전공한 사람들처럼 창작활동을 위해 생계활동을 멈추거나 부모의 집에서 기생하거나 부모의 도움으로 대학원에 진학하는 등의 호사를 누릴 순 없었다. 생계활동을 안 하고 글만 쓰겠다고 자신의 골방으로 들어간 친구들은 대 부분 가난했고 밥을 굶었고 그래서 뉴스에 나오기도 했다. 나는 때때로 그들이 부러웠으나 그들이 처한 가난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생계활동을 놓은 적이 없다. 생계활동을 병행하느라 작가가 되지 못했다고 스스로 변명을 자처했지만 사실 좋은 작가는 어떤 환경에 처해도 기어코 작가가 되고야 만다.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위대한 작가들이 생계활동을 병행하며 글을 썼듯이. 훌륭한 작가가 되는 것보다 더 시급하고 목말랐던 것이 ‘사회의 구성원’이 되는 것이었으므로 나는 하루하루의 흐름 속에 살아갈 수 있는 기획자의 삶을 살기로 했다.
기획자의 일상은 글을 써 내려가는 일상과 비슷하다. 네다섯 시간은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고 집중해서 기획서를 써야 할 때는 엉덩이가 무거워야 한다. 방광이 터질듯하게 아슬해지면 그때서야 허리를 펴고 화장실에 다녀온다. 까다로운 금융 프로세스를 그려야 할 때면 그 흐름 중 하나라도 놓쳤을 때 전체적인 흐름도가 엉망이 되므로 화장실에 한번 다녀오는 것도 어려울 때가 있다. 반면 제안서나 세일즈킷 같은 작업을 할 때는 자주 리프레시를 하는 편이다. 어떤 도형 형식으로 사용할지, 킬링 키워드가 잘 떠오르지 않을 때, 핵심 문구를 10자 이내로 줄여야 할 때 등 뭔가 창의적인 기획서를 작성해야 할 때는 2시간의 텀을 주고 자주 환기를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막혀있던 생각에 물꼬임이 트이듯 아이디어가 비집고 들어올 시간이 만들어진다. 한 줄의 문장으로 100페이지의 소설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작은 아이디어 하나로 몇 십장의 기획서가 완성된다. 처음과 끝이 완벽하게 서로 아귀가 맞아야 하는 것도 문학과 비슷한 점이다. 노력과 버팀의 시간이 없다면 견디기 힘든 순간들이 많다. 똑같이 노력하고 견디는데 기획자의 삶은 밥을 주지만 문학은 밥을 안 준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그대의 존재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나는 모른다.
(내 존재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어떤 존재이든 무엇을 위한 것인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좌절 속에서도, 패배와 가난, 오해와 투옥 속에서도
나는 그 의미를 정성껏 찾으리라———이 모든 것 또한 위대하기 때문에.
<휘트먼 ‘좌절한 유럽의 혁명가에게' 중>
'엉덩이가 무거워야 글을 잘쓴다, 너는 글 외에 생각하고 신경 써야 하는 것이 너무 많아서 작가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라고 충고를 해줬던 선배는 좋은 대학을 나와 학생운동을 하다가 영화 시나리오 세계로 들어갔다. 나보다 한 살 위였는데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그 선배가 부러웠던 적이 있다. 그러면서도 내심 속내는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부모밑에서 좋은 대학을 들어갈 수 있었고 어쨌든 부모의 도움을 받아 생활하니 나보다 경제적으로 나아서 저런 말을 한다고 아니꼬워 했다. 내가 십 년간 세 군데의 회사를 전전하며 기획자로 살아가는 동안 선배는 온갖 알바를 하면서 영화판에 남았다. 결국 꽤 작품성 있는 단편영화를 찍었다는 소식에 인디영화가 올라오는 온라인 사이트에서 그 영화를 구매해 주는 것으로 소소하게 지지하기도 했다. 몇 번 술 먹고 놀았던 선배가 어쨌든 작품성까지 인정받는 단편 영화와 단편 드라마까지 찍었다고 하니 잘되는 날만 남은 줄 알았다. 글 쓰는 것 외에는 하고 싶은 것도 잘하는 것도 없다고 했던 선배는 포기하지 않고 글을 썼고, 견뎠고 버텨냈는데 살아남진 못했다.
