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나를 찾기 위해
보라카이 어학원에서 아이들의 수업은 무려 오전 8시에 시작되었다. 분명 9시 시작으로 알고 있었는데, 우리 아이들이 듣는 코스는 시간이 그렇다고 한다. 이 부분에 대해 어학원 측에 몇 번을 컴플레인했지만 개선되지 않았다. 조식이 7시 30분부터 시작인데, 아이들은 20분간 후다닥 식사를 하고 10분간 양치를 하고 가방을 챙겨 수업에 들어간다. 아이들이 짠했다. 소화도 못 시키고 타국에서 수업을 듣다니. 하지만 본의 아니게 아이들과 오전 이른 이별을 하는 것은 가끔(자주) 좋았다. 얘들아, 힘내서 수업 듣고 있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을 거야. 엄마는 잠깐 나갔다 올게! 후딱 갔다 올게!
아이들은 오전 8시부터 12시까지 수업을 듣고 2시간 동안 점심식사를 하고 휴식을 한 후 2시부터 4시 30분까지 오후 수업을 들었다. 오전 우리에게 주어지는 자유시간은 4시간. 아이들이 수업에 들어가면 우리는 보라카이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녔다. 초반에는 보라카이에서 제일 핫한 화이트비치와 디몰 근처만 갔다. 때론 검색하지 않고 그냥 막 돌아다니다가 좀 좋아 보이는 카페에 들어가기도 하고, 때론 가이드북에서 봤던 카페를 우연히 만나서 들어가기도 했다. 그러다가 점점 동네를 넓혀 블라복 비치에 가기도 하고 투어를 신청해서 좀 더 멀리 나가기도 했다.
나와 한 몸으로 2주간 내내 꼭 붙어 다녔던 우리 둘째는 화이트비치에서 모래놀이도 실컷 하고 바다에 뛰어들기도 했다. 원최 가만히 못 앉아 있는 애인데 과자 한 통을 손에 쥐어주고 앉혀 놓기도 하고, 4살에게 적합하지 않아 보이는 힘든 아일랜드 투어에도 질질 끌려다니기도 하고 했지만, 어쨌든 이 여행은 오직 녀석만을 위한 여행은 아니니 녀석이 좀 불편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엄마도 이모도 즐거울 권리가 있다. 우리는 1일 1 커피를 할 의무가 있기에!
예쁜 로컬 카페를 다니면서, 때론 종업원과, 때론 또 다른 나라에서 온 손님과 얘기를 나누고 웃고 떠들고 하며 나는 문득문득 나를 찾았다. 한국에서 있을 땐, 발달 센터를 오전 오후에 두 번씩 다니고 공부하기 싫다는 첫째를 앉혀놓고 숙제를 시키고 있을 땐, 내가 누구였는지, 내가 뭐 하는 사람이었는지, 뭘 좋아하는 사람이었는지를 잊었었는데, 이곳에서, 내 취향의 카페를 자유롭게 찾아, 랜덤한 사람들과 웃고 떠들고 하면서, 아, 나 이런 여행 참 좋아하는 사람이었지, 이런 류의 카페가 내 취향이었지, 나 그냥 아무 외국인 붙잡고 얘기하는 거 즐거워하는 사람이었지, 그런 생각이 들어서 살짝 눈물이 나려고 했다. 하늘은 맑고 바다는 푸르고 이 공간은 즐겁다. 이곳에선 나에겐 당장 급히 해야 하는 일이 없었다.
분 단위로 계획을 세워 실행에 옮겨야 했던 어려운 아들 둘 육아, 삼시세끼 메뉴 걱정과 과한 업무를 해 내야 했던 워킹맘의 삶은, 숨이 턱턱 막힐 만큼 갑갑했다. 그렇게 잘도 몇 년을 살았다. 마음이 고장 나고 몸도 고장 나려고 할 즈음 휴직을 하고 아이들 육아에 전념했다. 그리고 이곳에 왔고, 아주 오랜만에 나를 찾았다.
둘째가 과자를 다 먹고 다시 행패를 부리기 시작할 때쯤이면, 혹은 마의 12시가 다가오면 신데렐라 마냥 부랴부랴 어학원으로 돌아가긴 했지만, 아침 8시부터 낮 12시까지 매일 그 4시간은, 내게 잠깐의 해방을, 잠깐의 자유를 주었다. 아, 물론 덥다고 '엄마 안아!'를 외치는 둘째를 들쳐 안고 꾸역꾸역 걸어갈 땐 왜 나는 원정 육아를 하며 개고생을 하는가 하며 현타가 올 때도 있었지만, 가끔 나를 짠하게 여겨 둘째를 안아주는 언니가 있었으니, 그 또한 참 좋았다.
점심때가 되어서 다시 만난 초등 녀석들이 유난히 예뻐보이고 애썼다고 칭찬해주고 싶었던 것도 그 4시간의 휴식 덕분이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