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할의 모욕과 이할의 칭찬으로 노력하고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것!
Digital Nomad, 디지털 유목민을 뜻하는 두 단어의 앞글자를 따서 디앤컴퍼니(DNCOMPANY)라는 작은 회사를 만든지 3년차다. 사무실도 없고, 정직원도 없는 디앤컴퍼니는 투입될 프로젝트가 결정되면 기획/디자인/퍼블리셔 UIUX 에 필요한 전문 프리랜서들을 모아서 팀을 만들고 프로젝트에 들어가 정해진 기간 내 각자의 위치에서 일을 하고 그에 따른 일당을 받는다. 정직원이 아니기 때문에 퇴직금도 없고 4대 보험도 없지만 자신이 일하고 싶을 때 일하고 직장인보다 1.5배 월 보수가 높은 장점이 있다. 자신이 능력만 좋고 업무 평가만 좋다면 훨씬 더 많은 월보수를 기업에 요청할 수 있다. 일이 없을 땐 몇 달을 아무런 수입없이 쉬어야 하기 때문에 자칫하다가는 정직원으로 일할때의 수입보다 못 벌수도 있다는 단점도 있다. 어딘가 소속된 곳이 없고 정직원들이 보장받는 혜택을 전혀 받을 수 없다는 점에서 프리랜서 고용형태가 불안할 수 있겠지만 정직원의 생활에 지쳐있던 나에게 프리랜서의 세계는 유혹적이었다. 사내정치 없고, 누군가를 책임지지 않아도 되고, 불필요한 감정노동 없이 오롯이 자신의 능력으로만 평가받고 자신의 능력대로 월보수를 받을 수 있는 깔끔 단백한 이 세계야 말로 내가 그동안 찾아헤매던 이상적인 노동 현장 그 자체였다. 거기에 팀장급으로 기획 리딩이 가능한 여자 리더는 블루오션영역이라 다른 사람보다 더 빠르게 이 세계에 안착할 수 있었는데, 그때 나와 같이 일했던 고객사들에게 대체로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 프리랜서 생활 2년만에 디앤컴퍼니를 만들 수 있었다 .
디자인이나 퍼블리싱 분야와는 달리 ‘기획’이라는 게 전문 학과가 있는 것도 아니고 ‘기획자‘를 양성 배출하는 학원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SI(System Integration) 세계에서 개발자만큼이나 중요한 기획자 찾기는 하늘의 별따기다. 내가 작년에 투입됐던 유명 보험사의 시스템 재구축 프로젝트의 총괄 PL(Project Leader)이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좋은 기획자를 만나는게 프로젝트 전체를 좌우한다.“
기획은 디자이너가 디자인을 하기 위해, 퍼블리셔가 디자인 나온 결과물을 퍼블리싱 하기 전에 개발자가 퍼블리싱 된 화면들을 개발하기 전에 그러니까 이 모든 작업자들의 결과물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기 위해 분석하고 설계해서 튼튼한 골조를 만드는 일이다. 따라서 기획이 잘못되면 디자인이 잘못나오고 디자인이 잘못되면 퍼블리싱이 잘못되고 잘못된 퍼블리싱 결과물과 잘못된 기획서는 개발 자체를 혼돈의 암흑으로 밀어넣는 결과를 만든다. 고객의 요구사항을 처음 만나는 사람도 기획자요, 이러한 요구사항을 잘 정리해서 고객이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화면설계서를 작성하는 것도 기획자요, 화면설계서를 통해 개발자와 고객을 대신해 고객이 원하는 결과물이 만들어지도록 소통하는 것도 기획자의 역할이다. 따라서 기획자는 처음과 끝의 방향성이 달라지지 않도록 전체를 보는 통찰력을 지녀야 하고, 고객 및 다른 작업자들과의 소통도 원활해야 하니 말도 잘해야 하고, 꼼꼼하고 체계적으로 화면설계서를 작성해야 하니 글도 잘 써야 하는 종합예술의 경지에 다다라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기획자가 되는 것도 어렵고 기획자라 하더라도 일을 잘하는지 못하는지에 대한 판단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라 내가 회사를 만들고 제일 먼저 한 일은 ‘일 잘하고 태도도 좋은 전문 기획자‘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작년 프로젝트 투입 때 당시 가르치고 있던 초급 기획자를 데리고 들어갔었다. 