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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nbin Park Jul 21. 2021

Playwithbrick

레고 블록으로 시작된 우리들만의 대화

1. 한통의 전화


2019년 10월, 군대에서 알게되어 지금까지 쭉 연락하고 지내는 대혁이 형에게 오랜만에 전화가 왔다. 필리핀 마닐라에서 어렸을 때부터 살아온 형은 오랜 기간 동안 경영 컨설팅, 브랜딩 강의를 해왔다. 그러다 2년 전부터 형의 소셜 계정 피드에 레고(LEGO)사진들로 도배가 되기 시작했다. 사실 레고 블록에 초점이 맞춰진 사진이라기 보다 레고 블록을 하는 사람들에 초점이 맞춰져있었다. 며칠전 덴마크에 가서 강연을 하고 있는 사진을 게시했길래 안부도 물을겸 그 사진에 대해 질문했다. 형은 레고 본사에 지어진 레고하우스(LEGO HOUSE)에서 강연을 했다고 대답했다. 



형은 대체 무슨 일을 하는걸까.


몇마디 대화가 오고가다 형이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내가 지금 몸담고 있는 조직에서 '커뮤니티 매니저'라는 직책으로 일을 하고 있고, 집에 사람들을 초대해 재밌게 사는 것? 같다며 본인이 지금 하고 있는 '퍼실리테이터' 교육을 받아보면 어떻겠냐는 질문이었다. 사실 많이 들어보기는 했었는데 '퍼실리테이터'라는 게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 것인지 잘 몰랐었고 레고(LEGO)를 가지고 어떻게 퍼실리테이션을 할 수 있는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예전부터 형에게 좋은 자극과 영감을 받았던 나이기에 한치의 망설임 없이 "기회가 있다면 꼭 배워보고 싶어"라고 답했다. (생각보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하는 것에 있어 결정하는 게 오래 걸리는 타입인데 이 한통의 전화에 나는 꽤나 운명 같은 무언가가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몇 주 뒤 형에게 다시 연락이 왔고 레고시리어스플레이 (LEGO® SERIOUS PLAY®) 방법론을 만든 두 마스터 트레이너 중 한 명이 필리핀 마닐라에서 퍼실리테이터 양성 교육을 하니 시간이 되면 꼭 참석하라고 했다. 그런데 문득 그렇게 전달 받으니 두 가지가 고민이 생겼다. 하나는 바로 비용이었다. 한화로 약 400만 원의 비용이라 섣불리 도전하기 어려웠고, 두 번째는 바로 활용성이었다. 이 교육을 받은 뒤 내가 과연 '퍼실리테이터'의 삶을 살 수 있는가, 아니 그 전에 내가 정말 원하던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직장에 다니면서 투잡으로 활동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래서 최종 결정을 내리기 전, 내가 처한 상황과 고민에 대해 객관적으로 검토해기로 했다.


1) 조직 내 처음으로 누군가를 관리해야 하는 매니저(Manager)가 되고 나서의 '팀 라이프'에 대한 고민

2) 회사 소속에서 벗어나 '나'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한 고민 


비용이야 모아둔 돈들을 털어서 내면 되는 것이고, 시간이야 남은 휴가들을 모아 일단 쓰면 되는 것이지만. 무엇보다 되고자 하는 목적(Why)에 있어 조금 더 고민해보다가 일단 안하면 후회할 것 같아 도전해보기로 최종 결론을 내렸다. 다행히 필리핀 마닐라는 대혁이형이 사는 곳이기에 형네 집에 자면서 4일간 퍼실리테이터 교육을 들을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었다. (사실 형이 아니었다면 절대 알 수도 없었을 것이고, 시도조차 감히 못했을 것이다.)



2. 마닐라에서의 4박 5일


대학생 때 코피노(한국인, 필리핀 혼혈아동)의 인권 및 인식 재고를 위한 캠페인을 했었다. 그래서 마닐라는 누군가에게 공포의 도시, 무서운 도시, 관광의 도시라고 여겨질 수 있지만, 적어도 나에겐 친근하고 따뜻한 도시라는 느낌이 강했다. 


레고시리어스플레이 퍼실리테이터 양성 과정에 참여한 참가자들은 다양했다. 마닐라에 거주하는 분들이 절반 이상이였고, 일부 참가자들은 근처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방문했다. 내가 유일한 한국인이었으며 영어를 가장 못했다. 퍼실리테이터 양성 교육을 하는 레고 시리어스 플레이 방법론의 창시자이자 마스터 트레이너인 Per Kristiansen 는 덴마크 사람인데 영어를 굉장히 잘했다.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던 나의 질문과 답변을 늘 진심으로 경청해주고, 공감하며 답변해주었다.



