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도 괜찮지 않을까..
무언가 끊임없이 나를 바꾸고 개선하며 살아야 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대로 내 삶이 변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에 대한 두려움, 어쩜 그 표현은 욕심을 가장한 용어일지도 모르겠다. 진정 내 삶에 어떠한 변화가 필요한지도 확신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누군가와의 비교를 통해서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을 한 건 아닐까. 현재와 어떻게 인생이 다르게 바뀌었으면 하는 걸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도 모른 채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 하는 생각의 연속. 사실 어찌 보면 변화란 것은 한 번에 '팡' 하고 오는 것이 아니고 서서히 스며드는 것인지도 모른 채 말이다.
엄마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현실에 만족하며, 행복해해. 현재 가진 것에 만족 못하고, 행복해하지 않으며 신이 너를 질투할 거야. 쟤는 아무리 좋은 것을 줘도 늘 상 불평불만이니 차라리 2% 부족한 것만 늘 주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한다. 현재 가진 것에 만족하며 행복해하면 언젠간 네가 서 있는 자리가 네가 원하는 그 자리가 될 것이야.”
<2012년, 어느 날 싱가포르>
처음으로, 부모님과 3박 5일이라는 짧은 해외여행을 하게 되었다. 엄마와 아빠는 패키지여행 말고 자유 여행을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었다.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길을, 아는 사람도 한 명 없는, 말도 전혀 통하지 않는 한국이 아닌 나라에서 단 두 분만 스스로 여행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두 분에게는..
물론 나는 다르다. 여러 나라를 혼자 여행하면서 단순한 보기 여정이 아닌 내가 살고 있는 곳과는 다른 문화 경험, 누군가와 우연한 만남을 통한 추억, 그리고 걸으며 보게 되는 이국의 누군가 삶의 간접체험을 하며 여행을 했었다. 어느 날 문뜩 더 늦기 전에 자유여행을 통해 내가 느꼈던 그 감정을, 엄마와 아빠와 함께 공유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셋이서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물가에 내놓은 아기 마냥 부모님 품 안에서 보호받는 것에 익숙하던 나였다. 90대 노모가 70대 아들이 외출 때마다 "차 조심해라" 라는 말을 한다고 한다. 그것이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가 아닌가 싶다.
그런데 지금은 항상 노심초사 나를 걱정하는 두 분을 보호하는 보호자가 되었다. 여행지에서 엄마와 아빠는 호텔에서 체크인을 시작으로 음식점에서 음식 주문도, 택시를 타는 일도, 길을 잃었을 때 길을 찾는 일도, 호텔 방에 수건이 떨어졌을 때수건을 더 달라는 룸 서비스도 할 수가 없다. 내 손을 붙잡고 있는 아빠, 그리고 내 팔짱을 끼고 나와 이렇게 여행을 하고 있는 게 너무 행복하다는 엄마와 싱가포르 더위 속에서 길을 걷고 있다. 모르는 누군가에게 가는 방향을 묻는 일, 택시를 타고 택시 아저씨에게 우리에 행선지를 이야기하는 일, 스마트 폰을 들고 길을 척척 찾아내는 일들을 하면서난생처음으로 그들의 보호자가 된 것이다. 사실 대단히 큰일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도 나를 그저 흐뭇하게 바라보는 두분의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
싱가포르 음식 향이 싫다며 매번 음식점을 들어갈 때마다 엄마는 한국에서부터 가져온 고추장부터 꺼내 들곤 했다. 그래도 맛이 안 나는지 음식을 늘 반만 먹는 덕에 호텔방에서 라면으로 마지막 끼니를 때우며 그날의 여정을 마친 곤 했다. 라면을 모두 먹고 나면 피로가 몰려 오셔서 인지 노상 먼저 잠이 드신다. 그 옆에서 처음으로 보호자가 된 나는 다음날의 행선지를 짜며 '아, 나도 부모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구나' 하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부모님께 집 한 채, 차 한 대 사드린 여력은 발끝만큼도 안 된다. 가끔씩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곳, 낯선 이곳, 이 길 위에서 '그래도 나 이 정도면 괜찮네, 괜찮은 딸이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버스를 타고 가다가도, 친구들과 시끌벅적 서로의 자랑 아닌 자랑을 슬며시 내놓는 대화 틈바구니 속에서도, 잠이 오지 않는 어떤 밤 자려고 안간힘을 쓰며 침대에 누워 있다가도 드는 생각이다. 어떤 변화를 꿈꾸는지도 모른 채 그렇게 엄습해 오는 근심,
'내 인생이 이대로 끝나버리면 어쩌지...'
그런데 또 그렇다고 지금처럼 아니 지금만큼만 산다고 해서 뭐 그리 나쁠 것이 있을까..
오늘은 싱가포르 여행 중에 엄마와 아빠의 가이드가 되었던 그때 '나 이대로도 괜찮네' 하고 느꼈던 그 감정을 다시 되새겨 본다. 지금의 나도 왜 괜찮은지, 이대로의 삶도 뭐 나쁠 것 없을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가식없이 나를 모두 내보이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
내가 좋아하는 커피 한잔은 스스로 사 마실 수 있는 정도의 여유,
나의 든든한 후원자, 엄마와 아빠의 존재,
아직도 꿈을 꾸며 살아가는 마음,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행복해 하는 소소한 감정,
등등..
- 영화 청춘 스케치(Realiy Bites, 1994) 중,
큰 분홍 조개를 주시며 말씀하셨었지.
'아들아, 모든 답은 이 안에 있단다'라고,
영문을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빈 조개더라고.
모든 게 무의미 하단 거지,
단지 허무한 비극과 모면할 수 있는 상황들이 로또 같은 거라고나 할까. 복권 추첨 같은 거지.
그래서 난 작은 것에서 기쁨을 찾아.
치즈 버거 같은 거 말이야. 정말 맛있잖아.
비가 내리기 전 10분 전의 하늘,
웃음이 수다로 변하는 순간,
그리고 편안히 앉아서 담배 한대를 피며 즐거운 한때를 보낼 때.
거봐, 우린 이것만 있으면 돼.
담배 몇 개피, 커피 한잔
그리고 약간의 대화
너, 나 그리고 5달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