이 프로젝트를 위해 3개월을 기획의 기초부터 설계서 작성 방법까지 꼼꼼히 가르쳤다. 1:1 집중 과외나 다름없는 방식으로 가르쳤으나 막상 실전에서 그 친구는 성과를 내지 못했다. 내가 일하는 방식을 옆에서 보고 배우라고 밀착해 많이 가르치고 혼내고 이끌었는데 오히려 그것이 그 친구에게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사람의 일처럼 느낀 모양이다. 어느날인가 기획서에서 실수한 부분을 찾아주고 수정할 수 있도록 가이드 하고 있는데 가만히 듣던 그 친구가 나에게 대뜸 “대표님은 원래부터 이렇게 잘했어요?“ 라고 묻는게 아니던가. 나 또한 너무 당연하게 “응 나는 원래부터 잘했어.” 라고 맞받아 치고는 서로 크게 웃었던 적이 있다. 그 뒤부터 이제 나는 아주 대놓고 나는 원래부터 잘했는데 늬들은 왜케 못하냐 라는 말을 대 놓고 살았던 것 같다. 스물아홉인 그 친구의 눈에는 내가 너무 위대해 보였겠지만 나는 되려 스물아홉의 그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그 친구가 부럽고 이뻐서 잘 이끌어주고 싶었다. 나도 그 나이에 마침 좋은 선배를 만나서 모바일에서 웹 서비스 기획자로 넘어갈 수 있었듯 유통 물류업에서 운영 업무하던 그 친구에게 IT 기획자로서의 새로운 길을 열어주고 싶었다. 좋은 선배, 좋은 리더로 남고 싶었던 것은 처음 일을 배울 때 나는 그런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처음 들어간 회사는 작은 스타트업 회사였는데 지금의 SKT 전신인 SK텔레콤이 휴대폰에 사용할 수 있는 액정이미지 그림 서비스를 운영관리하는 업무였다. 매 주 업로드되는 그림이미지들을 시스템에 올리고, 금액을 책정해서 관리운영하는 일이었는데 그 일을 하면서 회사에서 추진중인 퍼즐게임의 시나리오를 쓰고 게임론칭을 위해 제안서 작업도 했다. 두 가지 일을 진행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파워포인트와 엑셀을 사용했어야 했는데 당시 사장님이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지인이어서 차근차근 알려주고 책도 사줘서 학원을 다니지 않고도 혼자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해도 나는 사회가 따듯하고 인간미 넘치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평탄하고 큰 스트레스없이 다니던 회사였지만 SK텔레콤과의 운영계약업무가 종료되면서 고정적인 수입이 없던 스타트업 회사는 문을 닫게 되었다.
두번째로 들어간 회사는 지금의 KT 전신인 KTF 에 모바일 화보와 웹툰 서비스를 제작하고 컨텐츠를 제공하는 모바일 컨텐츠 전문 회사였는데 면접 당시 면접관이 문예창작학과를 나온 나의 학력을 좋게 봐서 당시 꽤 좋은 조건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당시 사내에는 나말고도 문예창작 출신 기획자가 2명 더 있었는데 회사의 2인자 영업 및 매출을 총괄하는 여자 이사가 문창과를 매우 우대했기 때문이다. 문창과 출신들이 스토리텔링이 되서 화보 컨텐츠 만들 때 시나리오 작성부터 웹툰 선별 및 신규 웹툰 발굴이 가능하고, SMS 발송 이벤트 시 매출에 효과적인 자극적인 문구를 잘 만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그리고 이는 사실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여자 이사에게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고 대표 마저도 함부로 하지 못했다. 나 또한 나를 좋게 봐주고 기대해주는 그 이사님에게 인정받기 위해 입사 동시에 나에게 맡겨진 모바일 화보 서비스 기획/운영하는 일을 무척 잘하고 싶었다. 나의 주 업무는 새로운 모바일 화보가 출시되면 제안서를 써서 KTF에 제출하고 서비스가 론칭이 되면 사람들이 자주 클릭할 수 있도록 자극적인 문구와 매력적인 사진들을 선별해 매출을 올리는 것이었다. 