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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지윤 Oct 21. 2023

일생에 단 한 번뿐인 맛

우동

세상을 의식하던 때부터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나는 밀가루와 관련된 모든 음식을 좋아하던 사람이었다. 특히 면류. 그중에서도 우동은 처음 맛본 날부터 지금껏 한결같이 내 마음을 사로잡는 음식이다.

전라도 광주에 살던 어린 시절, 방학 때면 서울에 사는 사촌을 만나러 긴 시간 기차를 탔다. 한참을 가다 보면 서대전역에서 십여 분쯤 기차가 정차했는데 그때 엄마는 나와 언니의 손을 꼭 붙잡고 플랫폼에 있는 간이식당에 갔다. 그때 처음 가락국수라는 걸 먹었다. 통통하고 뽀얀 면발이 연한 갈색빛의 뜨거운 국물에 담겨 있었다. 우리는 일회용 용기에 담긴 국수를 각자 하나씩 들고 서서 호호 불어가며 부지런히 면발을 흡입했다. 탄성이 적어 조금이라도 앞니에 힘을 주면 면발이 톡 끊어졌고, 국수를 거의 다 먹었을 무렵에는 가닥가닥 끊어진 짧은 면발들이 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다. 기차 떠난다고 엄마가 재촉하는 소리에 그 면발들을 남은 국물과 함께 후루룩 삼키고 후다닥 다시 기차에 올라탔다. 곧이어 철컹 소리가 나면 기차는 서서히 묵직한 몸을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점점이 멀어져 가는 간이식당에 시선을 붙박은 채 나는 귀갓길에 다시 먹게 될 뜨끈한 한 그릇을 상상했다. 사촌과 만날 생각에 잔뜩 들떠있으면서도, 입가에 묻은 짭조름한 국물을 야무지게 핥으며 어서 그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했다.

굵은 면발 때문인지 가락우동이라고도 불렀던 이 음식과의 추억은 그 시절을 마지막으로 톡 끊겼다. 어린 나를 사로잡았던 그 맛은 머리가 굵어질수록 점점 희미해져 갔지만 미각을 자극하던 짠맛과 톡 끊어지는 독특한 식감, ‘우동’이라는 단어만은 내 기억에 단단히 뿌리내렸다. 그리고 나는 우동이라는 이름이 붙었거나 비슷한 맛이 나는 음식이라면 무엇이든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다. 컵라면은 튀김우동만 먹었고 중국집에서 가족들이 짜장면이나 짬뽕을 고를 때 나는 우동을 시키며 별나단 소리를 들어야 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르거나 기차역 간이식당에 가면 내 메뉴는 늘 우동이었다. 스물일곱의 내가 일본 유학을 떠나겠다고 하자 친언니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우동은 실컷 먹겠네.” 우동을 향한 나의 사랑은 그야말로 한결같았다.

우동러버답게 일본 유학 시절 나의 첫 일터는 우동 가게였다. 낮에는 우동을 팔고 저녁에는 선술집으로 변신하는 그곳에서 나는 최초의 외국인 아르바이트생이었다. 그래선지 점장 N 씨는 내가 어떤 실수를 해도 너그러이 용서해 주었다. 일본어가 서툴러서 주문을 잘못 받는다거나 계산이 틀린다거나 손님으로 꽉 찬 저녁 시간에 됫병짜리 술병을 와장창 깨뜨린다거나. 그런 날이면 N 씨는 평소보다 더 맛있고 푸짐한 식사를 준비해 주었다. 아르바이트 면접을 볼 때 우동을 무척 좋아한다던 내 말을 기억하고 있던 그는 식사 때마다 특별한 우동을 만들곤 했다. 한국인인 나를 위해 고춧가루를 잔뜩 풀어 넣은 얼큰한 고기우동이라든가 시뻘건 짬뽕 국물을 베이스로 한 우동이라든가. 나는 그가 건네는 곱빼기 크기의 용기를 늘 깨끗이 비웠고, 그러면 어김없이 뜨끈한 우동 국물과 함께 우울한 마음도 씻겨 내려갔다.

