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여행, 그 동상이몽

그녀의 속마음

by 온현

남편이 크로아티아ㆍ발칸반도 여행을 꿈꾼 지는 꽤 오래되었다. 그러나 나의 건강이 따라주지 못해 그 꿈은 계속 미뤄지고만 있었다. 이래저래 10년 가까이 기다리다 지친 남편이 작년 말에 덜컥 여행상품을 예약해 버렸다. 노화까지 겹치면 갈수록 더 가기 힘들어질 것을 깨달은 때문이리라.


그가 찾은 것은 무려 프레스티지(비즈니스) 석을 타고, 소규모 인원에 여유로운 일정, 특급호텔에 묵는 프리미엄 상품이었다. 남편은 누워서 가는 좌석이니 충분히 갈 수 있다며 강권했다. 그렇게 얼결에 먼 발칸반도 여행을 다녀왔다.


그는 여행지에서 늘 다음 여행을 꿈꾸는 기운 넘치는 남자다. 새로운 곳을 탐험하는 것을 즐긴다. 여기서 우리 부부는 어긋나기 시작한다. 최대한 많은 곳을 둘러봐야 성이 풀리는 패키지 타입의 남편에 비해, 나는 조용히 주변을 관찰하고 머무르며 쉬는 여행, 문화 기행을 즐긴다. 게다가 나는 여행마다 약보따리가 한 짐인 약골이다. 특히 시차가 있는 여행지의 경우 매번 도전하는 마음으로 떠나야 한다.


우리 둘의 체력은 행성 간 거리만큼이나 차이가 난다.


여행지에서 남편이 해결할 수 없는 [긴 시간의 이동 후 체력고갈, 시차에 따른 수면장애, 멀미, 낮은 면역력에 수반한 각종 위험]을 감당하는 것은 내 몫이다. 게다가 나는 알레르기 체질이라 음식도 가려야 한다.


엇비슷하면 좋으련만, 남편은 남자 치고도 힘이 세다. 활력이 넘친다. 몇 년 전부터는 여행지에서 캐리어 이동을 도맡는 것으로 나의 모자란 에너지를 보완해 준다.

하지만 무엇이든 과유불급이다. 경상도 남자의 배려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직진형이라 종종 곤란해진다. 자유여행은 그나마 괜찮다. 어쩌다 패키지여행을 갈 경우 남모를 불편함이 생긴다. 단체 장거리 여행에서 나만 빈 손으로 이동하다 보면, 다른 일행들의 의아해하는 시선이 느껴진다. 겉보기에는 아파 보이지 않는 외모 탓이다.


트렁크 두 개를 혼자 끌고 오는 남편과 걷노라면 세상 게으른 악처로 낙인찍히는 기분이다. 게다가 남편은 여행지에서 내 손에 핸드백이나 에코백 하나만 보여도 꼭 무게를 가늠해 본다. 조금만 무겁다 싶으면 숙소에 두고 가자고 한다.


"아니, 여행지에서 손가방도 없이 다니라니, 여성에겐 자잘한 짐을 넣을 공간이 필요한 법인데요."


불평해 보아도 결국 최소한의 짐을 남편의 배낭에 넣고 빈손으로 다녀야 한다. 하긴 휴대폰만 든 채 여행하는 처지에 아침마다 비실대니 한심한 마누라이긴 하다.


남편은 두 몫의 짐을 챙겨 다니면서도 여행지에서 새벽운동까지 한다. 그가 운동을 마치고 와도 나는 아직 자고 있다. 배고픈 남편이 아침을 언제 먹으러 갈 거냐 채근하기 일쑤이다.

올해 초 20여 일간 미국을 다녀오고는 체력의 격차가 더 심해졌다 싶었다.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려다 가랑이가 찢어진다는 속담이 생각났다.


그러나 인생에 영원한 승자는 없는 법!


이번에 열흘간 크로아티아와 주변국을 다녀오며 남편이 처음으로 여행지에서 앓았다. 기침과 함께 오한, 열이 나더니 이동하는 차 안에서 내내 잠만 잤다. 목이 많이 아프다고 했다. 결국 이틀 뒤에는 나도 옮아서 퉁퉁 붓고 약 부작용까지 왔다. 함께 고생했지만 '남편도 여행지에서 아플 수 있다'는 경험은 새로운 일이었다.


우리 둘은 가져간 비상약을 사이좋게 나눠 먹었다. 거의 내 몫으로 가져간 것이라 감기약이 모자랐다. 결국 다른 일행의 약을 얻어먹으며 여행지에서 버텼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이 주일 가까이 후유증으로 고생했다. 그러나, 예전과 달리 이번엔 좀 덜 억울했다. 남편도 아팠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는 늘 나만 골골대는 입장이었다. 남편이 간과한 것은, 지병이 생겼어도 체력이 안 될 뿐, 나도 늘 사회적인 활동을 해 온 사람이라는 점이다. 아프다고 집에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자연히 나의 외부활동을 지나치게 걱정(제한)하는 남편이 서운하게 여겨질 때가 있었다. 평소 체력적 약자로 고정된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그러니 아픈 남편을 보며 걱정이 되면서도 슬며시 위로가 되던 것이다. 사람이 아플 수도 있지, 암.


마누라의 이런 못된 속마음을 알면, 그는 서운해하려나? 그로선 아내를 배려한 것뿐인데, 그 아내는 고마운 줄 모르고 딴생각이나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항상 고정된 약자의 기분에는 당사자만 아는 씁쓸함이 한 자락 섞여 있다. 남편은 그동안 잘 몰랐을 것이다. 아팠던 적이 거의 없으니.

그도 이번에 아프고 나서 깨달았을까? 누구나 약자가 될 수 있고, 요청하지 않은 지나친 배려는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다는 점을.


쌓인 자격지심 때문이었는지, 남편도 아플 수 있다는 사실에 속이 풀렸다. 돌아와서는 내가 더 길게 힘들어하고 있지만, 남편도 이젠 건강을 자신할 수 없는 나이다. 서로를 잘 돌봐야 한다는 소리다.


마누라의 괘씸한 속내도 모른 채 벌써 다음 여행을 계획하는 그를 보며 혼자 씩 웃어본다.


"앞으로는 비상약을 더 넉넉히 챙기리라, 나도 보호자 역할을 해보리라."


부부 사이 배려라도 쌍방이 고루 주고받아야 떳떳하다. 유리인형 같은 체질일 뿐 유리멘털은 아닌 어느 고약한 마누라의 당돌한 다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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