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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지윤 Oct 21. 2023

먹지 못해 쓰는 맛

프롤로그

공복 13시간째. 어제 마지막으로 먹은 건 마카다미아 여덟 알 남짓과 방탄커피. 배가 좀 부르길래 간단히 먹었더니 새벽부터 허기가 진다. 앞으로 세 시간은 더 견뎌야 입에 뭐라도 넣을 수 있다. 간헐적 단식(하루 중 8시간 안에 모든 식사를 끝내고 나머지 16시간 동안 공복을 유지하는 식습관)과 저탄고지(탄수화물이 들어간 음식은 줄이고 지방이 들어간 음식을 늘려 인슐린 저항성을 낮추는 식이요법) 식단을 시작한 지 어느덧 석 달째 접어들었다. 찰흙처럼 덕지덕지 붙어 있던 등살은 조각칼로 다듬은 것처럼 점차 떨어져 나갔다. 혈액순환이 잘되지 않아 늘 퉁퉁 불어 터진 면발 같던 손가락과 다리는 조금씩 원래 형태를 찾아가고 있다. 옷장에 있던 옷들 대부분은 헐렁해졌고 아침마다 바지에 벨트를 칭칭 감으며 나는 희열을 느낀다.

한결 몸이 가벼워진 대신 부작용 하나가 생겼다. 하루 종일 먹을 생각만 한다는 것. 빠져나간 체지방 대신 그 자리를 식귀가 꿰차고 앉았는지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음식을 떠올린다. 저탄고지 식단을 위해 식품 관련 온라인쇼핑몰을 들여다보고 할인쿠폰을 기다리면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금지된 맛들을 되새기며 입맛을 다신다. 달콤하고 쫄깃하고 입안을 꽉 채우던, 이젠 추억이 되어버린 맛들.

한 입만 맛보라며 자꾸 부추기는 식귀의 유혹을 뿌리치려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식귀의 세력이 왕성한 새벽마다 허기진 배를 달래 가며 내 미각에 새겨져 잊히지 않는 맛들의 추억을 하나하나 소환하려 한다. 먹지 못해 더욱 생생한 기억의 맛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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