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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이 Feb 16. 2024

수업거부사태

2주밖에 안되는데 어쩔 속셈이야?

보라카이에 도착한 날이 1월 1일이라 수업은 없었지만, 그날 레벨 테스트를 보고 초등 아이들 반이 배정되었다. 2학년 우리 집 첫째는 level 2로, 4학년, 2학년 조카 둘은 level 1에 배정되었다. 다음 날, 첫 수업을 듣고 온 후 아이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재밌다는 녀석도 있고, 아주 못해먹겠다는 녀석도 있었다. 우리는 어차피 "너희의 의견은 중요치 않아. 우리는 이미 여기에 왔고 2주 동안 좋든 싫든 그 수업에 참여해야 해. 못하겠어도 버텨야 해. 이미 돈은 다 냈어. 환불도 없어."라는 자세로 그들의 의견을 귓등으로 들었다. 


그런데 둘째 조카가 이틀 동안 아파서 수업을 이틀 빠지고 나서 다시 수업에 들어가더니, 도저히 못하겠다고 중간에 도망 나오는 사태가 발생했다. 언니와 나와 둘째 아들은 초등 아이들이 수업에 들어가면 신나게 보라카이 투어 모드였는데, 둘째 조카가 수업 거부를 선언하면서 투어 모드는 전면 중단 되었다. level 1인 녀석이!! 지금 수업을 거부하면 도대체 어디로 가겠다는 거냐. 예비 초3이 유치반에라도 들어가겠다는 거니. level 1 수업은 분명 쉬웠고, 녀석이 이해하기에 아주 어렵진 않은 수준이었다. 그런데 선생님이 영어로만 말하니 도저히 못 알아듣겠다며 뛰쳐나온 조카를 보며, 처음엔 화가 났다. 


그런데 보라카이에 까지 와서 아이들에게 영어 수업을 듣게 한 것이 애초부터 어른들의 욕심이기도 했고, 특히 영어를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은 둘째 조카가 그런 태도를 가지는 것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너는 거기서 얼마나 괴로웠을까. 마치 내가 러시아 어느 작은 마을에 가서 러시아어 기초 수업이니 한번 들어보라고 들어갔는데 이게 도대체 뭐라는 건지 전혀 알아먹지 못하겠어서 미치고 환장하겠고 도저히 여기서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아서 교실문을 박차고 뛰쳐나온 거랑 비슷한 상황 아닐까. 


둘째 조카는 매니저와 잘 얘기를 해서 2주 차에는 fun course로 이동을 했다(다행이 이름도 즐거워 보이는 fun course라는 것이 존재했다.) kinder course와 fun course가 따로 나눠져 있는 것도 신기하긴 했는데, 어쨌든 fun course는 정말로 fun 하기만 해서, 배드민턴을 치고 종이컵 쌓기를 하고 하는 등 전면적으로 액티비티 위주의 수업이었다. 수업 구성원은 유치원생과 초1학년 아이. 수업 돌아가는 것을 보니 우리 4살 둘째도 슬쩍 끼워 넣어도 될 것 같은 느낌의 수업이었다. 어쨌든 둘째 조카는 그 수업은 거부 없이 즐겁게 마지막까지 잘 마무리했고, 'most cheerful' 상도 받았다. 그러면 된 거 아닌가. 



반전은 우리 첫째였다. 혼자 level 2에 배정받은 첫째 아들은 아무 문제 없이 수업을 소화해 내는 듯했다. 오후에 있는 1:1 클래스에서 받은 숙제도 오후에 다 해내고, 수업이 너무 많다고는 얘기했지만 선생님들께 여쭤보면 너무 잘하고 있다는 얘기만 돌아왔다. 그런데 첫째네 반 구성원이 매일 바뀌었다. 어떤 날은 초1 아이와 중학생이었다가, 어떤 날은 중학생만, 2주 차엔 4학년 누나와 형아들이 합세했다. 연수를 목적으로 하는 어학원 특성상 뭐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는데, 계속 구성원이 바뀌니 수업이 안정적이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2주 차에 들어서서 첫째가 울면서 수업이 너무 힘들다는 게 아닌가! 수업이 너무 많고, 1:1 수업에 선생님이 자기에게 질문을 너무 많이 한다는 것이다. 아이의 책을 찬찬히 보니 문법적인 내용도 꽤 많이 있고(여기까지 와서 3인칭 단수 동사에는 -s 붙이기 트레이닝을 할 것은 뭔가), 문장 쓰기도 있고 조금 힘들어할 만한 내용들이 많이 있었다. 


우리는 수업이 끝나면 바로 물놀이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이고, 가끔은 야간에 해변 산책도 하고 아이들이 충분히 즐거울 줄 알았는데 그건 순전히 어른들의 생각이었구나. 사실 수업이 어떻게 진행될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아보고 오진 않았다. 환경만 보고, 영어수업은 원어민인데 적당히 알아서 하겠지라고 생각하며 안일하게 왔다. (그런데 원어민이라고 해도 필리피노들의 영어는... 영어 교사임에도 불구하고 문법에 틀린 영어를 하기도 부지기수였다.) 내가 영어교육 전공에 석사까지 한 교사인데 어찌 이렇게 안일하게 생각하고 왔을까. 예약할 당시 겨울 캠프들이 빠르게 마감된다 하니 어찌보면 패닉부킹을 한 것이다. 


어쨌든 보라카이 어학원에서 수료식을 할 때, 우리 첫째는 상을 2개나 받고 수업에 한 번도 빠지지 않아 개근도 했지만, 아이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그 점이 너무, 너무 아쉬웠다. 


오전에만 수업을 하고 오후에는 아이들이 자유롭게 놀 수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면 좋았을 것 같다. 앞으로 영어수업을 낀 장기 여행을 할 때는 수업은 더 적게, 아이들의 의사를 더 반영해서 계획해야겠다고 굳은 결심을 했다. 미안 얘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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