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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이 Feb 09. 2024

유럽도 아닌데 12시간 걸려 도착한 보라카이

언니네는 17시간 걸렸고요!

보라카이로 들어가는 길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어학원 예약을 마치고 나서야 알게 된 후, 그 악명 높음에 대한 글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왜 내 주변인들은 보라카이가 예쁘다고만 했지, 가는 길이 험난하다는 얘기는 한마디도 안 했던 것일까. 나는 또 왜 7000개 이상의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 필리핀의 작은 섬 보라카이에 당연히 직항이 있을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것인가.


9월에 예약을 하고, 멀게만 느껴졌던 12월 31일은 스멀스멀 다가왔다. 언니는 경남 김해에 살고, 나는 인천에 살기에 우리는 각자의 집 근처 공항에서 출발을 할 수도 있었지만, 내가 혼자 두 9살, 4살 두 아들을 데리고 비행기를 타는 것이 막상 두렵기도 하고, 또 따로 출발했다가 누구 하나만 비행기가 연착되거나 하면 그 공백에 아들 둘을 데리고 그 작은 칼리보 공항(보라카이에 국제공항이 없어서 옆에 있는 비교적 큰 섬인 칼리보 공항에서 내린다)에서 어떻게 기다릴 거냐는 고민에서 언니네가 인천까지 5시간 걸려서 올라오게 되었다. 형부는 그야말로 언니와 조카들을 김해에서 인천까지 모시기만 하고 내려가셔야 하는 상황.


그렇게 언니네는 우리 집에서 하룻밤을 잔 후, 저녁 7시 30분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에 4시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비행기가 연착된다는 문자가 왔다? 우리는 에어서울을 이용했는데, 저가 항공(이었지만 결코 저가로 타지 않았던 극성수기의 보라카이행...)에서는 흔한 일이라고 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공항에서 산책(?)도 하고, 쉑쉑버거도 먹고 지루하다고 징징거리기 시작한 초등학생들을 위해 흔한 남매 책도 한 권씩 사서 안겨주었다. 그렇게 버티고 버티다가 출국장으로 들어갔다. 남편들의 해방감에 찬 즐거운 모습을 뒤로 한채...


출국장에도 너무 일찍 들어왔다!! 다행히 1 터미널에는 면세점 라인에 뽀로로 놀이터가 몇 개 있기도 했고, 라운지 근처에는 블록으로 놀 수 있는 공간도 있어서 아이들은 거기서 버티고 버텼다. 이제 출국장 게이트로 가보자. 그런데 웬걸. 또 추가 연착이 된 것이 아닌가!! 7시 30분 예정이었던 비행기는, 9시 즈음해서야 이륙을 했다. 이로서 우리는 2024 새해를 필리핀으로 가는 길 공중에서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


다행히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잠이 든 우리 4살 둘째. 초등학생인 우리 첫째와 두 조카는 기내식이 없으니 간식을 사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2천 원이면 살 것들을 5천 원에 사서 먹고, 공항에서 샀던 흔한 남매 책을 서로 돌려 읽다가 조용히 잠들었다. 저가항공인데 웬일로 모니터가 좌석 앞에 있길래 눌러보니 헤드셋을 대여하려면 돈을 내라고 한다. 그래... 괜찮아. 그다지 흥미로워 보이는 영화도 없었어...


그렇게 새벽 1시 즈음에 도착한 칼리보 공항. 낮 4시에 공항에 왔는데 새벽 1시에 칼리보 공항 도착이니!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다. 이제 배를 타기 위해 선착장을 향해 차를 타고 이동해야 한다. 우리는 어학원에서 픽업을 나올 줄 알고 유심히 어학원 이름을 찾았지만, 픽업 서비스는 전적으로 외주를 하고 있었다. 내 이름을 비교적 정확하게 발음한 훌륭한 필리피노의 작은 버스에 탔더니 꽤 많은 한국인들이 있었다. 그렇게 덜컹덜컹 1시간 40분을 배를 타는 카티클란 제티포트까지 굽이굽이 이동한다. 구시렁구시렁 말이 많던 어린이들도 1시간 40분 차를 타니 점점 말수가 없어지며 다시 잠이 들었다.

드디어 차는 카티클란 제티보트에 도착했고, 나는 아이들을 흔들어 깨웠다. 그런데 이번에는 배가 안 오는 게 아닌가! 낡은 카티클란 제티포트에서 도대체 배는 언제 오는 거냐고 영어를 잘 못하는 직원에게 얘기를 해보니 영어인지 따갈로그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뭐라 뭐라 설명해 주시는데 암튼 맥락 상 그냥 좀 기다리란 뜻인 듯했다. 배를 기다리며 30분. 모기도 잡고 도마뱀도 구경하며 제티포트 근처를 배회하니 비가 슬슬 온다. 그러던 찰나, 드디어 배가 왔나 보다. 포터(짐을 옮겨주시는 분들)들이 우리의 커다란 캐리어를 털썩 집어서 비를 뚫고 옮긴다. 한 명당 1달러씩 수고비를 드리고, 우리는 야반도주하는 사람들처럼 비를 뚫고 배에 몸을 실었다. 배는 상당히 빨랐다. 보라카이 제티포트까지 도착하고 나니 또 차를 탄다. 아이들은 야밤에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배를 타자 약간 신이 났다. 때는 새벽 3시...


10분 정도 배를 타고 보라카이 제티포트에 도착하자 또 우리의 캐리어(5개)를 3명에서 차에 실어주더니 또 1달러씩 드려야 할 상황이다. 제티포트에서 또 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여기서 10분 정도 또 차를 타고 덜컹덜컹 곱지 않은 길을 이동하니 드디어 우리가 예약했던 어학원이 나왔다. 드디어!! 때는 새벽 4시.


그러니까, 우리는, 공항에 도착한 그 순간부터 보라카이에 도착할 때까지 정확히 12시간이 걸린 것이다.

경남 김해에서 인천까지 올라온 언니는 17시간 만에 보라카이 땅을 밟았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의 숙소 2층으로 방을 배정받은 우리는 갑자기 눈이 말똥말똥해진 어린이 4명과 짐을 이고 지고 올라가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 보라카이. 아, 나 여기 쉬려고 온거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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