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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elina Nov 16. 2019

진짜 '갑'은 누구일까?

MD의 본질은 유통사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제는 분야를 막론하고 쓰게 된 단어인 갑질. 유통사에서는 말 그대로 '갑질'을 하다가 징계를 받거나, 사법처리를 받는 일도 아주 가끔이지만 있었다. 그럼 정말 MD가 갑일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올해의 직원상 탔어요. 이게 다 주임님 덕이에요"


또 하나의 시즌을 불태우고 여전히 야근을 하던 밤, 내 매출의 점유율 1위를 자랑하는 파트너사 대리님이 보내 준 메시지였다. 서로 비슷한 또래인데다 둘 다 욕심이 많은 성격이라 죽이 잘 맞았다.


파트너와 호흡이 잘 맞으면 MD는 더 이상 바랄게 없다. 그 정도로 MD는 파트너사와의 관계가 정말 중요한 직업이고, 그만큼 내게는 큰 힘이 됐었다. 사실 찰떡궁합으로 치열하게 해도 정작 결과가 잘 안 나오면 서로 지치기 마련인데, 매출도 빵빵 터졌다. 서로 야근한다고 투덜대도 마음 한 구석에는 신나서 일했던 기억이 있다.


매출은 MD의 인격이다. 유통업계의 교과서같은 명언이다. 그만큼 매출이 오르면 MD는 기분이 좋다.


내 덕에 파트너가 상을 받았다니.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나의 YOY(전년대비성장률)¹가 최소 50% 수준을 유지하고 있을 때였다. 매출 상승의 주요 근원지가 그 파트너이니 영업사원은 당연히 상을 받을 법도 했다.


¹YOY: Year Over Year 로 전년대비성장률(주로 매출)을 주로 지칭한다. 전월대비성장률은 MOM(Month Over Month)를 쓴다. 전통 오프라인 유통강호는 주로 YOY를, 흐름이 빠른 온라인 유통사는 MOM를 많이 쓰는 편이다.


내가 다 기분이 좋았다. 좋았다.. 좋았다가.. 문득 기분이 묘해졌다. 순간 머릿 속에 여러가지 생각이 뒤엉켰는데, 첫째는 허무함이었다.




"왜 나는 상 안 줘?"  


당시 팀에서 가장 직급도 낮고 경험도 부족했지만, 열심히 하다보니 어느샌가 팀 매출을 리드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직장은 나 혼자만 잘 한다고 돈을 더 받는 구조의 기업이 아니었다. 회사 전체 혹은 본부별 매출 성과가 좋아야 PS, PI² 명목으로 연 1~3회 받을 수 있었다.


²PI(Productivity Incentive)는 생산성격려금으로 주로 1년에 두 번 기본급의 최대 150%까지 지급되며, PS(Profit Sharing)는 초과이익분배금으로 1년에 한번 연봉의 최대 50%까지 지급된다. 둘 다 반드시 지급되는 법은 없다. 말 그대로 회사 매출이 뛰고 잘 돌아가야 지급한다. 성과에 따라 계열사별 혹은 본부별 지급 금액이 달라질 수도 있다.


사실 성과급을 못 받아서 부러운 게 아니었다. 굳이 따지면 '인정'이 아니었을까. 6시만 되면 칼퇴하는 고요한 사무실에서 언제나 홀로 남아서 야근을 했었다. 일을 많이 해서 힘든 게 아니고, 혼자라서 힘들었다. 지배적인 매너리즘의 기운에 물들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게 더 힘들었다.


MD는 체력전이다. 오래 가는 MD가 되려면 스스로를 너무 가혹하게 내몰면 안 된다.


돌이켜보면, 오기로 일을 했던 때가 많았던 것 같다. 혼자만의 생각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스스로를 더 힘들게 채찍질했다. 그러다 어느새 뾰족한 고슴도치가 되었던 것 같기도 하다. 지금 그때로 돌아간다면, 조금 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현명하게 일했을 텐데.




MD의 본질은 유통사의 전유물이 아니다


길게 돌아왔지만, 이번 글에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결국 MD의 업에 대한 고찰이다. MD, 즉 Merchandising(머천다이징)의 핵심은 상품을 잘 이해하고, 잘 알려서, 잘 파는 것이다. 그러니 MD와 협업을 하는 영업담당자(혹은 상품개발자) 역시 머천다이징을 하게 될 수 밖에 없다.  


파트너가 상을 탔다는 소식에 처음에는 허무하기도 하고 억울도 했다가, 곧 차분해지면서 기분이 생경했다. MD의 개념에 대해 사뭇 낯설어졌기 때문이다. 'MD는 나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MD는 항상 스스로를 객관화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늘 하던대로 하고 생각에 갇히면, 매너리즘에 빠지고 현상유지만 하는 MD가 된다.


