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좋은 말일까 부담일까
어제 낮, 일찍 독립한 둘째 아들이 추석 연휴 내내 근무라 미리 집에 온다고 연락을 했다. 네 식구가 집에서 “함께” 밥을 먹은 게 일 년은 훌쩍 지난 듯하다. 늘 숨 죽은 배추처럼 시들거리는 엄마가 걱정됐던지 첫째는 점심을 배달시켜 먹자고 했다. 그래도 명절치레인데, 집밥 한 끼는 제대로 먹이고 싶었다. 어젯밤 온라인으로 부랴부랴 장을 보고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 낮, 새벽배송 덕분에 푸짐한 점심을 함께 먹고 차를 마셨다. 음식을 차리고 치우는 일은 남편이 도와주었다. 첫째는 쉬러 들어가고, 둘째는 소파에 누워 모처럼 나와 수다를 떨었다. 이전에는 없던, 한가로운 명절 전의 풍경이었다.
시부모님 생전에는 사람이 모이는 걸 좋아하셔서 명절마다 우리 집이 친척들의 집결지였다. 시외가 어른들, 시누이 가족들까지 늘 손님이 많았다. 맞벌이 외며느리였던 나는 명절마다 2주 전쯤부터 혼자 장을 봤다. 연휴가 시작되면 새벽부터 음식을 만들고, 하루 종일 식사상과 술상을 차렸다. 손님들이 돌아가실 때는 집집이 음식을 챙겨드리며 배웅했다. 설, 정월대보름, 단오, 추석, 시부모님 두 분 생신까지, 스무 명 넘는 친척들이 우리 집에 모이는 날이 많았다. 자연히 그 시절의 명절은 내게 일종의 노동절과 같았다.
아들들이 결혼하면 우리는 명절을 어떻게 보내게 될까? 아직 며느리감도 없지만, 상상은 할 수 있으니 식탁에서 의견이 오갔다. 남편은 앞으로 명절마다 나와 단둘이 여행을 다니고 싶다고 했다. 나는 각자 가정을 꾸리면 명절 한 번, 우리 부부 생일 한 번, 어버이날 한 번, 이렇게 1년에 두세 번만 보면 충분하다고 했다. 아들들이 굳이 명절마다 오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다.
소위 ‘며느라기 시절’을 오래 겪어서 미래의 내 며느리는 명절증후군 없이 편하게 지내게 해주고 싶다. 그렇다고 며느리를 열심히 챙길 체력도 못 된다. 어쩌면 자주 안 보는 것이 며느리도 나도 스트레스를 줄이는 방법이 아닐까.
그런데 큰아들은 의외로 생각이 달랐다. “서로 만나는 게 주목적이니까 밥은 배달시켜 먹고 집에서 편하게 지내면 되잖아요.”라고 했다. 며느리 입장에서는 ‘시댁 모임’ 자체가 부담일 수도 있을 텐데. 아직 미혼이라 그런지 이상적인 그림을 그린다. 둘째는 “그냥 우리 외가처럼 식당에서 만나서 밥 먹고 차 마시면 되죠.”라고 한다. 어쨌든 아직 둘에게 ‘안 만난다’는 선택지는 없는 모양이다.
아들들에게 명절은 반갑게 “함께” 하는 시간으로 기억되는가 보다.
하지만 나에게 명절의 “함께”는 체력과 심력을 모두 소모하게 만드는 단어였다. 경상도 집안 외며느리에게 명절의 “함께”란, 명절증후군의 다른 표현이었다.
누군가의 희생을 바탕으로 즐거운 “함께”라면, 그것은 더 이상 따뜻한 만남이 아니라 불필요한 부담에 가깝다. 가족이 함께 하는 시간은 분명 소중하지만, 이제는 그 "함께"가 더 이상 부담이나 의무가 아닌, 모두가 행복한 선택의 문제이기를 바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