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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nbin Park Jul 21. 2021

보통의 하루, 찬빈네집 시즌2

이야기를 마치며

2020년 6월, 실시간 인기글로 며칠째 아래와 같은 헤드라인이 계속 내 눈에 밟혔다. 

<7조 걸린 역대 최대 한남 3구역 재개발···현대건설이 따냈다>, <'함박웃음' 현대건설, 재개발 최대어 '한남 3구역' 잡았다>


우리 집은 정확히 한남 2구역에 속해 있다. 하지만 우리 집에서 창을 열면 볼 수 있는 정겨운 풍경은 모두 한남 3구역이다. 당장 재개발이 진행될 것은 물론 아니지만, 훗날 내가 바라보고 있는 주변 동네 풍경들은 모두 사라질 생각을 하니 가슴 한편이 저려온다. 변하지 않는 게 정답은 아니지만 변하는 것도 꼭 정답은 아닐 텐데 옛 서울의 한 장면이 또다시 지워져야 하는 운명 앞에 놓여 있다. 10년 뒤 이곳은 어떻게 변해있을까. 나는 그때 어떤 모습으로 이곳을 바라볼 것인가. 우리 집에 찾아준 손님들은 이곳을 지나칠 때 소중한 기억들을 여전히 기억해줄까.


보통의 하루



언제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는 사이, 커튼 사이로 쨍하게 내린 햇볕 때문에 눈이 떠졌다. 일어나자마자 밤사이 건조했던 탓인지 옆에 두었던 물을 들이켰다. 여름이라 그런지 시원했던 물이 어느새 미지근해졌고, 다시 그 물통을 냉장고로 넣기 위해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지금이 몇 시 인지도 모른 채 졸린 눈을 비비고 창밖을 바라봤다. 아마 7시쯤 되었겠지 싶었는데 10시가 훌쩍 지나 무척 놀랐다. 뭔가 바삐 움직일 시간에 덩그러니 집에 있다는 게 행복했지만, 한편으로는 이 시간에 일어나서 하릴없이 창밖을 쳐다보는 나 자신이 약간 한심해 보였다. 잠깐 동안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 오늘 할 일이 무엇인지 떠올렸다. 


'일단 밀린 빨래들부터 먼저 하고, 옷장 한구석에 처박아두었던 겨울옷들을 정리해야지. 그리고 꽤나 오랫동안 텅 비어있던 냉장고를 채워야겠네.' 


간단히 세수를 마치고 어젯밤 벗어둔 운동복을 입었다. 오전 11시, 마치 주말의 아침을 보내는 것처럼 여유롭지만 엄연히 오늘은 '직장이 없는 하루'의 월요일이다. 빨래통에 옷들과 세제를 넣고 딱 1시간 코스로 빨래를 돌렸다. 기다리는 시간에 차곡차곡 겨울옷을 옷장 안에 살포시 넣고, 30분 정도 되었을 때 자주 가는 마트로 향했다. 꽤나 더운 날씨였지만 발걸음은 가벼웠다. 주말에는 보지 못했던 다양한 점포들이 문을 열고 나를 맞이했다. 기웃기웃하다가 목적지인 마트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고, 일단 오늘 점심 메뉴로 생각했던 된장찌개 재료들을 골랐다. 마트의 입구에는 늘 과일과 채소가 준비되어 있다. 사실 가게 밖 채소와 안에 진열된 채소가 같은 경우도 많아 서로 비교해가며 골라야 했다. 혼자 살지만 그래도 늘 수박을 보면 예전에 엄마 아빠 누나와 둘러앉아 먹던 게 그리워 꼭 사게 된다. (사실 수박을 미친 듯이 좋아해서 사는 게 더 큰 이유이다.) 욕심을 많이 부렸던 걸까. 늘 계산대 앞에 서면 수만 가지 후회를 하게 된다. 그래도 내 몸을 위한 건강한 선택이고, 어디 나가서 사 먹으면 이거로는 절대 못 사지 하며 나를 위로한다. 동네 마트치곤 배달 서비스가 있다는 게 큰 장점이라 무거운 수박과 장 본 재료들을 간편히 현관문 앞까지 들고 갈 필요가 없어 좋다. 장을 마치고 일부러 내려왔던 빠른 길보다는 조금은 돌아가는 길이지만 완만한 길을 택했다. 트럭에 주렁주렁 매달려있는 온갖 크기의 냄비를 담은 냄비 트럭부터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젓갈을 파는 젓갈 카트까지. 동네의 다양한 볼거리, 먹을거리를 천천히 구경하며 집으로 걸어갔다. 



