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꿈은 늘 10년 만기 투자상품과 같았다. 만기에 결산하면 때로는 일부 이익실현이거나 마이너스, 때로는 전액손실이었다. 그래도 그 자리에는 언제나 새로운 10년은 달라지기를 기대하며 또다시 꿈을 적립해 가는 내가 서 있었다.
10대에는 진로를 고민했고, 고정관념에 찌든 기성세대가 되기 싫었다. 하고픈 것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 사이에서 방황하며 어린 마음에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믿었다.
20대에는 이 불확실한 20대만 넘으면 무언가 단단해질 것 같았다. 대학 3학년 즈음부터 졸업 후 진로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20대 초반의 나는 졸업 후 독신으로 살면서 사회복지시설에서 평생 일하기를 꿈꾸었다.
그러나 대학원을 마치고 한참 일을 하던 시기에 낙상사고 후유증으로 경추디스크 진단을 받았다. 물컵 하나도 마음대로 못 들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 의사는 스트레스가 많은 직업은 유지하기 어렵다고 잘라 말했다. 소명으로 여긴 직업에 대한 꿈이 무너지던 때, 독신의 길도 가족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휴직과 오랜 치료 후 간신히 회복된 후 실무를 다시 시작했다. 꿈이 조금 자랐다. 박사과정에 진학해 좋은 사회복지사를 길러내는 학자가 되고 강단에 서는 것을 꿈꾸었다. 그러다 30대가 될 무렵 갑자기 결혼을 하게 되었다.
30대 주부가 되니 단단해지기는커녕, 결혼과 더불어 어설픈 책임의식에 휘청거렸다. 나는 보수적인 경상도 집안의 외며느리였다. 연이어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결혼은 이질적인 두 문화의 만남이었다. 수시로 문화적인 충격에 휘청이던 시절이었다.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방황하면서도 정규직과 병행해 대학 강단에 섰다.
내가 겸임교수로 일하던 시절, 먼저 공부를 마치고 나의 학업을 돕겠다던 남편은 교수가 되었다. 나는 아픈 둘째 때문에 정규직을 그만두어야 했다. 사회인으로서 나의 미래는 불안정했다. 언제 공부할 수 있는 상황이 될까, 꿈을 억누르며 살았던 30대는 안팎으로 치열한 싸움이었다. 남편은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공부를 반대했다. 결혼전 약속을 믿었던 내게는 그 자체가 큰 충격이었다.
결국 40대가 되자 나이와 남편의 반대에 밀려 오랜 꿈인 박사과정을 포기했다. 새로운 일과 공부를 시작했지만 힘들게 두 아들을 키우며 무리한 탓에 건강이 곯아 있었다. 대학 강의도 스스로 내려놓았다. 일상과 병행한 소소한 취미, 공부와 일상을 기록하는 일 외에는 거의 지병과 싸우며 지냈다. 사춘기가 된 아들들에게도 힘든 사건들이 연속되어 마음이 무너졌던 시기.
이 10년 사이 나는 전공을 바꾸어 학부 편입과 졸업, 독서, 논술지도자 자격을 취득했다. 덕분에 프리랜서로 일을 계속할 수 있었다. 뭐가 됐든 일을 하는 동안은 나자신으로 사는 것 같았다.
50대에는 박사과정이 어떤 것인지 경험이라도 해보고 싶어 관심사였던 차 관련 대학원에 입학했다. 때늦은 공부와, 여전한 나의 지병과, 아들의 건강 이슈와 시어머님 병구완으로 세월이 빠르게 사라져 갔다. 하루를 마치고 마시는 차(tea}가 거의 유일한 쉼이었던 시기였다.
그사이 코비드 기간을 겪었다. 대상포진 두 번, 코로나 두 번을 앓았고, 시어머님이 암으로 소천하셨다. 시누이와 간병의 짐을 나누었음에도 이후 삼 년간 건강이 바닥을 쳤다.
드디어 올해, 60대가 되었다. 유난히 자식들을 의지하시는 친정어머니께서 점점 쇠약해지고 계시지만, 더는 물러날 곳이 없는 나의 시간을 어떻게든 지켜낼 참이다. 새로운 10년의 꿈을 꿀 시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게 꿈을 적립해가고 있다. 정말 해보고 싶었던 글쓰기를 흉내라도 내어보게 되었으니. 이번 10년의 결산은 부디 흑자이기를 바라며 오늘도 감사히 글을 쓴다.
꿈꿀 자유는 누구에게나 공평히 주어진 것 아닌가.
다음 10년, 70대의 결산은 복리의 열매가 있을 것이라 기대하며 걷는 길은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