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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지윤 Oct 21. 2023

하얀 미소의 맛

스마일 빵

숙소로 돌아와 이슬아 수필집을 읽다가 다시 까무룩 잠이 들었다. 눈을 떠 보니 완전히 날이 밝아 있었다.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살짝 열자 묵직한 겨울 공기가 밀물처럼 파고들었다. 거리를 내다보니 출근길을 서두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제법 늘었다. 한두 시간 전 새벽 산책의 여운은 이미 사라지고 난 뒤였다. 자이모쿠자 해변을 활개 치던 바람과 소금쟁이처럼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던 서퍼들, 모래사장에 찍혀 있던 강아지 발자국. 모든 게 까마득한 꿈인가 싶었는데 항변하듯 테이블 위에 콘수프와 밀크커피 캔이 떡하니 놓여 있었다.

수프의 맛을 떠올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꼬르륵 소리가 났다. 단잠에 취한 친구를 흔들어 깨운 뒤 어제 편의점에서 사 온 샌드위치와 새벽 산책길을 동행해 준 캔을 들고 1층 공동주방으로 내려갔다. 우리보다 먼저 온 숙박객이 토스트에 잼을 발라 먹으며 아침 정보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다. 여자가 먼저 아침 인사를 건넸다. 여행지에서 으레 그러하듯 서로의 국적을 확인하고 이 동네에 온 이유를 주고받았다. 여자는 혼자 여행 중이라고 했다. 근처 해변으로 새벽 산책을 다녀왔다고 하자 여자는 반색하며 구글맵으로 위치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여기에 머무는 동안 꼭 한 번은 해변으로 새벽 산책을 다녀와야겠네요.”

샌드위치를 절반쯤 먹었을 무렵, 여자는 사용한 식기들을 정리한 뒤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즐거운 여행을 하길 바란다는 덕담도 잊지 않았다. 그 이후 체크아웃할 때까지 더는 여자를 만날 수 없었다. 다 식어버린 콘수프와 밀크커피를 곁들여 대충 아침을 먹은 뒤 일찌감치 숙소를 나섰다. 우리가 가마쿠라에 온 목적, 소설 《츠바키 문구점》에 나오는 음식들을 맛보기 위해. 첫 타깃은 스마일빵(소설 속 누군가는 ‘싱글벙글 빵’이라 부르는)이었다.     


도중에 렌바이에 있는 빵가게에 들러 갓 나온 팥빵을 두 개 샀다. 렌바이의 정식 이름은 가마쿠라 시 농협연합판매소로, 설날 연휴 사 일 빼고 거의 연중무휴로 아침 8시부터 가마쿠라 근교 농가에서 수확한 채소를 파는 시장이 열린다. 그 한 모퉁이에 파라다이스어레이라는 자그마한 빵가게가 있는데, 그 집의 팥빵이 일품이다.
동그란 빵 표면에 하얀 가루로 그린 스마일 마크가 언제 봐도 귀엽다. 금방 만든 건지 따끈따끈하다.
                                                      
                                                                              -오가와 이토, 《츠바키 문구점》에서-


구글맵을 켜서 ‘농협연합판매소’를 목적지로 설정했다. 걸어서 가기에 좋은 거리였다. 공기는 기분 좋게 차갑고 하늘은 새파랗다 못해 투명했다. 낮은 건물들 사이사이로 겨울 볕 특유의 따스함이 사뿐히 내려앉으며 반짝반짝 빛났다. 철길 건널목에 다다르자 차단기가 서서히 내려가더니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잠시 후 기차 한 대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미끄러지듯 철길을 통과해 나갔다. 스치는 창 너머로 교복과 정장 차림의 사람들이 언뜻 보였다. 일상의 풍경을 관찰자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다시금 내가 여행자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여행이 끝난 뒤에도 계속 이런 시선을 유지할 수 있다면 하루하루가 마냥 설렐 텐데. 그런 생각을 하는데 어느새 차단기가 올라갔고 철길은 다시 평온한 상태가 되었다. 여행자답게 우리는 철길 위에 잠시 머무른 채 이런저런 사진을 찍은 뒤 다시 목적지로 향했다. 도보로 십여 분이면 충분할 거리를, 주변 풍경에 빠져서 두 배의 시간을 들여 걸었다. 이 또한 여행자이기에 가능한 여유였다.