문득, 당시 내가 일하던 방식을 돌아보았다. 시즌 행사와 그에 적합한 상품 기획, 적정 가격 책정 등 MD인 나의 주도 하에 진행된 전략이 잘 들어맞았다. 그 덕에 높은 매출 성과를 달성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한편, 파트너도 못지 않게 주도적으로 상품을 기획해 제안할 때가 많았다. MD인 내가 행사 테마를 제시하면, 그에 맞는 상품 구성을 예쁘게 만들어왔다.  


유통사는 매일이 행사다. 사실 뻔하게 돌아가는 행사 흐름에서 똑같은 테마를 줘도 상품을 센스있게 제안하는 파트너가 있는가 하면, 매번 똑같은 루틴을 반복하는 파트너사도 있다. 이는 영업을 잘 하고 말고의 영역이 아니다. Merchandising의 영역인 것이다.




게임을 진짜 주도하고 있는 건 어느 쪽일까?


MD를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MD 뜻대로 잘 따라주는 파트너가 결코 좋은 게 아니다. 초반엔 편할 지 몰라도 나중엔 깨닫게 된다. 상품을 자식처럼 여기고, MD에 쉽게 양보하지 않아 미팅 때마다 애를 먹이는 바로 그 파트너가 MD 자신을 성장시킨다는 것을.


그런 파트너는 최소 베테랑 상품개발자나 잔뼈가 굵은 영업담당자일 것이기 때문에, MD보다 상품에 대해 5배는 더 잘 안다. 이기려면 공부해야 한다.


결정은 MD가 하지만, 그 결정을 하도록 파트너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겉으로는 MD가 주도하고 있는 것 같아도, 정신차려 보면 게임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쪽은 파트너사일 때가 많다. MD의 본질은 상품에 있고, 제조는 상품의 뿌리다.


그런데 온라인 유통이 크게 성장하면서, 안타깝게도 상품에 대해 모르는 MD가 많아졌다. 앞서 말한 것처럼, 온라인은 직매입보다 위탁 판매 위주로 거래가 이루어지다보니, MD들이 상품에 대해 제대로 알 기회가 없다.


또 온라인 특성상, 담당 카테고리의 범위가 넓어져 수천~수만개 상품을 1명의 MD가 취급하게 되는 경우도 흔하다. 이런 환경에서 MD가 할 수 있는 것은, 높은 트래픽³을 무기로 한 매출의 (불확실한) 약속과 이를 위한 (확실한) 원가 협의 밖에 없다.


³트래픽(traffic)은 주로 고객방문수를 뜻한다. 트래픽이 높을 수록 영향력있는 유통사라 볼 수 있다. 온라인의 경우 우후죽순처럼 쇼핑몰이 생기는 바람에 온라인 MD 수도 크게 늘어났지만, 자랑할 만한 트래픽을 가진 쇼핑몰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소비자가 무뎌질 정도로 마트, 백화점, 편의점, 온라인 할 것 없이 모두가 Everyday Promotion! 을 외치고 있다.


특히 온라인은 가격에 민감하기 때문에, 상품에 대한 이해없이 온라인 최저가에만 집착하는 MD들이 많다. 단기적으로 매출은 성장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몇 년을 보내면 파트너사가 MD를 외면할 가능성이 있다. 뿐만 아니라, MD 스스로 본인의 직무에 대해 "남는 게 없다"는 허무함을 느끼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계약서 상 '갑'에 기재된 것은 회사명이지 MD 본인 이름이 아니다. 한 달에 몇 십억을 좌지우지하고, 수 십개의 파트너사를 컨트롤 할 수 있는 표면적인(superficial) 권한에 취하다간 본질을 놓친다. 진정한 갑이자 MD라면, 상품과 고객에만 집중해야 한다.




자기 툭 튀어나온 Q&A 

Q. 이기려면 공부하라, 좀 난해해요. 상품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배우나요

A. 파트너사에게 배워라. 물론 걸러들을 것은 걸러들어야 한다(뭘 걸러내야하는 지는 하다보면 알게 된다). MD 직속 선배나 동료를 통해 배우는 것도 정말 많지만, 내부에서 배우는 것은 업체 컨트롤, 상품 운영방식 등 주로 MD입장에서 필요한 노하우와 관련한 것이다.


상품 자체에 대해 보다 깊이 배우고 싶다면, 제조사에게 배워야 한다. 이를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1) 제조사 공장 방문 2) 질문하기, 이렇게 두 가지다.


MD는 움직여야 한다. 공장을 보면 원료수급 부터 기계공정, 인건비, 수율, 각종 포장 부자재까지 한번에 정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공장을 가든 안 가든 가장 좋은 것은 질문이다. "이거 물어보면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속으로 무시하지 않을까?",  "방금 한 말 못 알아들었는데, 그냥 아는 척 넘어갈까?" 이런 생각은 접고 배울 때는 배우는 자세로 들어야 한다.  


특히 신입 MD 때에는 기대치(?)가 없기 때문에 맘껏 물어보고 빨리 성장하는 게 훨씬 낫다. 그리고 물어본다고 절대 무시하지 않는다. 상품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이 깊은 분들이기 때문에, 한 마디를 물으면 기뻐하며 백 마디를 알려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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