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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nda Jul 10. 2017

말을 이쁘게 하는 사람

의도가 있는 말은 예쁘지 않다.


영어 문장 중 내가 좋아하는 두 가지 표현이 있다.


하나는, "My pleasure",

다른 하나는, "It's my fault"


사실 이 두 문장을 처음 접하게 되었을 때 약간의 문화 충격을 받았었다. 영화 킹스맨의 "Manner makes man" 대사는 내가 대학 때만 해도 크게 와 닿는 문구는 아니었다. 매너란 걸 잘 모르던 그런 시절, 어학연수를 하면서 영국 사람들은 내게 적잖은 컬처쇼크를 안겨주었다. 길을 걷다가 어깨만 살짝 스쳐도 "Sorry"라고 이야기해주었고, 조그마한 친절에도 "Thank you"라고 말해주는 일들은 내게 익숙한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가끔은 영혼 없는 말투와 표정으로 외쳐대는 고마워와 미안해 일지라도 내 눈에는 그들의 그 한마디가 참 멋있어 보였다.


(소소한 기억 1)

어느 날 백화점을 향해 힘차게 걸음을 옮겨가던 찰나였다. 내 앞에 멋들어진 런던너가 백화점을 들어가고 있었고, 나도 그녀를 뒤따라 백화점을 향해 가고 있었다. 먼저 들어가던 그녀는 내가 한껏 뒤에 있음에도 뒤따라 가고 있음을 알고 문을 잡고 기다려 주었다. 그녀의 작은 배려의 태도에 감동을 받았고, 나도 런던에 그들처럼  "Thank you" 하고 외쳤다. 그리고 웃음을 지으며 그녀가 전한 한마디,


 My Pleasure


그녀가 잡아준 그 백화점 문도 고마웠지만 그녀의 그 한마디가 더 좋았다. 문을 열어 기다려줘서 고맙다는 나의 말에 직역하면 "내 기쁨이야" 라니. 나는 그때 영어의 'Pleasure'라는 표현을 그렇게 쓰는지 처음 알게 되었다. 말이 참 예뻤다. 기분 좋은 한마디였다.


(소소한 기억 2)

하루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던 때였다. 버스에서 급하게 내리려던 차에 나도 모르게 옆에 선 한 영국 남자의 발을 밟았다. "Sorry" 하고 얼굴에 한 가득 미안한 마음을 담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가 던진 말,


It's my fault


미안하다는 내게 발을 밟힌 그가 자신의 실수였다고 말을 하다니... 처음 들어보는 그들식 표현에 나도 모르게 다시 한번 감명을 받았었다.


뭐 특별한 표현이 아닐 수 있고, 어쩜 그들은 그냥 'Thank you'와 'Sorry' 하면 기계적으로 나오는 답변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게는 적잖은 충격이었다. 그리고 그 말이 참 좋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말을 이쁘게 한다는 것, 작은 말이라도 상대방을 배려해 주는 표현이 주는 감동을 느끼게 되었다.



가끔 툭툭 내뱉는 말들이 있다. 아무렇지 않게 뱉는 말들이지만 다분히 의도가 있는 말들이다. 그런 의도가 있는 말들은 예쁘지 않다.


주변에 결혼하고 아이가 있는 친구들이 많다. 내 이야기보다 네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것이 항상 예의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친구를 만나자마자 그들 사는 이야기를 먼저 물어보는 것.. 그게 배려라고 생각해왔다. 어쩜 강박증 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대부분은 내 관심사와는 먼 아이와 시댁에 대한 주제다. 난 조카까지 들춰내 가며 맞장구를 치곤 한다.

아이가 커가는 스토리, 향후 교육에 대한 것들, 시댁 이야기, 남편에 대한 투정 등등.. 가끔은 아무리 집중하려 해도 집중 못하고 딴생각이 든다. 피곤한 생각이 들다가도 미안함도 함께 든다. 그렇게 잠잠히 듣다가 묻지도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꺼낸 사회생활 이야기며 새로 시작한 연애 이야기. 다분히 의도가 있다. 각자 경험하지 않고 있는 세상에 대한 주제를 꺼내며 지금 내 라이프에 아주 만족하고 있다, 너의 삶 보다 나는 지금이 내 삶의 좋다는 강조와 은근슬쩍 꺼내는 자랑들. 실상 내 마음속에 느끼는 진짜 속마음은 중요하지 않다. 그저 나는 너 보다 잘 살아가고 있음을 대놓고는 하지 못하지만, 이리저리 불평 섞어 돌려가며 하는 이야기지만 결국 종착점은 숨은 의도가 있는 말들이다. 아마 서로 알면서도 넘어갈 뿐 말에 의도가 있음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친구들도 내 이야기가 피곤하게 느껴지겠지.

