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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치지 않는 자의 변명

누구나 선생일 필요는 없다

by 온현

꽤 오랜 시간, 가르치는 일은 직업 혹은 자원봉사의 형태로 내 삶의 일부를 차지했다. 대학 강의, 과외지도, 주일학교 교사를 하면서 아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그러나 긴 고민 끝에 나는 가르치는 일을 그만두었다.


지금은 작고하신 미우라 아야꼬 씨도 초등학교 교사 출신이었다. 그녀는 영화로도 만들어진 소설 '빙점'의 작가이다. 나는 수필집 '길은 여기에"로 처음 이 분의 글을 만났다. 이 분이 기독교인이 된 계기는 조금 특별했다.


세계대전 당시 미우라 아야꼬 씨는 자신이 배운 지식과 가치관대로 누구보다 성실히 초등학생들을 가르친 교사였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그녀는 혼란에 빠졌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학생들에게 제국주의를 가르쳤다는 것과 민주주의 입장에서 그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하루아침에 바뀐 교재를 보며 또다시 잘못 가르쳐서 학생들의 인생을 망칠 수 있다는 두려움에 더는 교단에 서지 못했다.


"과연 무엇이 옳은 것인가?" "변하지 않는 절대가치는 과연 존재하는가?"


고민의 답을 찾지 못한 그녀는 자포자기했다. 당시로서는 매우 방탕한 생활(자유연애와 이중약혼 등)을 하다 결핵에 걸리고 만다. 생사를 오간 장기 요양 중에 기독교인인 남편과 만나 비로소 삶의 희망을 찾게 되는 과정을 담담히 쓴 자전적인 에세이가 '길은 여기에'였다.


가치관의 혼란이 인생을 뒤집을 만큼 그토록 중요한가? 처음에는 깊이 공감되지 않았다. 가르치는 자로서 그녀의 고민을 제대로 이해한 때는 학업을 병행하기 어려운 환경이 되어 박사과정을 포기한 후였다. 학문적으로 더 발전하지 못하면서 학생들을 습관적으로 가르치고 있구나 느꼈을 때, 최선의 것을 주지 못한다는 괴로움이 나를 못 견디게 했다. 겸임교수는 학위와 큰 관계없이 계속할 수 있었지만 결국 나는 강의를 내려놓았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하던 일을 없애고 나니 허전했다. 시간이 난 김에 배우는 것에는 그만한 책임이 따르지 않으니 다시 학생이 되었다. 과감히 학부생으로 편입해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국문학을 공부했다.


그즈음 우연한 기회에 학생들의 독서논술지도를 시작하게 되었다. 전공 두 개를 접목한 언어수업은 비교적 지식과 매뉴얼이 분명한 분야이다. 부담이 적고 보람이 있는 일이라 어쩌다 보니 십여 년간 이어졌다.


그 사이에 차에 점점 더 빠지게 된 나는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떴다. 혼자 마시던 차에서 벗어나 함께 마시는 티파티, 다회의 세계를 알게 되었다. 여기에 더해 차에도 체계적인 공부가 있다 는 것을 듣고 여기저기서 차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십여 년간 집중해서 공부하며 자격증도 몇 개 따고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그러나 차를 가르치는 일은 아예 시도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내가 느끼는 차의 가장 큰 매력은 그 깊고 넓은 세계에 있다. 그만큼 차를 가르치려면 제대로 알아야 하는데, 나의 완벽주의가 발목을 잡았다.


차문화의 세계는 복잡하고 다양한 의견들이 존재한다. 공부할수록 미지의 영역이 자꾸 보인다.


여기서 미우라 아야꼬 씨가 만났던, "잘못 알고 가르치는 거면 어쩌지?"라는 두려움이 생기는 게다. 아니, 그보다 해도 해도 부족하다 싶으니 차를 잘 안다고 자신하기 어렵다. 어쩌면 내가 가르친 내용에 대해 책임지기 싫은 얄팍한 이기심도 있을 듯하다.


제대로 알고 가르치는 일은 어렵다. 특히 차분야는 다양한 의견이 공존하니 더욱 그렇다. 공부할수록 모르는 부분이 많고, 내가 아는 지식이 정확하지 않을 가능성이 늘 존재한다. 그만큼 차와 차문화는 용기가 있어야 가르칠 수 있는 분야라 생각한다.


그동안 내가 만난 차 선생님들은 두려움을 넘어설 용기를 지닌 분들이었다. 자신이 가르치는 일에 자신감이 있고, 계속해서 배우고 오류를 정정해 가며 가르칠 용기.


그러나 내게는 더 이상 그런 도전의식이나 체력이 없다. 적어도 차분야에 있어서는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늘 배움을 꿈꾸는 차인으로만 남고 싶은 것이다. 배우는 일에는 책임이 따르지 않으니.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늘 바삐 살았던 삶에서 가장 좋은 취미이자 쉼의 원천인 '차'까지 직업이 되는 것은 원치 않는 속마음이다. 부담 없이 차 이야기를 나누고 자유로이 의견을 교류하는 다회만으로도 나의 차세계는 충분하다 싶다.


배웠다고 누구나 선생일 필요는 없다. 현재의 나는 공부하는 학생의 자리에만 머무르기를 선택했다. 가르치는 자의 자리에 돌아가지 않아도 행복한 학생으로 살아갈 자신은 있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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