집에 도착하니 어느새 세탁기는 멈춰있었고, 마당에 나가 탈탈 털어 햇볕에 빨래를 널었다. 늘 빨래는 귀찮은데 이렇게 건조대에 빨래를 널을 때 기분은 늘 좋다. 마치 작은 부분이긴 하지만 나 혼자 무언가를 해낸 기분이 들어서일까. 때마침 배달 기사님이 도착하였고, 냉장고 안에 장 봐온 재료들을 하나씩 넣었다. 수박은 워낙 커서 작은 냉장고에 다 들어가진 않았다. 절반을 잘라 락앤락 통에 잘개 쪼개 담았고, 나머지 절반은 크린랩으로 가볍게 싸서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락앤락 통에 담았던 수박은 수박을 자르는 사이 절반이 없어졌다. 역시 수박은 자르면서 먹는 게 최고로 맛있다. 수박의 씨를 발라가며 먹는 사람과 수박을 씨채 그냥 먹는 사람 두 부류로 나뉜다. 나는 신기하게 전자였다가 후자가 되었다. 사실 전자였던 시절이 길진 않지만, 씨를 발라 먹다가 같이 먹던 누나의 스피드에 뒤쳐지게 되어 후회하고 씨 채 먹던 기억이 여전히 선명하다. 수박은 그만큼 내 승부욕을 불러일으키고, 행복감 그리고 포만감까지 주는 소중한 존재다.


수박으로 배를 채웠더니 점심 식사가 조금 늦어졌다. 된장찌개를 해야 되는데 백종원 선생님이 추천해주신 재료 중 상당수가 부족했다. 그래도 선생님께서는 '된장'만 있으면 된다고 하여 안도를 했지만, 그래도 있으면 맛을 더 살려주는 좋을 재료들이 수두룩해서 시작하기도 전에 기가 좀 죽었다. 엉성한 칼솜씨로 재료들을 다듬고 차근차근 알려주신 순서대로 냄비를 채워나갔다. 생각보다 간이 잘 맞았고, 모락모락 피는 밥솥을 열어 적당량의 밥을 담아냈다. 점심은 혼자 가볍게 먹으려 했는데 찌개 양 조절 실패로 2-3인분이 되었다. 아마 저녁도 된장찌개를 먹어야 할 것 같다.



보통 직장에서는 끼니를 때우는 경우가 많다. 이 시간만큼은 배가 고프지 않아도 반드시 무언가를 먹어야 오후 일과를 잘해나갈 수 있다는 생각에. 그리고 팀원과 함께 점심을 먹자고 하기도 조심스러워 각자의 시간에 각자의 몫을 해결했다. 그래서 혼자 점심을 해결하는 게 꽤나 익숙해졌다. 집에서도 혼자, 직장에서도 혼자. 밥은 혼자 먹는 게 편해지니 대화가 없는 식사 시간은 당연히 줄었고, 그만큼 식사의 양과 질도 떨어졌다. 집에서 순식간에 지어먹은 밥을 순식간에 해치웠다. 설거지도 일부러 최소화하기 위해 식기도 몇 개 사용하지 않았다. 점점 나도 모르게 직장에서든, 집에서든 효율을 중시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니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게 오후 2시가 되었다. 간단히 마실 커피를 내렸고, 이제 앉아서 좀 생산적인 일을 좀 해볼까 생각했다. 일단 책 사는 게 취미인 내가 쌓아둔 책들을 빤히 쳐다봤다. 어떤 책부터 읽어야 할지 고민을 하다가 그래도 가장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을 골랐다. 처음부터 욕심이 과했는지 도입부에서부터 정독을 하는 바람에 읽은 시간에 비해 진도가 굉장히 더뎠다. 한두 시간 붙잡고 있다가 책을 바꿔 읽어보기로 했다. 두 번째 고른 책은 공간에 대한 책이었는데 이 책을 집필한 작가님의 이전 책이 좋아서 구매했다. 그래서 큰 기대를 안고 글을 읽었으나 생각했던 내용과는 다르게 '역사'를 많이 다루어 이 책 또한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책이 문제였을까, 아니면 책을 읽는 내가 문제였을까. 답은 뻔히 정해져 있지만 나는 책을, 저자를 탓하고 싶었다.


