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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멘토 이야기

방송대에서 만난 인연

by 온현

40대 중반이 되어갈 무렵, 나는 무척 지쳐 있었다. 대학에 남기를 포기하며 10년간 해 오던 강의를 내려놓았다. 몸이 약한 둘째 아들은 학교생활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시어머님이 대수술 후 우리 집에서 요양하신 시기였다. 교통사고 후유증과 지병으로 나의 건강도 좋지 않았다.


무너진 마음도 문제였다. 못 드는 밤이면 혼자 새벽까지 거리를 걸어 다녀도 답답함이 가시지 않았다. 꿈은 내려놓아야 했고 주어진 역할은 힘에 부쳤다. 이러다 우울증 약을 먹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위기감이 닥쳐왔다. 힘든 현실을 버티기 위해 숨 쉴 곳이 필요했다.

그래, 뭐든 지금 할 수 있는 공부를 하자. 하고 싶었던 국문학을 공부해 보자고 마음먹었다. 명색이 대학 강의를 하던 사람이 석ㆍ박사도 아니고 학사 편입이라니. 남편이 이해하지 못했어도 나는 절박했다. 그래서 일단 저지르고 보았다. 가족들을 챙겨야 해서 긴 시간 외출은 힘들었다. 출석 시간이 짧고 시간활용이 자유로운 방송대가 그때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막상 공부를 시작하자 낯선 교육시스템에 적응해야 하는 또 다른 과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 방송대에는 자율적 교육과정에 적응하기 힘들어하는 신입들을 재학생이 도와주는 멘토 제도가 있었다. 국문학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이 바로 3학년이 된 내게 필요한 이다 싶었다. 내성적이라 낯가림이 심한 나였지만 용기를 내어 멘토링을 신청했다.


이메일로 처음 연락해 온 H는 놀라울 만큼 친절하고 적극적인 멘토였다. 그녀는 직장인이자 두 자녀의 엄마라고 했다. 말 그대로 슈퍼우먼 같았다. 방송대에서 1학년부터 차근차근 공부해 온 그녀는 세심하게 나를 챙겼다. 오래지 않아 그녀와 나는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정 많고 인맥이 넓은 그녀 덕분에 토요일 오전의 스터디 모임에도 참여했다. 방송대에는 대학을 위해 바쁜 일정을 쪼개 진학한 직장인들이 많았다. 이미 석사 학위와 경력이 있으면서 학부과정을 다시 택한 나의 모습이 그들에게는 어찌 보였을까. 그저 하고 싶었다는 이유로 놀러 나온 철없는 주부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내성적인 내가 위화감 없이 녹아들 수 있었던 것은 H 덕분이었으리라.


2년의 시간은 금세 지나갔다. 한 학기에 한 주인 출석수업 때 학교 근처에서 먹은 도토리묵밥의 맛을 잊을 수 없다. 토요일 스터디 때 대학원 선배의 도움으로 기초부터 차근차근 다시 되짚어간 문법의 세계도 즐거웠다. 나 자신이 언어활용의 자유로움을 추구해 온 것으로 여겼으나 언어 속 규칙도 좋아함을 깨달았다. 함께 한 학우들의 학문을 대하는 진지한 자세는 놀라울 정도였다. 공부도 공부이지만 살아가는 자세를 배운 점이 많았다.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찾았던 곳에서 결혼 이후 좁았던 나의 세계가 확장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나는 아들의 문제에만 매몰되지 않고 나의 세상을 다시 일구었다. 그리고 나의 멘토는 그런 내게 진심으로 공감해 주었다.


그 2년은 어쩌면 현실을 잠시 잊기 위한 도피였고, 동시에 새로운 삶을 꿈꾸게 한 행운의 시간이기도 했다. 방송대에서의 만남 덕분에 앞으로 나갈 힘을 얻었다. 나는 전공수업을 빠짐없이 들으며 알찬 시간을 보냈다. 우울증 약 없이도 심리적 위기를 이겨냈고, 졸업 후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언젠가 기말시험을 마치고, 정답을 놓친 문제 하나를 아쉬워하던 H의 모습이 떠오른다.

순수하고 열정적인 만학도들이 모여 있던 방송대. 그곳에서 만난 귀한 사람들이 유독 그리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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