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습이 시작되기 전 상급반 회원들이 술렁이기 시작한다. 물 온도가 평소보다 뜨겁다는 이야기, 이곳에서 누구보다 오래 수영해 온 이들이기 때문에 미묘한 변화가 감지되면 제일 먼저 알아차리는 이들이다. 안 그래도 바닥에 있는 배수구 쪽에서 뜨거운 물이 올라오고 있었다. 오늘의 퍼포먼스가 제대로 발휘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무대의 온도 조절이 시급했다. 배우들의 안전과 단 한 번 뿐인 오늘의 공연을 위해서 시설팀과의 긴밀한 협의가 필요한 상황. 수영강사는 수영장 밖으로 빠르게 나가면서 순식간에 무대감독으로 돌변해 시설팀 사무실 문을 급히 두드린다. 가쁜 숨을 가다듬고 해당 상황을 정확하게 전달해 시설팀이 이내 상황을 파악하고 수정 작업에 들어갈 수 있게 한다. 조정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우들에게 알리면서 잠시 소강상태를 이룬다. 마침내 바닥에서 뜨거운 물이 올라오지 않게 되면서, 이내 안온한 표정 속에 배우들은 각자의 헤엄을 시작하기에 이른다. 무대감독은 오케이 사인을 어딘가에 보내고 싶었지만, 이제는 수영 강사 본연의 임무로 돌아갈 따름이다.
강습 도중에는 갑자기 스포츠 기자가 되기도 한다. “어제 아시안게임 수영 보셨어요?” 역영을 펼치는 선수들의 물살을 이곳으로 잠시 데리고 오면 회원들은 나도 그 물살 봤다며 진짜 다들 너무 멋지고 빠르다고 화답한다. 수영 종목은 비인기 종목으로 많은 이들에게 외면받고 있지만, 여기 수영장에서만큼은 축구, 야구는 비할 바 안 되는 최고의 인기 종목이다. 지금 수영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이 수영 경기를 보게 되면 즐거움은 물론이거니와 생중계로 수영하고 있는 선수들에게 자동 감정 이입이 된다. 물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벽을 터치하는 그 짜릿함을 나도 아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수면 아래 배치된 카메라로 선수들의 물속 움직임을 보는 일은 그것 자체로 귀중한 공부가 된다. 십수 년간 갈고닦은 선수들의 움직임을 막바로 따라 하는 일은 현실 세계에서 벌어지지는 않지만, 선수들의 손끝, 발끝 하나하나의 움직임이 우리 마음을 건드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수영은 배우면 배울수록 굉장히 디테일한 운동인데, 찰나의 순간에 선수들이 물속에서 짓게 되는 디테일이 우리 수영의 힌트가 될 수 있다.
가끔은 팔자에도 없는 외교관이 되기도 한다. 더 정확하게는 외교관을 자처할 수밖에 없다. 수영장은 레인을 기준으로 반이 구분된다. 우리 반이 2레인을 쓰면, 다른 반이 옆 2레인을 사용하는 식이다. 강습은 각반에 배정된 강사들의 지도하에 동시간대에 벌어진다. 이때, 레인은 벽이 아니라 선이다. 벽은 완전히 차단돼 있지만, 선은 넘나들 수 있다. 자칫하면 수업을 듣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반의 영역에 침범하게 되고, 여기에서 오롯이 수영하고 있는데 내가 의도치 않게 레인 너머의 회원들에게 개입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옆 반에서 킥판을 활용하면서 신나게 발차기를 차다 보면 급물살이 이쪽으로 넘어오기 마련이다. 우리 반 회원들은 몸이 밀려날 수도 있고 자유형을 하다가 호흡할 때 공교롭게 그 타이밍에 밀려드는 물을 한꺼번에 먹게 될 수도 있다. 평소 같으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인데, 그날의 컨디션이나 기분에 따라 핀잔이 넘어가기도 한다. 빠르게 벌어지는 상황이기 때문에 그 상황마저 차단하기는 쉽지 않다. 벌어진 일에 대해서 서둘러 우리 회원님을 다독이고, 옆 레인으로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는 것으로 소명을 다한다.
그리고 수영장 외교관의 가장 중요한 책임 안건은 평영 발차기 이슈이다. 양옆으로 크게 벌어지는 평영 발차기는 우리 회원이 옆 반의 회원을 차게 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나도 차봤지만 차여도 봤기 때문에 상호 간에 이해는 존재하지만, 허벅지 깊숙이 전해지는 통증으로 눈에 쌍심지를 켜고 범인을 찾고서는 따져 묻는 경우도 가끔 생긴다. 이때는 강사인 내가 가장 빠른 속도로 수영해서 현장을 방문한다. 자초지종을 듣고서는 최대한의 이해를 돕고 갈등이 더 크게 벌어지지 않게끔 오늘의 평영은 여기에서 마무리하는 등의 조치를 취한다. 마지막으로 부디 멍이 들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각반의 수영이 재개될 수 있게끔 한다. 이렇듯 레인은 뚜렷한 경계인 것 같으면서도 갈등 상황에서는 흐릿해지기 마련이다. 수영장의 화합과 평화를 위해 강사는 선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수업이 끝날 때는 마무리 멘트를 맡는다. 오늘 수업에서 있었던 일, 아까 설명하다가 만 것들도 마무리 멘트로 등장하곤 하지만, 가장 자주 등장하게 되는 것은 아무래도 ‘날씨’이다. 아까 수영장 오기 전에 ‘날씨’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오늘 만나게 될 ‘날씨’로 말미암아 안부 인사를 대신한다. 이럴 때는 꼭 기상캐스터의 마음을 헤아리게 된다. 사실로만 나열된 문장 속에서 최대한의 기분에 대해 물어보는 직업, 오늘은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이 눈길을 뚫고 수영장에 온 분들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오늘 우리는 이글루 안에서 수영한 것과 다름없어요!” 우리 회원님들의 앞으로의 기분도 폭신한 눈처럼 안온하기를 눈사람의 심정으로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