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가은 May 30. 2024

처음 쓴 그날의 편지

이사 온 집에 둔 새 책상 위에 달력을 하나 뒀어. 네게 편지를 쓴 날엔 하트 하나, 청소를 하면 하나 더, 집에서 간단한 요가까지 했다면 하트 세 개를 표시하기로 하고. 어린 시절 선생님이 내게 참 잘했어요, 스티커를 붙여주듯 내 사소한 일상에도 애정 어린 자국을 남기려고. 이 방법이 효과가 있는 건지 늦은 시간에도 이렇게 편지를 적고 있어 뿌듯한 마음이야.


이렇게 자주 편지를 쓰기로 마음먹은 건 네게 처음 편지를 쓴 그날의 기억이 참 소중하기 때문일 거야. 그때는 2022년을 정리하던 연말이었어. 나 자신에게 관심이 생기기 시작할 무렵이었지. 그동안 내가 창조한 인물이나 이야기에 집중해 왔다면, 이제는 그 세상을 만들어낸 나 자신이 궁금했었어. 어렸을 때의 나와 그때의 경험으로 인해 생긴 애착 방식, 사랑할 때 생기는 좋은 습관과 나쁜 버릇, 하고 싶은 것이 생기면 꼭 맨 끝에 그만두는 2% 부족한 끈기 같은 것의 원천에 대해서 처음으로 깊이 고민했었어.


그래서 연남동에 <나에게 쓰는 편지>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는 모임에 참석하기로 했어. 살아오면서 그토록 많은 사람에게 편지를 썼으면서도, 정작 너에게는 한 줄조차 써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이었지. 모임장님은 각자 자신에게 편지를 쓰고 한 명씩 차례대로 낭독하는 방식이라고, 시간에 상관하지 말고 편하게 쓰라고 말씀하셨어. 어색한 마음으로 조금씩 생각을 가다듬고 내 앞에 놓인 잘 깎인 연필 한 자루와 편지지를 들여다보았지. 얼마나 지났을까, 시작하기는 어려웠는데 막상 쓰고 나니 네게 할 말이 참 많았어. 세 장의 편지지를 가득 채웠고 편지 중 일부분을 다시 읽어 줄게.


세상에서 가장 애틋한 당신,

나는 당신을 마음 깊이 아끼고 사랑하면서도 죽도록 미워했어요.

남들보다 여린 당신만의 감수성을 좋아하면서도, 배로 힘들고 아파하는 유난스러움은 견디기 어려울 만큼 싫어했고 가끔 보이는 속 좁고 이기적인 모습은 다들 갖고 살아가는 유의 것일 텐데, 나에게만 유독 엄격해서 실망하곤 했지요.


그런데 나의 당신, 당신께 처음 편지를 적으며 지난날을 뒤돌아보니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요.

당신, 얼마나 수고로웠나요? 밀린 인생의 숙제를 하나둘 헤쳐 나가느라, 몰아치는 감정의 파도에서 허우적대다가 기어코 살아남느라, 꽤 자주 닥쳤던 실패의 늪에서 빠져나오느라, 끝내 사랑이 끝났다는 것을 긴 시간을 들여 인정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나요?


더 많이 들여다보고 편지를 써주며 말 걸어왔어야 마땅했을 당신,

조그마한 단점들보다 찬란히 반짝이는 점들이 훨씬 많을 당신,

나는 당신으로 태어나 당신의 미완성의 삶을 살아갈 수 있어 행복합니다. 이번 생에 완성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지만, 마치 다 둥글지 못한 달도 그 자체로 아름답듯이 그대로를 아끼며 살아가고 싶어요.


이 편지를 타인 앞에서 낭독하는 순간에는 나 자신에게 안겨 위로받는 것만 같았어. 네게 내 진심을 솔직히 고백하면서 평생 함께하던 나 자신을 더 많이 배울 수 있었지. 앞으로 너와 꾸려갈 이 삶이 기대가 되더라고. 그런 감정은 정말이지 처음이었어. 나는 그 이후로 너와 끊임없이 대화하고 더 솔직하게, 더 있는 그대로, 내 마음을 아까워하지 않고, 그 자체로 아름답게 여기면서 살아가려고 해. 훗날 이 편지들을 보고 네가 기뻐했으면 좋겠다는 마음 하나로 매주 두 편의 편지를 쓰려고 해.


살아가다 보면 그날처럼 생각하는 방식이 바뀌는 기적 같은 날이 있더라. 그날들을 소소히 기다리며 하루를 보내볼게. 너도 오늘 하루가 힘에 부치더라도 그런 날들이 있었다는 걸 기억하고 한번 더 미소 지어주길.


2024년 5월, 자정이 넘은 시간에 너를 그리는 네 친구가

이전 07화 네가 함께 하고 싶은 사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