그런 대화를 나누고 친구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은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역시 의도가 들어 간 말들과 대화는 예쁘지가 않다.



어학연수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혼자서 유럽여행을 한 적이 있다. 그 당시에 아마 다시는 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던 거 같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반강제적 마음에서 한 여행이었지만 내가 한 선택 중에 꽤나 잘한 일 중 하나라고 생각이 든다. 그 이후 유럽을 다시 여행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같은 장소를 간다 해도 아마 그때 했던 것처럼은 여행은 힘들 것이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그 시절의 감성으로 여행은 힘들 것이다.


당시 돈이 많지 않은 학생이었기 때문에 숙소며 먹는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새로운 곳에 간다는 그 자체에 의미가 있었다. 그래서 한인민박이 존재하지 않는 도시만 제외하고 숙소는 모두 한인민박으로 정했었다. 하루 숙박비가 3만 5천 원 정도인데 아침이면 김밥을 싸주고 저녁이면 한식을 제공하기에 이 보다 더 완벽한 장소는 없었다.


두근대는 마음으로 로마 민박집을 가던 그 길목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저녁이 되면 민박집에 머무는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거실로 모여든다. 어색하지만 두런두런 모여 앉아 저녁밥을 먹고 주인아줌마가 준비해주 신 주전부리와 와인을 마셨다. 모두들 주인아줌마를 이모라고 불렀다. 이모가 정성껏 준비해주신 저녁 만찬과 와인을 마시다 보면 어색함은 금세 풀린다. 간단한 나이 정도 소개만 끝나면 모두들 신이 나서 오늘은 어디를 갔었고, 내일은 어디를 갈 예정이며, 그곳을 가면 무얼 조심해야 하고, 무엇은 꼭 먹어봐야 하는지 등 서로의 여행 무용담을 털어놓는다. 다음날 바티칸 박물관 갈 사람들이 있다면 같이 가자며 민박집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하루 종일 관광을 하기도 했다. 유럽 여행 한 달 중인 또래 대학생 오빠들도 있었고, 신혼여행으로 와서 호텔에 있다가 한식이 너무 그리워 1박을 머무는 커플도 있었으며, 유학 중에 잠시 짬을 내 여행을 하는 누군가도 있었다. 하룻밤 그렇게 이야기하다 보면 어느새 친구가 되었다. 떠나는 날은 몸조심 하라며, 다른 여행지에 가면 꼭 해봐야 하는 'to do list'까지 적어 준다.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런데 내 손에 꼭 쥐어진 작은 쪽지에 적힌 여행 팁은 진심이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시 베니스에서도 1박 2일을 머물렀었다. 베니스를 떠나던 날 기차 시간이 조금 남아 민박집에서 짐을 다 싸고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겨울방학이라 민박집은 문전성시였다. 내 자리를 빼고 다른 누군가가 들어왔다. 혼자 온 어떤 이가 혼자 온 나를 보며 혼자 여행하냐며, 다음 장소는 어디냐며, 몸조심이 여행하라고, 해주었던 말이 기억이 난다. 그 사람과 나눈 대화 시간은 고작 15분 정도였 던 것 같다. 그러나 따뜻함이 느껴지는 대화였다. 그저 슬쩍 스쳐 지나간 누군가의 진심 어린 "몸조심하세요!" 그 한마디가 참 고마웠다. 왠지 모르게 여행 내내 좋은 일들만 생길 거 같은 예감이 들었었다.

<당시 베니스에서 니스로 가던 기차 안>



말을 이쁘게 하는 사람

특별할 것이 없는 말들. 그저 그냥 의도 없이 전하는 한마디가 아닐까.


오늘은 왠지 그런 날이다. 단순한 대화가 필요한 날, 의도가 껴있지 않은 그 시절 민박집에서 나눴던 대화 같은.. 지금 당장의, 지금의 관심사와 속마음을 이야기할 수 있는, 아주 단순하지만 진심이 느껴지는 그런 한마디가 필요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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