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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금 백만 원의 기적

가장의 자리

by 온현

남편은 결혼하자마자 박사논문준비를 위한 휴직을 선언했다.


맞벌이에서 갑자기 계획에 없던 외벌이 가장이 된 나는 임신초기였다. 결혼생활에 적응하랴 일하랴 무리한 탓인지 절박유산, 조기파수, 조산기로 두 번이나 입원하며 힘들게 첫 아이를 만났다. 그리고 생각보다 빨리 찾아온 둘째의 임신 6개월 때, 전세 만기가 되었다. 이사할 집을 찾아보니 전세가 급격히 올라 있었다. 남편의 학위과정은 끝나지 않았고, 저축금을 다 합쳐도 부동산중개수수료, 이사비용을 감당할 돈이 모자랐다.


결혼은 양가 부모님으로부터의 정서적ㆍ경제적 독립이라지 않나. 우리는 부모님께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 없었다. 남편의 학비와 아이 양육비, 생활비와 저축을 감당해 왔듯 이사도 우리 힘으로 하는 것이 당연했다.


이사가 한 달 남짓 남았던 어느 일요일, 남편이 당시 내가 정기구독하던 육아잡지 표지를 보았다. 임신ㆍ육아수기공모 광고가 있었다. 우수상 상금이 100만 원! 30년 전 100만 원이면 이사비용에 부동산 중개수수료까지 충당하고도 남을 꽤 큰 금액이었다. 문제는 그 광고를 발견한 시점이었다. 접수 마감 전날인데 이미 늦은 오후였던 것.


남편은 글을 쓰기만 하면 다음날 자신이 직접 가서 제출하겠다며 상금을 타서 이사하자고 성화였다.

그 근거 없는 자신감에 떠밀려 그날 한밤중까지 큰 아이의 임신ㆍ육아수기를 썼다. 퇴고할 시간도 없어 맞춤법만 체크한 글이었다. 기왕 썼으니 우리는 함께 손잡고 기도했다. 다음날 남편이 직접 잡지사에 찾아갔을 때 원고를 접수한 직원이 마감 당일 소인도 유효하다고 웃으며 알려주었단다.


잡지사에서는 한참 소식이 없었다. '급히 쓴 글인데 안 되는 게 당연하지' 싶으면서 혹시나 했던 기대도 사라진 어느 날이었다. 낯선 번호로 직장에 전화가 왔다. 우수상 당선 통지였다. 와우!


만삭이 다 된 배불뚝이 임산부면 어떠랴. 남편과 함께 기꺼이 시상식에 참석해 펑퍼짐한 임신복 차림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우리는 크리스털 상패와 100만 원을 받고 무사히 이사를 할 수 있었다. 그 후 여러 번 이사를 했지만 그때의 내 글이 실린 잡지와 크리스털 상패는 아직 우리 집 서가에 보관 중이다.



후일담이지만 남편은 급한 마음에 상금 내역을 자세히 못 보았다며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우수상 위에 대상이 있었고 대상 상금은 200만 원이었던 것이다. 기왕이면 대상을 두고 기도했어야 한다는 그의 말에 몇 번을 웃었는지 모른다. 가끔 남편의 엉뚱하고 근거 없는 자신감과 단순한 믿음이 부럽고 존경스러울 때가 있다.


급히 쓰느라 퇴고도 못한 내 글이 뽑힌 것은 아마도 특별한 임신ㆍ출산과정과 열심히 출산을 함께 준비한 남편의 모습이 글에 나타나 있었기 때문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한 번 상금의 달콤함을 맛본 남편이 툭하면 "글 써서 돈 벌자"라고 나를 들볶는 후유증을 남겼지만, 이 일은 우리가 만난 작은 기적이었다. 그 100만 원은 그 시절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우리에게 그만큼 소중했던 금액이었기에.


그 돈은 단순한 이사비용이 아니었다. 우리 부부가 독립된 가정을 이룬 뒤 서로를 신뢰하며 함께 문제를 해결한 첫 기억이자 성장의 마중물이었다.


육아수기 시상식에서 태중에 있었던 둘째가 네 살이 되었을 때, 남편은 드디어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대학에 임용되었다. 나는 약 5년간 단독으로 집안의 가장이었고 그후로도 일을 계속했다.

남편은 지금도 경제적 문제를 나와 의논하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는다. 부부는 서로를 책임지는 관계라 생각하기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힘을 합해 대응한다.


첫 시작이 그래서인지 지금도 우리 부부는 공동가장이라는 의식을 지닌 채 서로 고마워하며 살고 있다. 함께 살아오는 동안 부부는 어떤 문제이든 등을 기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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