후자는 자신있었는데 파워포인트를 전문적으로 배워본적이 없어서 제안서 작업할 때마다 기가 죽었다. ‘제안서를 촌스럽게 쓴다, 발로 쓰는거 아니냐, 이런 제안서를 어디다 내미냐, 제안서에 글이 너무 많다’ 이런 말들을 들을 때마다 귀가 시간은 점점 늦어졌다. 누구도 나에게 야근을 강요하지 않았지만 나에게 주어진 기본 업무를 다 하고 나면 제안서를 쓸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주로 밤에 남아서 그 작업들을 했다. 파워포인트가 익숙하지 않아 손이 느리기도 했고, 선배들이 작업한 것을 분석하고 그것을 벤치마킹해 좀 더 다양하고 진부하지 않은 도형으로 바꾸고 서비스 제안의 핵심과 킬링문구를 작성하는 작업은 정말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내가 느리고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시간을 떼우는 것으로 못하고 욕먹고 무시당하던 시간들을 버텨냈고, 그렇게 그 회사에서 2년 조금 안되는 시간을 보내고 퇴사했을 때 나는 어떤 회사에 가서도 무시당하지 않고 제안서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스물여섯에서 스물여덟의 나는 워라벨이 뭔지도 몰랐고, 서비스가 신규 론칭하는 날에는 회사에서 밤 새는게 당연했고, 12시 다 되어서 집에 들어가도 새벽을 넘기지 않았다고 안도했다. 지금은 그렇게 일할 체력도 없고 일할 필요도 없지만 그때는 신입 기획자가 개발자에게 직접 질문하고 문의하면 무시당하던 시절이었고 팀장이 여자 이사와 직접 나눈 나에 대한 험담을 네이트온 메신저 창 그대로 캡쳐해 너 때문에 내가 이런 욕을 들어야 하겠냐며 대놓고 면박주던 시절이라 안팎으로 수난의 시대였지만 어찌됐든 나는 버텨냈다. 팔할의 모욕이 나를 단련시키고 이할의 칭찬이 나를 키웠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우리에게 말했다.
- 개 자식들!
사람들은 우리에게 말했다.
- 마녀의 새끼들! 망할 자식들!
또 다른 사람들은 말했다.
- 멍청이들! 부랑배들! 조무래기들! 고집불통들! 더러운 놈들! 돼지새끼들! 깡패! 썩어문들어질 놈들! 고얀 놈들! 악독한 놈들! 살인자의 종자들!
우리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얼굴이 새빨개지고, 귀가 윙윙거리고, 눈이 따갑고, 무릎이 후들거린다.
우리는 더 이상 얼굴을 붉히거나 떨고 싶지 않았다.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이런 모욕적인 말들에 익숙해지고 싶었다.
우리는 부엌 식탁 앞에 마주 앉아서 서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이런 말들을 되는 대로 지껄여댔다. 점점 심한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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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일 30분씩 이런 식으로 훈련을 하고 나서 거리로 바람을 쐬러 나간다.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욕을 하도록 행동하고는, 우리가 정말 끄덕없는지를 확인했다.
그러나 옛날에 듣던 말들이 생각났다.
엄마는 우리에게 말했다.
- 귀여운 것들! 내 사랑! 내 행복! 금쪽같은 내 새끼들!
우리는 이런 말들을 떠올릴 적마다 눈에 눈물이 고인다.
이런 말들은 잊어야 한다. 이제 아무도 이런 말을 해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시절의 추억은 우리가 간직하기에 너무 힘겨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정신훈련을 다른 방법으로 다시 시작했다.
우리는 말했다.
- 귀여운 것들! 내 사랑! 난 너희를 사랑해. …….난 영원히 너희를 떠나지 않을 거야. ……난 너희만 사랑할 거야. ……영원히. ……너희가 내 인생의 전부야. ……
반복하다 보니 이런 말들도 차츰 그 의미를 잃고 그것들이 가져다주던 고통도 줄어들었다.