레고시리어스플레이(LEGO SERIOUS PLAY)는 레고 블록을 활용해 기업 및 조직, 팀의 커뮤니케이션을 효과적으로 돕는 방법론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방법론이라는 것은 결국 정답은 아니고, 수단(Tool)이다. 고객의 니즈에 맞게 퍼실리테이터가 주제에 대해 어떤 과정을 통해 참가자들의 생각과 경험의 폭을 넓힐 수 있는지 생각하고 접근해야 된다. 이 양성자 과정에서는 3박 4일 동안 플레이를 구조화하는 작업, 그리고 프로세스별 목적과 방향성에 대해 다룬다. 인상 깊었던 부분은 교육을 두 개의 존(Zone)으로 나눠 'Explanation Zone/Experience Zone'으로 효과적인 메시지들을 전달한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이론에 대한 설명을 듣고, 이후에는 바로 이론을 적용할 수 있는 실습에 들어간다. 그래서 개별 이론이 어떻게 퍼실리테이터 워크숍에 반영되고 적용되는지, 어떤 실수를 하면 안 되고 어떻게 리딩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단계를 직접 몸으로 부딪히며 경험하게 된다. 


4일간 아침 일찍, 그리고 저녁까지 이어진 교육에서 조금이라도 집중을 하지 않으면 내용을 쉽게 놓치게 된다. 영어실력이 부족한 나는 매 순간이 긴장의 연속이었다. 3일째 되는 날에는 실제 조별로 고객의 니즈에 맞는 실제 워크숍 프로세스를 구상해보고 발표하는 시간을 갖는다. 저녁 10시까지 조별로 작성한 뒤 마지막 날 오전에 발표를 하는데 우리 조는 정말 탈탈 털렸다. '역시 배운 것을 바로 적용한다는 게 쉬운 게 아니구나..'를 뼈저리게 느꼈다.


우연한 계기로, 어쩌면 특별한 계기로 참가하게 된 레고시리어스플레이 방법론 퍼실리테이터 교육. 인종, 하는 일, 성격, 사는 곳 모두 다 다른 참가자들의 모임이었지만 4일간 꽤나 정이 들었던 것 같다. 각자의 자리에서 이 방법론을 토대로 기업 및 조직, 작게는 가족 혹은 친구에게 좋은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라며 작별의 인사를 건넸다.




3. 일단 시작된 게임


부푼 기대를 안고 한국에 들어와 다시 일상을 접하니 교육받았을 때의 그 감정과 다짐들이 점점 무뎌져 가기 시작했다. 당장 무언가를 해볼 수 있는 기회가 없다고 생각하여 그냥 이런 아쉬움과 약간의 허탈함의 감정들을 그저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한 두달 흘러 보내다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시작도 안해볼거였으면 왜 굳이 그 비싼 돈을 내고 시간을 투자해서 먼 마닐라까지 다녀온거야?'


그렇다. 시작도 안해볼거였으면 차라리 하지를 말걸. 회사를 다니고 있으니 시간을 내기 어렵다는 핑계, 기업과 조직 대상으로 하는 퍼실리테이션, 워크숍 경험이 없어 어렵다는 핑계, 무엇보다 나만의 능력과 경험치가 부족하여 누군가 나를 찾지 않을 것 같다는 핑계. 할 수 없는 조건들은 쌓여 갔고 결국 핑계의 핑계만 늘어 놓고 있었다. 그런데 그 핑계 속 '시작'에 초점이 맞춰지기 시작하면서 그냥 일단 잘하던, 못하던 시작이라도 해보자 다짐하게 되었다. 어쩌면 집이라는 내 마음이 편하고, 잘하지 못해도 되는 공간에서면 어떤 일이든 다 가능할 것 같았다.


그렇게 일단 시작된 게임에 나는 분명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4. Playwithbrick


시작하기 앞서 나는 나만의 홈 퍼실리테이션 워크숍 프로젝트에 이름을 부여하고 싶어졌다. 그냥 뻔한 이름 말고, 부르기 편하면서도 의미가 잘 전달되는 이름을 고민하다 'Play with brick'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brick은 1) 벽돌 2) 든든한 친구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레고 브릭과 함께하는 플레이, 든든한 친구와 함께하는 플레이. 라고 풀어낼 수 있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물론 이 두가지 의미를 다 알고 있는 분은 극히 드물다.) 


구체적인 프로그램 기획 없이 일단 끌리는대로 레고를 책상에 늘여 놓고 사진을 촬영하여 인스타그램 개인 계정에 게시했다. 




우려했던 것과는 다르게 참가자 모집을 하루만에 할 수 있었다. 정원이 4명이라 빨리 모인 거겠지 싶으면서도 신기하게 신청한 분은 지인 세 분과 아직 한 번도 뵌 적 없던 한 분이셨다. 과연 첫 워크숍에서 어떤 그림이 나올지 걱정보다는 기대가 컸다.