나는 문학으로 밥 벌어먹을 자신이 없어서 기획자의 삶으로 내가 도망갔다고 생각했다. 꽤 오랫동안 그런 패배의식에 사로잡혀서 예술을 하겠다고 생계활동을 무시하는 사람들을 조롱하고 무시했다. 속으로는 부럽고 위대해 보였는데 겉으로는 그들을 보고 있으면 아버지가 떠올라 더 화가 나고 분노가 치밀었다. 어렸을 때부터 익숙한 가난한 사람에 대한 주변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기획자의 삶을 놓을 수 없었고 선배의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슬픔인지 분노인지 모를 감정에 화가 났던 것 같다. 어떤 감정에 더 가까웠는지 모르겠지만 이 생각만은 또렷하다. 불쌍한 것이 아니라 위대하다고. 휘트먼이 18세기 후반 실패한 프랑스 혁명가들에게 보낸 저 한 편의 시구절처럼 생존에서도 살아남지 못했고, 유명한 작가로 이름 남기지 못했어도 그 자체만으로도 어쨌든 그런 삶조차 꿈꾸지 못하고 선택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순수하게 매혹적이고 아름답게 위대했다고 말하고 싶다.
문학으로부터 도망갔다고 생각했던 기획자의 삶과 문학을 사랑하는 나라는 개인의 삶을 이분화하지 않고 동전의 양면처럼 가까이 만든 것은 몇 년 되지 않는다. 몇 년 전만 해도 문학을 사랑하는 나와 기획자로서의 나는 낮과 밤처럼 확연하게 다른 모드로의 전환이 필요했다. 오랜 시간 조금씩 낮의 일상에도 밤의 감성이 스며들 수 있도록 모드 전환 시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이 둘이 하나의 동전으로 합쳐질 때까지 읽고 일하고 또 읽고 일했다. 일할 때 환기가 필요하면 시집을 읽다가 아이디어를 가져오기도 하고, 일로 받은 스트레스를 좋은 소설로 해결하기도 했다. 주변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고, 이 세상을 혐오하지 않으면서 사회구성원으로 살아가기 위해 문학을 이용했다. 반면 책만 읽다 보면 현실성이 부족해지고 삶을 영위할 때 필요한 실리적인 계산들을 놓칠 때가 있는데 그럴 땐 기획자로서의 삶에서 필요한 능력을 발휘한다. 처음에 내겐 없었으나 기획자로 살아가면서 생긴 치밀한 계획성과 일정 짜기는 오랜 기간 기획자로 생활하면서 얻게 된 능력이다. UIUX 팀 전체를 리드할 때 가장 필요한 능력이자 리더의 능력을 판가름할 때 가장 중요한 지표가 되는 능력이기도 하다.
요즘은 불황기라 많은 프리랜서들이 놀고 있다. 나도 몇 개월째 놀고 있고 나와 같이 일하던 몇 명의 능력 있는 팀원들도 일을 쉬고 있다. 그래서 힘든 사람들도 있고 나처럼 편한 사람도 있는데 대체적으로 힘든 사람들이 많다. IT 기술 인력에는 고급/중급/초급이라는 등급이 있는데 요즘은 노는 사람들이 많아서 고급 인력들이 중급 단가를 받고 일하기도 한다고 한다. 나는 그렇게 일하기 싫어서 무한정 놀고 있는데 놀면서 OTT 보고 가끔 이렇게 매주 글 쓰고 책 뒤적이는 일상이 좋다. 그렇게 해서라도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고 그렇게 인력을 저렴하게 이용하려는 기업에 화가 나는데 이런 상황 속에서도 좋은 시절이 다시 오리라 하고, 기다리고 견뎌내면서 이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요즘 만나는 친구들에게 내가 가장 자주 하는 말이다. 잘 버티고 견디는 것만으로도 위대하므로.
참고도서
1. 결혼, 여름 / 알베르트까뮈/장소미 옮김/ 녹색광선
2. 풀잎 / 휘트먼 / 유종호 옮김 /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