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서 두개의 심장이 뛰는 신비로운 경험.
나는 47세, AMH 0.07이었다. 이 나이에 12번이나 배아이식을 해서 임신되었지만, 출산까지 갈 거라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나 또한 처음에는 그랬다. 하지만 인생은 언제나 뜻밖의 방식으로 나를 이끌었다.
내 안에서 두개의 심장이 뛴다는 것...
그 사실은 믿기 어려울 만큼 벅차면서도, 나를 한없이 불안하게 했다. 생명을 품는다는 것은 굉장히 신비로웠지만, 결코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임신 초기, 나는 양치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늘 속이 느글거리고 어지러웠다. 탄산수를 늘 손에 들고 살았다. “임신이 이렇게 힘든데, 다들 이 과정을 거쳐왔단 말인가?” 새삼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 위대하게 느껴졌다.
중기부터는 자다가 다리에 쥐가 나서 깜짝 놀라 깨곤 했다. 30주가 넘어가자 눕는 것조차 힘들었다. 무언가가 나를 누르는 듯 숨이 막혀, 쇼파에 앉아 쿠션을 두 개나 등에 괴고 겨우 선잠을 잤다. 임신과 함께 내 몸은 빠르게 변해갔다. 배에는 임신선이 진하게 새겨졌고, 걸을 때마다 뒤뚱거리며 넘어지지 않으려 잔뜩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견디기 힘들었던 건… 새치 염색을 못 한 것이었다. 임신 기간 동안 거울 속의 나는 거의 ‘할머니’ 같았다. '열 달만 버티면, 출산하고 제일 먼저 염색을 하리라.’ 스스로 다짐하며 웃픈 마음으로 버텼다.
주변 친구들은 임신 기간이 가장 마음 편하고, 맛있는 것 먹으며 아기를 맞을 준비로 설레었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출산 준비물도 최소한만 준비했다. 혹시라도 잘못될 경우, 물건으로 마음 아플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필요하면 그때 사지 뭐.”
요즘은 새벽배송도, 조리원 쇼핑도 있으니 마음을 닫아두고 최대한 버텼다.
고령 임산부에게는 늘 합병증의 그림자가 따라붙는다. 임신성 당뇨, 임신성 고혈압, 임신중독증, 전치태반...
병원에서 듣는 단어 하나하나가 공포였다.
내게 찾아온 것은 임신성 당뇨였다. 그 순간부터 임신은 또 하나의 전쟁이 되었다. 나는 하루 다섯 번 손가락을 찔러 혈당을 체크하고, 하루 세 번 식사 5분 전 배에 인슐린 주사를 놓았다. 그리고 식사 후에는 섭취한 당을 소모하기 위해 무려 2시간 동안 홈트레이닝을 했다. 그러고나면 하루가 다 지나갔다. 내 평생 이렇게 건강하고 빡세게 살아본 적은 없었다.
시험관 시술을 위해 매일 자가주사를 맞던 시절도 힘들었지만, 이번에는 나 자신을 넘어, 건강한 아기를 낳기 위해 버텼다. 만삭까지 내 몸무게는 단 6kg 증가. 출산 하루 전까지 그 빡센 식단관리와 운동은 계속됐다.
‘이 정도 의지면 평생 다이어트도 두렵지 않겠다.’
농담처럼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사실은 절박함 하나였다. 그저 아기를 무사히 만나고 싶다는 간절함이었다.
가을이 다가오며 출산이 가까워졌음을 실감했다. 그래도 마음을 조금 놓은 건 20주가 지난 뒤였다.
염색체 검사 결과가 ‘저위험군’, 정밀 초음파에서도 ‘이상 없음’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 그제야 남편과 나는 가느다란 희망을 품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희망조차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우리는 숨죽이며 그저 조용히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렸다. 인터넷 검색도 철저히 자제했다.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그렇게 마음을 단단히 붙잡았다.
20주가 지날 즈음, 남편이 조심스레 말했다.
“우리… 이 아기 태명 지어주는 건 어때?”나는 잠시 말이 막혔다. 이전 임신 때 8주 차에 ‘튼실이’라는 태명을 지어주었다가 유산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의 아픔이 커서 이번에는 차마 이름을 지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저 ‘아기’라고만 불렀다. “이 아기도 이름이 있으면 좋긴 하겠지… 그럼, 지어줄까?" 나는 조심스레 대답했다.
우리는 잠시 머리를 맞대고 태명을 고민했다.
태몽이 돼지꿈이니 ‘꿀꿀이’는 어떨까 하다가, 47세에 찾아온 기적 같은 존재니까 ‘기적이’도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어느 것도 마음에 꼭 와닿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남편이 물었다.
“우리, 이 아기에게 가장 바라는 게 뭐야?”그 질문에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아무 탈 없이, 건강하게만 태어나는 거.”
그 순간, 우리 둘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우리 아기의 태명은 '무탈이'가 되었다. 그저 이 아이가 무탈하기만을 바라는, 우리의 간절한 마음을 담아 그렇게 이름 지었다. 남편도 나도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 이름을 부르는 순간, 우리 마음 속 두려움이 조금은 녹아내리는 듯했다.
그리고 나는 아주 소극적으로 고령 임산부 단톡방에 가입했다. 낯선 사람들이었지만, 그 방의 언니들과 동생들이 내 마음을 지탱해주었다. 특히 나보다 한 살 많은 언니가 건강하게 출산하고 아기 사진을 올린 날, 나는 핸드폰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나도 할 수 있겠구나.’ 처음으로 자신감이 생긴 순간이었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누군가가 나에게 이런 위로와 안정감을 줄 수 있다는 것이 너무도 신기했다.
조금 마음이 놓이자, 나는 조심스레 산모교실에도 나가 보았다. 아기 목욕법을 배우고, 작은 손수건과 손싸개를 선물로 받으면서 “아, 내가 정말 임산부가 되었구나.” 하고 실감했다. 강연이 끝난 뒤에는 추첨 이벤트가 있었는데, 놀랍게도 내가 1등에 당첨되어 아기 식탁의자를 선물로 받았다.
평생 이런 행운과는 거리가 멀었던 나였기에 순간 너무 놀라고 어리둥절했다. ‘우리 무탈이는 운이 좋은 아기구나.' 그 생각에 마음이 뭉클하고 기뻤다.
출산일이 가까워지자, 조금씩 아기 맞을 준비를 시작했다. 배냇저고리와 작은 아기 모자를 조심스레 빨래해 널며, ‘이렇게 조그마한 옷을 정말 아기가 입게 될까?’ 너무 신기해서 만져보고 또 만져보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우리 집에 모빌이며 딸랑이며 알록달록한 캐릭터의 아기 용품들이 놓여 있는 걸 보고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동안 부부만 살던 집에 새로운 가족이 찾아오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씩, 그리고 확실히 느껴졌다.
예민하고 불안한 시간이었지만, 50을 바라보는 나이에 임산부라는 새로운 경험은 참으로 신선하고 감사한 일이었다. 평생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었던 경험이기에, 그 자체로도 소중했다.
47세를 한 달 남겨둔 어느 겨울 날, 내 인생에서 단 한 번뿐인 임산부의 시간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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