잠깐 누워서 책을 읽어야지 싶어 소파에 쿠션을 2개 포개어 기댔다. 300페이지가량 되던 책이라 한 손으로 들기는 버거워 천장을 향해 책을 든 두 손을 뻗었다. 몇 초 버티지 못하고 옆으로 드러누워 책은 소파 한 면에 붙여 페이지 넘기는 손만 힘을 주고 책을 응시했다. 나는 분명 책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는데 어느새 책은 땅 밖으로 떨어져 있었고 벌어진 입 사이로 흘러나온 침이 쿠션을 적시고 있었다. 나는 여기서 또 책을 탓했다. '책이 좀 가벼웠더라면'


시간은 왜 이렇게 훌쩍 가는 걸까 싶을 정도로 벌써 저녁 식사를 해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 보통 이 시간에는 퇴근을 하고 집에 터벅터벅 들어와 쓰러지듯 소파에 누워 잠시 쉬다가 저녁을 하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부지런히 빨래도 하고, 장도 보고, 점심도 직접 해 먹고, 책도 읽고 했다. 두 하루를 비교했을 때 무엇이 더 나은 하루였는지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결코 집에서 보낸 하루가 나쁘지는 않다고 느껴졌다. 저녁식사는 간단히 짜파게티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주말에도 한 끼는 조금 정성을 다해, 한 끼는 조금 가볍게 해 먹는 편이라 오늘도 저녁은 최대한 간단히 하고자 했다. 식사를 할 때의 적막이 싫어 랩탑으로 유튜브를 켰다. 지난밤, 저 먼바다 건너의 유럽에서 진행한  EPL 하이라이트 경기가 날 기다렸다. 한 경기 한 경기 골장면 위주로 보다가 어느새 7경기를 다 봐버렸다. 짜파게티는 이미 없었고, 맥주캔 두 캔을 까버렸다. 배가 너무 불러 이대로 집에만 있다가는 분명히 소화가 안돼서 쉽게 잠을 못 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충 설거지를 마치고 주섬주섬 운동복을 입고 운동화를 신고 집 밖을 나섰다.



어느새 깜깜해진 밤, 저 멀리 환히 뜬 달을 바라봤다. 그리고 퇴근길의 사람들을 바라봤다. 마주한 사람들의 표정이 모두 좋지 않았다. 누군가는 일을 그대로 여기까지 들고 온 것 마냥 힘들어 보였고, 누군가는 굉장히 기분이 안 좋은 일이 있어 보일 정도로 시무룩했다. 나는 그 어떤 표정을 짓지 못하고 목적지 없이 동네 주변을 걸었다. 


직장이 없는 하루. 불안함과 서러움이 몰려들 줄만 알았는데 의외로 담담했고, 내가 나다운 모습이 무엇인지 오랜만에 생각해보고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지 쉽게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당분간은 조금만이라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나만의 보통의 하루를 살아보고 싶다.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면서.


찬빈네집 시즌2


침실


2020년 6월, 집의 구조를 살짝 바꿔 봤다. 작은방을 침실로, 큰방을 거실로. 페인팅도 직접 해서 더 애정이 가는 작은방에는 새 조명도 달았고, 플라스틱 파렛트에 매트리스도 얹었다. 무엇보다 내가 찍었던 사진, 직접 만든 스툴과 매거진 스탠드 덕분에 더 애정이 생겼다. 



거실



여름만 되면 어릴 적 거실 돗자리 위에 엄마 무릎베개 하고 누워 도란도란 얘기도 하고, 수박도 먹고, 치킨도 뜯던 기억이 종종 떠오를 때가 있다. 집이란 건 어쩌면 혼자 살던, 여럿이 살던 누군가와 함께 누린 시간들이 채워질 때 더 기억이 오래 남는 것 같다. ‘돗자리 깔았네’라는 표현이 왜 생겼는지 상상해보니 충분히 그럴 법하겠구나 싶은 게 일단 누군가 와서 편히/많이/다양하게 앉아 이야기를 꺼내 놓을 수 있다. 서론이 길었고, 혼자 사는 집에 의자 10개가 있는 우리 집에 의자는 조금 치워두고 드러누울 수 있는 돗자리를 깔았다. 밤하늘의 별을 볼 수 있는 마당에서 놀기 좋은 날, 이런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쳤다. ‘어쩌면 고향의 가족이 그리워 내 집을 우리 집이라 부르고, 오래되고 누추한 집에 손님들을 초대했던 건 아닐까.’


#찬빈네집 시즌2가 시작되었다. 시즌2는 다음 책에서 더 자세히. 독자 여러분, 언제나 저희 집은 열려있습니다. 서울 시골집에서 커피 한 잔 마실 수 있는 여유가 허락되길 기대해보며 제가 기다리겠습니다. 찬빈네 집에서.


2020년 여름,

찬빈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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