<아고타 크리스토프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상)’ 정신훈련 중>
일하면서 어쩔 수 없이 갑질을 당하거나 모욕적인 언행을 듣게 되었을 때 나는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 중 정신훈련이라는 위의 챕터를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세계2차 대전 발발로 할머니의 집에 맡겨진 쌍둥이 형제가 모욕적인 언행과 상황에서 상처받지 않기 위해 매일 30분씩 모욕 대처 훈련을 하다가 문득 어머니가 해주었던 사랑의 말들이 떠올라 더 상처가 됨을 깨닫고 사랑의 말들을 주고받는 훈련으로 바꾼다. 그러나 그 또한 계속 반복하다 보니 그 의미를 잃고 엄마의 부재로 인한 상실감에 대한 고통도 결국 줄어들고야 말았다는 내용이다. 삼부작 소설의 ‘상’편에서도 루카스와 클라우스의 어린 시절을 다루고 있으니 거의 앞쪽에 있는 이 짧은 내용을 읽고 나는 속절없이 이 작가와 사랑에 빠져버렸다. 부조리하고 비합리적인 세상에서 나를 지킬 수 있도록 내가 견딜 수 있도록 그 길을 알려주고 나아가게 해주는 방법을 나는 이 책에서 찾았다. 타인이 주는 모욕감 때문에 엄마가 자신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깨달았던 것처럼 타인이 주는 모욕에도 우리 스스로를 지키고 그 모욕을 발판삼아 더 나은 ‘나’로 나아가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이 책을 읽기 전의 나는 상사의 고압적인 언행, 고객의 갑질언사, 동료와의 이해관계에서 오는 애매모호한 감정 속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돈벌이 때문에 불가피하게 내가 받는 수모 혹은 모욕’이라고 생각했다. 수면제 없이 잠들 수 없던 날이 많았고, 수면 부족으로 예민해진 성격으로 작은 일에도 자존심이 상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은 후의 나는 ‘모욕의 전환’(스스로 이름붙임) 훈련을 통해 모든 것을 이렇게 생각하기로 마음 먹었다. ‘내가 저 입장이었으면 더 심하게 말했을 거야.’ , ‘나는 저런 사람이 되지 말아야지.’ , ‘나는 선배가 되면 후배에게 저렇게는 하지 말아야겠다.’ , ’다시는 그런 말을 듣지 않도록 내가 더 노력할거야.‘ , ‘두고봐, 누가 더 잘되는지…’, ‘내가 더 노력해서 다시는 그런 말 안들을거야.’ 라고.
스물아홉의 초급 기획자는 말도 잘하고 성격도 싹싹해서 기획자로서의 잠재적 능력은 충분했으나 본인의 노력 부족으로 결국엔 7개월만에 기획일을 포기했다. 자기는 늘 칭찬만 들었는데 이곳에 와서 이렇게 못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으니 자괴감이 들어 더욱 자신감이 없어진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냉정하게 그 친구에게 충고했다. 지금까지의 경력을 버리고 기획자로서 새로 시작하는 일이라면 다른 사람보다 더 노력하고 더 많은 시간을 들여서 공부해야 하는데 워라벨은 중요해서 칼퇴해야 하고, 퀄리티는 당연히 떨어지고, 공부도 안하고, 잘하고 싶은 욕심은 가득한데 그만큼 실제적인 노력은 안하면서 칭찬과 인정은 받고 싶어하는 마음 때문에 자괴감들고 자신감이 없어지는 것이라고.
아인슈타인은 ‘어제와 똑같이 살면서 다른 내일을 기대하는 것은 정신병 초기증세’라고 말한 바있다. 노력도 안하면서 인정받고 싶고 타인에게 받은 작은 모욕에는 파르르 하면서 자신의 실수에는 관대하고, 일에 대해서 아직 모르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만 끼치는데 워라벨은 중요해서 칼퇴는 필수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오늘 보다 내일이 나은 하루가 되길 바란다면, 오늘 보다 내일 더 많이 웃길 바란다면, 오늘 보다 내일 덜 욕먹길 바란다면, 오늘 보다 내일 더 칭찬받길 원한다면 ‘노력’하면 된다. 칭찬에 안주하지 말고, 의미없는 칭찬과 의미있는 칭찬의 결을 이해해가면서 모욕도 발전의 발판으로 삼을 줄 아는 노력. 좋은 기획자는 이러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자질을 지닌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