농협연합판매소는 아주 오래전부터 마을 어귀를 지키고 있는 정승처럼 어딘가 듬직하면서도 예스러운 정취를 품은 곳이었다. 자그맣게 축소해 놓은 재래시장 느낌이었는데 채소와 이런저런 식품들이 자판에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었다. 한 손에 장바구니를 끼고 물건을 고르는 동네 주민의 모습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어쩌면 츠바키 문구점의 포포는 스마일빵을 사러 온 김에 종종 이곳에서 장을 봤을지도 모른다. 달걀이든 호박이든 뭐라도 하나는 꼭 사고 싶어 지게 만드는 정경이었다.

시장 안의 골목으로 들어갔더니 덕지덕지 스티커들이 붙어 있는 오래된 미닫이 유리문이 눈에 띄었다. 마치 80년대 담뱃가게를 연상시키는 외관. 가까이 다가가자 달콤한 냄새가 콧속을 파고들었다. 미닫이문 위에 가로등처럼 빼꼼 머리를 내민 오렌지색 조명 아래로, 역시나 오렌지색 타이포그래피로 인쇄된 ‘PARADISE ALLEY(파라다이스 어레이)’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구나! 포포가 좋아하는 간식을 파는 빵가게. 이웃에 사는 바바라 부인과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가 샀던 팥빵. 바닷가 산책길에 바바라 부인과 함께 먹으려다 깜빡 잊은 나머지, 포포는 혼자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몰래 팥빵을 먹는다. 그 빵을 파는 파라다이스 어레이가 눈앞에 있었다.

밖에서도 보이는 유리 진열장 너머로 익숙한 형태의 빵이 눈에 들어왔다. 그저 소설 속 문장으로 모양을 상상하고 맛을 떠올렸던 스마일빵이 하얀 미소를 띤 채 진열되어 있었다. 나는 포포가 된 기분으로 바바라 부인, 아니 친구의 몫까지 팥빵 두 개를 샀다. 근처에 있는 신사를 둘러볼 예정이었기 때문에 빵은 일단 가방에 넣어두었다. 소풍날 아침, 전날 슈퍼마켓으로 달려가 검정 비닐봉지에 가득 담아 사 왔던 과자를 소풍 가방에 소중히 옮겨 담는 심정이었다. 생각해 보면 소풍을 가서 그 과자들을 먹은 적은 거의 없었다. 빵빵한 가방을 도로 메고 집으로 돌아와 한 봉지씩 야금야금 꺼내 먹었던 기억이 난다. 소풍 전날 산 과자는 가방에 담아 메고 다니기만 해도 내 식욕을 충족시켰다. 봉지를 뜯을 순간을 상상하면 과자 한 봉지를 다 먹은 기분이 되었다. 가방 속에 넣어둔 팥빵 두 개는 내게 소풍 가방 속 과자봉지나 마찬가지였다.

저물녘이 되어서야 숙소로 돌아왔다. 1층 공동샤워실에서 부랴부랴 씻은 뒤 머리도 말리지 않은 채 우리는 각자의 침대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둘러앉아 팥빵을 먹었다. 스마일이 뭉개져 버리는 걸 아쉬워하면서도 나는 과감히 한입 베어 물었다. 바닷물을 머금어 수분기 가득한 갯벌에 발을 내딛는 것처럼 폭신하고 부드러운 식감이 앞니를 감싸더니 곧이어 단맛이 파도처럼 미각을 덮쳐왔다. 부드러운 팥소가 녹아들며 입안 곳곳에 과일 향을 퍼트렸다. 아, 이래서 포포가 예의를 무릅쓰고 버스에서 몰래 빵을 먹었구나. 빵의 두 눈과 시원스러운 미소를 오물오물 무너뜨리면서 나는 포포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 내 소풍 가방에 든 게 과자가 아니라 이 스마일빵이었다면, 아마 나 역시도 포포처럼 집에 도착하기 전에 꺼내 먹었을지도 모른다. 빵을 다 먹고 나자 하루 종일 걷느라 쌓였던 피로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며 어느새 친구의 얼굴에 스마일빵의 미소가 흔적처럼 떠올라 있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며 나는 내 기억 속 소풍 가방에 스마일빵을 담았다. 입이 찢어질세라 하얗게 웃고 있는 팥빵을 다시 맛볼 날을 상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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