토요일 이른 아침부터 모여 약 3시간 동안 진행된 첫 워크숍의 주제는 ‘2020년의 나’였다. 퍼실리테이터가 된 후 처음으로 진행한 워크숍이라 여러가지 부족한 부분이 많았는데 네 분의 마음 넓은 참가자분들 덕에 정말 많이 배웠던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뿌듯했던 것은 이 짧은 시간에 서로에 대해 여러 방면에서 나름 깊게 알게된 것. Play with brick 계정 이름을 만든 계기 중 하나가 위에서 언급한 것 처럼 ‘brick’이 가진 의미가 좋았기 때문이다. 1) 벽돌 2) 필요할 때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친구 였다. 이 작은 레고 브릭으로 정말 친구가 될 수 있다니, 그런 브릭들을 이어주는 역할을 해나가는 나의 2020년도 풍성해지길 바라며.��‍♂️LEGO!




<1차: 사소한 인터뷰 프로젝트로 인연이 된 @hyukhihi 님의 후기. 2020.1/11>

내가 바라본 '퍼실리레이터'는 소통을 기획하는 사람. #찬빈네집

흥미로운 경험을 했다. 이번 경험을 통해 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 '매개'가 얼마나 중요한 지 알았다. 퍼실리레이터가 활용한 매개는 '레고'이며, 레고를 통해서 소통을 이끌어 내고 있었다.

레고는 수단일 뿐이다. 퍼실리레이터의 목적은 제한 된 시간에 레고 조립을 통해 나타나는 무의식속의 나를 확인하고 내 이야기를 공유하는 과정에 있다. 퍼실리레이터는 이 모든 과정을 이끌어나가지만 철절히 조력자일 뿐이다.

영역을 개인이 아닌 집단, 조직으로 확장한다면 굉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추고 있었다. 소통을 이끌어내는 것뿐만 아니라 갈등을 조절할 수 있는 가능성 때문이다.


모르는 개인이 원탁에 둘러앉아 이야기하는 순간들. 개인의 이야기가 모여서 우리의 이야기가 되는 경험은 언제나 새롭다. 이처럼 조금은 진지해질 수 있는 자리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첫 워크숍에서의 시행착오들을 개선하고자 그 다음주 바로 같은 주제로 워크숍을 진행했다. 진행 방식은 비슷하게 하였으나, 중간 중간에 나만 아는 부족했던 점들을 개선해 나가려고 노력했다. 더 귀기울이고, 더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도록 집중했다. 



<2차: 와디즈에서 프로젝트 디렉터로 일하고 계신 @macupoftea 님의 후기. 2020.1/18>

간단한 질문 한 줄, 5분 내외의 시간이 남긴 수많은 이야기들. 핸드폰도 두고 레고를 만지작거리면서 집중하니 평소에 흘러가던 생각을 손에 쥘 수 있었다 @playwithbrick 좋은 공간과 시간과 사람에 감사했습니다.





<3차: 에그브렉(@egg_break) 뉴스레터를 만들고 운영중이신 @kkang1226 님의 후기. 2020.2/3>

‘손이 기억하는 즐거움’을 듬뿍 느끼며 초집중했던 세시간. 아늑했던 공간도, 함께 참여한 사람들의 위트 있는 이야기와 창의적인 블록 조립도, 담백하고 편안한 퍼실리테이터의 진행도(내려주신 커피도...) 모두 좋았다. 세상에는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수단들이 생각보다 많고, 나 역시 그것을 더 적극적으로 찾아야겠다고 생각한 시간. 또 연다고 하시면 주변사람들에게 마구 추천할 생각! (내게 추천해준 @jjinkimm 고맙습니다)




5. 다음 게임


3주간 진행해보니 같은 주제로 다양한 참가자들의 '2020년의 나'를 만날 수 있었다. 정답이 정해져 있지 않는 워크숍이라 더욱 재미를 붙이고 진행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아쉽게도 2월 이후 코로나 바이러스가 한국에 크게 영향을 가했다. playwithbrick 글을 써내려가고 있는 2020년 6월까지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워크숍은 지금까지 여전히 장점 중단 된 상태이다. 되돌아보니 3주간 참가자 비율이 재미있는 포인트였다. 첫 주에는 지인3, 둘째 주에는 지인2, 셋째 주에는 지인1로 점점 지인의 비중은 줄고 나와 한 번도 뵌 적 없는 분들의 비중이 늘었다는 게 신기했다. 네 번째로 진행했다면 정말 모르는 분들로만 이루어지는 구성으로 진행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여전히 처음 시작을 두려워하던 때가 가끔 생각난다. '일단 시작이라도 해보자'라는 다짐을 먹고 시작해본 덕분에 작은 성취들을 맛보고 경험할 수 있었다. 


다음 게임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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