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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세의 초산, 엄마가 되기엔 너무 늦은 나이일까요?

난임병원에서 산부인과로...

by 찐스마일

그렇게 우리는 난임이라는 터널을 통과해서 난임병원에서 산부인과로 첫발을 내딛였다.

가방에는 난임시절의 바램인 분홍색 임산부 배지가

달려있었다. 지각생인 내게 임산부라는 또 다른 삶이 펼쳐졌다. 47세의 봄이었다.




내 불안과는 달리 모든 것이 제 때, 교과서처럼 흘러갔다. 난임병원 의사 선생님이 말했다.

“다음 주에 졸업합시다.
여기는 난임병원이라 심장소리를 듣고 나면 해드릴 것이 없습니다.
이제 산과에서 도와주실 거예요.”

그렇게 나는 심장소리를 듣고, 전원 서류와 축하카드, 그리고 작은 아기 양말을 들고 난임병원 졸업생이 되었다. 이곳을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예상치 못하게 난임병원을 졸업하고, 임산부가 되었다.


난임병원에서는 혹시 모를 유산에 대비해 12주까지 약과 질정을 처방해주었고, 그 이후의 진료는 산부인과에 맡기라고 했다. 나는 47세, 12월 출산 예정인 초노산 초산부였다. 게다가 자연임신이 아닌 시험관 시술로 얻은 아기였기에 병원 선택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조건은 분명했다.

신생아 중환자실(NICU)이 있을 것
고위험 산모 경험이 많은 의사가 있을 것

그렇게 추려보니 선택지는 두 곳뿐이었다.
산과로 유명한 한 종합병원(산후조리원 보유)과 고위험 산모 진료로 유명한 대학병원.
나는 두 곳을 다니며 상황을 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진료실로 들어서며, 난임병원을 처음 방문하던 때가 떠올랐다. 복도엔 배가 불룩 나온 임산부들이 대기 중이고, 남편들이 옆에서 지키고 있었다.
웃으며 초음파 사진을 보여주는 모습이,
몰래 사진을 숨기고 조용히 나가던

난임병원 풍경과는 너무 달랐다.


간호사가 물었다.

“마지막 생리가 언제예요?”
“그게… 2월에…” 하고 망설이자,
갱년기 치료를 받으러 온 줄 오해했다.
“아니요, 임신 10주차인데요.”
“아, 임산부세요?”

내 나이를 생각하면 충분히 그렇게 오해할 만했다.

의사도 진료 때마다

“초산이라고 하셨죠?”
라고 재확인했고, 결국 차트에 연필로

‘고령 초산모’라고 적어두었다.


산부인과의 공기는 확연히 달랐다.
산모들의 평균 나이는 훨씬 어렸다.
주민번호 앞자리가 90년대생이 대부분.
70년대생은 거의 없었다.


엄마가 되기엔 내 나이가 너무 많은걸까?

난임병원 역시 고령에 속하긴 했지만, 대부분 나와 큰 나이 차이는 없었기에 산과로 옮긴 후 산모들이 이렇게 어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90년생이라해도 30대 중반인걸 보면 내가 많이 늦었음을 실감했다.


난임병원은 환자의 심리적 안정을 위해 대화를 자주 나눴지만, 종합병원 의사들은 훨씬 사무적이었다. 진료도 한 달에 한 번. 주 3회 병원에 가던 난임 시절에 비하면, 너무 긴 간격이었다. 그래서 불안할 땐 집 근처 작은 병원에 들러 아기의 무사함을 확인했다.


첫 진료 날, 의사가 웃으며 말했다.

“초산이세요? 축하드립니다. 고생 많이 하셨네요.” 그 한마디에 마음이 울컥했다.


“일단 아기 먼저 봅시다.”
진료실에 들어서자마자 초음파실로 안내하는데, 기분이 묘했다.“난포 한번 봅시다”라는 말과 함께 초음파실로 갔던 난임병원과는 달랐다.


이번엔 아기의 손, 발, 심장소리를 들려주며 몸 구석구석을 설명해주었다. 내 몸 안에 새로운 생명이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태동이 느껴질 무렵엔 배 속에서 작은 물고기가 헤엄치는 듯했고, 시간이 지나자 힘찬 발길질에 숨이 턱 막히기도 했다. 그 모든 순간이 경이로웠다.


그렇지만, 매달 진료 때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혹시 의사가 “심장이 뛰질 않아요”라는 말을 할까 봐, 아이에게 이상이 있을까 봐.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진료가 끝난 후 내가 전화를 늦게 하면 먼저 연락해“아기 아직 괜찮아?”라고 물었다.


우리는 진료 전 주말마다 사찰을 찾았다.
기도하고 촛불을 켜고, 소원지를 써야 마음이 놓였다. 서로를 심리적으로 보호하기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래서 남들처럼 아기용품을 사며 설레는 기분,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는 행복, D라인의 만삭사진. 태교를 하며 아이의 얼굴을 상상하는 여유… 그 모든 것을 나는 누리지 못한 채 10개월을 보냈다.


임신사실 또한 주위에 오픈하지 않았다.

양가에도 1,2차 기형아검사가 모두 끝나고 20주가 가까워서야 알렸고, 지인들도 20주가 넘어서 소수에게만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출산 후 내 카카오톡 프로필에 아기사진을 보고 알게된 지인들이 깜짝 놀라 설마 이게 나 맞을까? 의심할 정도였다. 지난번에 8주에 성급히 오픈한 뒤 유산한 경험도 있었기 때문에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난임카페에서 중기,후기 유산도 꽤 보았고

모 연예인의 출산3일전 유산은 나를 더더욱

불안하게 했다.

돌이켜보면 평생 한 번뿐인 시기와 감정인데

충분히 누리지 못하고 불안 속에서만 보낸 게 아쉽다. 하지만 그 시절로 돌아간다 해도,

아마 똑같을 것이다. 유산율 90%가 넘는 나이,

어렵게 얻은 아기를 잃을까 겁이나서 불안해하며

작은증상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그렇게

나는 얼음 위를 걷듯 하루하루를 버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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