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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에 새겨진 훈장

관계, 그 복잡 미묘한 것에 대하여

by 온현

우리 몸의 뼈는 다치고 아팠던 것을 평생 기억한다는 말을 재활의학과에서 들었던 적이 있다. 뼈가 기억하듯 우리 영혼도 상처를 기억한다고 가정해 보면 뿌리 깊은 트라우마를 이해하기 쉬울 것 같다. 하지만 기억이 난다고 해서 다 아픈 것은 아니다. 환상통이나 환각통, 그리고 실제 내 삶에 영향을 미치는 동통을 구분해 볼 일이다.


어쩌면 영혼의 통증, 심리적 불안은 과거를 잘 이겨낸 자에게만 주어지는 기념사진 같은 환상통이 아닐까. 기억은 아프다. 하지만 그 아픈 기억은 과거의 어려움을 극복해 낸 이에게는 하나의 값진 훈장일지도 모른다.



오래전 미혼의 막내 시누이가 본가에서 독립할 때, 나는 임신 6개월경이었다. 손아래 시누이라 동생 같기도 해서 온갖 살림살이를 내가 챙겨주었다. 나중 일이지만 시누이는 혼수 준비도 내게 부탁했다.


며칠 전, 그 시누이가 우리 집 둘째의 졸업과 이사 선물로 500만 원을 보내왔다. 이사할 집에 필요한 것을 사 주고 남는 돈은 아들 몫으로 투자해 주라며...


둘째는 돌도 안 된 아기일 때 손위 시누이와 시어머님의 실수로 두 번의 뇌출혈을 겪었다. 미숙아로 태어나 약하고 작은 데다 외상까지 겹쳐, 아이는 여러 번 입원하며 힘들게 자랐다. 초등학교 때는 후유증으로 평생 약을 먹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때의 충격은 엄마인 내게 공포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적인 경상도 집안의 외며느리였던 나는 마음의 상처를 속으로만 삭여야 했다.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던 사고였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아이를 치료하며 남 모르게 상처가 곪아 터지고 아무는 동안, 세월이 흘러 시부모님이 돌아가셨다.


지금도 두 시누이와 나는 편히 지내는 가까운 사이다. 평소 막내 시누이는 몸이 약한 손위 시누이 대신 집안일을 잘 챙기는 편이다. 3년 전 암으로 돌아가신 시어머니의 간병을 번갈아 했던 동지애도 있어 더 끈끈해진 듯하다. 이번 추석은 연휴가 길어 모처럼 우리 집에서 다 같이 명절 음식을 함께 먹고 근황을 나누었다.


성격상 시어머님과 손위 시누이는 아이가 다친 일에 대해 말로 사과하신 적이 없고, 나도 그 얘기를 꺼낸 적이 없다. 하지만 막내 시누이는 오랜 기간 내가 힘들어한 것을 안다. 아마 둘째를 위한 선물에는 언니와 어머니의 실수에 대한 미안함과 나에 대한 고마움도 일부 포함되었을 듯하다.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시누이의 그 마음을 고맙게 받았다. 이제는 웃으며 지난 일로 넘길 수 있는, 지나간 기억이기 때문이다. 종종 마음이 뾰족해질 때는 아, 환상통이 남아 있구나 하고 넘길 수 있을 만큼 회복되었다.


그러고 보면 어떤 상처는 놓지 못하고 거머쥘수록 내 손해였다. 이미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 시간이 걸렸지만 상처를 잘 털어낸 덕분에 남편도 나도, 가족과 소원해지지 않았다. 다행히 둘째도 여러 어려움을 이기고 잘 자랐다. 지금은 독립해서 사회인으로 제 몫을 하며 혼자 지내는 모습이 대견하다.


살다 보면 친근한 관계, 특히 가족 간에는 때때로 시비를 가리기 어려운 일들이 벌어진다. 상처가 트라우마가 되지 않고, 환상통이 진짜 통증처럼 남지 않도록 잘 추스르는 태도로 살아가고 싶다.

영혼에 새겨진 훈장 몇 개쯤이야 누구나 가지고 있을 법한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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