N 씨는 우동에 진심인 사람이었다. 샐러드나 안주 메뉴는 아르바이트생에게 시키는 경우가 많았지만, 우동만큼은 그의 영역이었다. 육수를 직접 만드는 건 기본이고, 면발을 삶은 뒤 찬물에 여러 번 헹궈서 탱탱한 식감을 유지하도록 하는 작업과 고명으로 올릴 재료들을 튀겨내는 일까지 모두 N 씨가 도맡았다. 얇게 썬 삼겹살을 육수에 넣고 끓인 고기우동이나 느타리버섯을 넣고 푹 우려낸 버섯우동도 맛있었지만 갓 튀겨낸 새우나 가지, 야채튀김을 곁들인 튀김우동의 맛은 뛰어넘을 수 없었다. 적당히 짭조름하면서 감칠맛이 우러나는 국물을 한 숟가락 떠먹은 뒤 바삭바삭한 가지튀김을 한입 베어 물면, 연한 속살에서 채즙이 터지며 파릇한 향이 입안을 휘감았다. 탱탱한 면발은 몇 번 씹을 새도 없이 사르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 위장을 뜨끈하게 채워주었다. 기차역에서 후루룩 먹던 가락국수의 맛을 내 미각에서 완전히 지워버릴 만큼 N 씨의 우동은 일품이었다.

월급 점장이었던 N 씨는 사장이 운영하는 다른 가게로도 자주 파견을 나갔다. 손님 중에는 술을 마신 뒤 입가심으로 우동을 먹는 이들이 많았고, 그는 자기가 가게를 비웠을 때 우동을 찾을지도 모를 손님을 위해 주방 아르바이트생이던 B에게 육수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 요리에 뜻이 없었던 B는 N 씨의 설명을 늘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나는 홀을 살피며 카운터석에 선 채 귀동냥으로 엿들은 육수 레시피를 수첩에 메모했다. 훗날 귀국해서 N 씨의 우동이 생각날 때면 만들어 볼 심산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N 씨가 외출하면서 B에게 저녁 장사 전에 육수를 준비해 두라고 일렀다. 무슨 배짱에선지 그는 드문드문 떠오르는 기억에 의지한 채 대충 비율을 맞춰 육수를 만들었다. 가게에 돌아와 육수 맛을 본 N 씨는 노발대발했고 그날 우동을 찾던 손님들은 아쉬운 발길을 돌려야 했다. 퇴근길, 어깨가 축 처진 B에게 나는 레시피를 적어둔 수첩을 빌려주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 B는 가게에 나오지 않았다.

수없이 아르바이트생이 들어왔다 나가기를 반복하는 동안 나는 묵묵히 그곳에서 일했다. 가게가 폐업할 때까지 나를 그곳에 붙박게 한 힘은 변함없는 우동의 맛, 그리고 N 씨의 따뜻한 마음이었다.

가게에 손님이 없을 때면 N 씨는 내게 일본어를 하나씩 알려주곤 했는데, 일을 시작하던 첫날 노릿하게 구운 은행 꼬치를 먹어보라고 건네며 그가 알려준 말은 ‘일기일회(一期一會)’였다. 생애 단 한 번뿐인 인연. 일본어로는 ‘이치고이치에’라 읽는 이 말을, N 씨는 냅킨에 또박또박한 글씨로 써서 내게 보여주며 말했다.

“점장과 아르바이트생으로 만난 우리도 이치고이치에야.”

일본어가 서툰 날 위해 그는 천천히 반복해서 말해주었다.

“지윤과 나의 만남은 이치고이치에야.”

힘을 담아 전해준 그 말과 우동 한 그릇에 의지한 채 유학 생활의 절반이 넘는 시간을 나는 우동 가게에서 보냈다.     

귀국한 뒤 한동안 우동을 맛있게 먹을 수 없었다. 어느 동네를 가든 일본식 우동 가게가 쉽사리 눈에 띄었지만, N 씨가 끓여내던 국물 맛과는 확연히 달랐다. 적당히 짭조름하면서도 깔끔한 국물이 밴 면발을 흡입하는 순간, 용기의 바닥을 볼 때까지 젓가락을 내려놓을 수 없었던 맛. 일생에 단 한 번뿐인 이치고이치에 같은 맛. 한때는 그 맛을 찾으러 우동의 본고장이라는 일본의 가가와현으로 여행을 가기도 했다. 3박 4일간 하루 세끼, 총 열두 끼 모두 우동을 먹었지만 N 씨의 국물 맛은 찾을 수 없었다.

여전히 나는 우동을 좋아한다. 이제는 타협하는 마음이 생겨서,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파는 평범한 우동이든 어느 시골길에 우연히 들른 식당에서 사 먹은 불고기 우동이든 남김없이 해치운다. 하지만 이따금 N 씨의 우동이 떠오를 때가 있다. 요란하게 비가 오는 날이라든가, 기분 좋게 맥주를 마시고 휘청휘청 집으로 돌아오는 길. 까만 용기에 굵고 기다란 면발을 동그랗게 쌓아 담은 뒤 육수를 한 국자 붓고 얇게 썬 대파와 튀긴 유부를 올리던 N 씨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그러면 나는 어김없이 뽀얀 면발을 후후 불어가며 우동을 먹던 그 시절이 몹시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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