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계절을 바꾸어 놓은 작은 생명
아기를 처음 만난 순간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2.6킬로그램의 작은 몸, 아직 세상의 공기를 낯설어하는 듯 쭈뼛거리는 손가락과 검은 눈동자. 그 작은 생명이 내 품에 안기자, 내 안의 공허가 사라졌다. 오랜 시간 텅 비어 있던 자리가 드디어 채워졌다.
"무탈아, 엄마 왔어."
드디어 그날이 다가왔다.
아슬아슬했던 봄, 숨 막히게 더웠던 여름이 지나자,
내 안에서는 작은 물고기가 헤엄치듯 꿀럭꿀럭한 태동이 이어졌다.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한 가을, 무탈이는 갑자기 쑥 자랐고, 나는 누가 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임산부가 되었다.
진료 간격도 한 달에서 2주, 그리고 매주로 점점 좁혀졌다. 그렇게 매주 병원을 찾던 어느 날, 의사 선생님의 말이 떨어졌다.
많이 힘들죠? 이제 아기 만납시다.
38주 중으로 날짜 잡아서 오세요.
그제야 실감이 났다.
'정말 내가 출산을 하는구나!'
묵묵히 다가오던 그날이, 어느새 코앞에 와 있었다. 아기가 내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지금의 이 시간도, 숨 쉬기 힘든 무게도, 저녁만 되면 배가 울퉁불퉁 튀어나올 만큼 힘차게 발로 차던 그 느낌도 곧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아쉬웠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하루라도 빨리 만나고 싶은 마음, 그리고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이 동시에 몰려왔다. 내가 가장 두려웠던 건 출산의 순간 그 자체가 아니었다.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 들을지도 모르는 한 마디가 무서웠다.
아기가 숨을 쉬지 않아요.
건강하지 않아요.
손가락이 다섯 개가 아니에요.
그런 말을 듣게 되지 않을까,
그 상상이 나를 밤마다 덮쳤다.
시험관 시술을 하며 수없이 난자 채취를 했던 지난 시간들. 마취에서 깨어날 때마다 들었던 차가운 말들.
채취한 난포가 공난포입니다.
난자는 나왔지만 너무 부실해서 폐기해야 합니다.
초음파에서는 두 개 보였지만 실제로는 하나만 나왔고, 그마저도 비정상 난자입니다.
희망보단 좌절이 익숙했던 시간들 속에서,
내 마음에 긍정적인 그림을 그리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출산의 두려움은 곧 그 모든 기억이 다시 반복될까 하는 공포였다. 예전에 들었던 이야기 하나가 떠올랐다. 시험관 시술을 20번 넘게 한 끝에 임신에 성공한 한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남들처럼 두려워하며 분만실로 들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웃으며 들어갔고, 출산의 순간에도 환하게 웃었다고 했다.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그 이야기.
지금의 나는 그 마음을 조금 알 것 같았다.
그 긴 여정을 걸어온 그녀의 웃음은, 두려움 너머의 해방이었으리라.
출산 하루 전날, 남편과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남편은 그날 아침, 사찰에 들러 기도를 하고 왔다.
우리는 두려움도 설렘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채,
서로의 침묵 속에 마음을 감췄다. 점심을 먹고 집을 나서던 순간, 나는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지금 둘이서 나가지만, 혹시 돌아올 때 셋이 아니라 다시 둘이면 어떡하지?
처음으로 입 밖에 꺼낸 두려움이었다.
남편은 "별일 없을 거야." 라고 말하며 내 어깨를 두드렸지만, 우리 둘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병실은 따뜻한 온돌방에 쇼파와 TV까지 있는 1인실이었다. 링거도 맞지 않고, 환자복도 입지 않은 채, 맛있는 음식을 시켜 먹으며 TV를 보니 마치 여행 온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 여행은 돌아갈 때 셋이 되어야만 끝나는 여행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나는 '환자'가 되어 있었다.
간호사들이 분주히 드나들며 각종 수치를 체크했다. 소변줄, 링거줄, 주렁주렁 달린 몸.
굵은 마취 바늘이 팔에 꽂히자, 긴장감이 급격히 몰려왔다. 이동식 침대에 누워 분만실로 향했다.
걸을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시킨 대로 침대에 누워 이동했다.
분만실 입구에서 남편과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손을 잡고 눈을 마주쳤을 때, 수많은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두려움, 기대, 그리고 말할 수 없는 떨림. 하반신 마취가 시작되자 몸은 점점 무거워졌고, 수술 기계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나는 명상에서 배운 호흡으로 두려움을 누르려 애썼다.
조금 누를게요. 아픕니다.
순간, 배를 강하게 누르는 통증이 밀려왔다.
아파요! 그만~
소리를 지르려던 그 순간.
응애! 응애!
숨이 멎는 듯한 정적을 깨뜨리며,
작고 힘찬 울음소리가 분만실을 가득 채웠다.
그 순간,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꼭 잠긴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것처럼,
나는 멈출 수 없었다.
수많은 실패의 날들,
차가운 수술대 위에서 들었던 냉정한 말들,
5년동안 흘렸던 눈물, 잃었던 감정과 길,
외로움과 무력함,
내 몸이 물에 젖은 종이조각처럼
무너져 내린 그날의 기억,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던 희망.
그 모든 시간이 슬라이드처럼 동시에
스쳐 지나갔다.
‘건강하고 무탈하게 와줘서 고마워.’
간호사가 아기를 내 얼굴 곁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이불에 싸인 작은 얼굴, 또렷한 두 눈.
무탈이는 울음을 멈추고, 나를 또렷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엄마, 나 여기 있어."
47세의 어느 겨울날,
길고 긴 어둠의 터널 끝에서 한줄기 빛처럼 다가온
2.6킬로그램의 작은 아기 무탈이를 만났다.
나는 그렇게 47세의 늦깎이 엄마가 되었다.
오래 기다린 만큼, 내 품에 온 이 작은 생명은
나의 모든 계절을 바꿔 놓았다.
이 글이 45세 이상, 지금도 힘겹게 시술을 이어가고 있는 그녀들에게 닿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고된 육아 중에도 제가 브런치와 블로그를 시작한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고령출산의 엄마들인 우리가 숨어버리면, 세상은 또 다시 "역시 45세 이상은 안 돼. 돈 쓰고 몸만 버리는 헛짓이야" 라고 말할 것이고, 그 말에 절망할 그녀들의 얼굴이 눈에 밟히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제가 딱 그랬으니까요.
힘겹게 시술을 이어가시는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희망이 되기를 바랍니다.
#40대임신 #47세출산 #태동 #제왕절개 #노산 #분만실 #시험관시술 #고차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