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을 포기하던 날, 아기가 왔다

두번의 상실, 그리고 늦게 온 봄

by 찐스마일

늦은 결혼이었지만 우리는 나름의 균형을 찾아가고 있었다. 나는 결혼이 내 삶을 단단히 지탱해 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곧 다른 얼굴을 드러냈다. 마흔이 넘어 시작한 임신 준비는 쉽지 않았고,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난임병원으로 향했다.


그때는 몰랐다. ‘시험관’이라는 세 글자가 내 삶을 얼마나 흔들어놓을지... 지겹도록 이어지는 주사와 약물, 요동치는 감정의 소용돌이 내 삶과 나를 뒤흔드는 새로운 경험이었지만, 결과는 늘 실패였다.


어렵게 찾아온 생명조차 마흔셋과 마흔넷, 두 번의 유산으로 머물지 못하고 떠났다.

병원 복도를 걸어 나오던 날, 다리에 힘이 풀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그날 이후로 조금씩 말을 아끼기 시작했다.


시술은 계속됐다. 채취, 이식, 대기, 피검사.

그리고 다시 같은 결과. 어느 순간부터는 결과를 기다리는 마음보다 결과를 이미 알고 있는 쪽에 더 가까워졌다.


그 질척이는 5년을 버틸 수 있었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30대 후반에 쌓아두었던 시간 덕분이었다. 방황 끝에 명상을 하며 나를 내려놓았던 날들. 그때 기른 내면의 힘이 없었다면 나는 이 거센 파도 앞에서 진작에 부서졌을 것이다.


그렇게 임자(壬子)대운의 깊은 물속에서 5년을 버텼다. 수없이 채취를 하고 이식만 11번째, 언제나 피검수치 0 이라는 익숙한 결과에 길들여지고 있을 때 쯤이었다. 배에 남은 주사 자국이 익숙해질 즈음, 통장에 찍히는 숫자도 함께 익숙해졌다.


수백만 원이 빠져나가는 속도보다 희망이 줄어드는 속도가 더 빨랐다. 나는 여전히 병원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점점 뒤에 남겨두고 오는 기분이었다. 병원을 오가는 기차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나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거지? 누가 좀 말려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제발 아기가 생기게 해 주세요'가 아닌 '포기할 수 있는 용기를 주세요'라는 기도를 신께 했다.


46세...현실적으로 임신은 불가능에 가까운 나이인데, 큰 금액을 매달 지출하고 힘들어하고 또 다시 습관적으로 병원을 향하던 내 발걸음이 한없이 처량하게 느껴졌다. 내 삶을 이대로 두고 싶지 않다. 나를 이 고통속에서 구해주고 싶었다.


냉장고에 가득하던 주사기와 소독솜을 쓰레기통에 쏟아붓고 나서야, 나는 처음으로 깊은 잠을 잤다. 동시에 마음 한구석이 텅비어 버린 뻥 뚫려 바람이 솔솔 부는듯한 묘한 감정도 느꼈다.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이 말을 받아들였다. “할만큼 했다. 이 정도면 미련은 남지 않을꺼야, 아이 없는 삶도 내 삶이다.” 그렇게 포기하던 긴 터널의 끝에서, 나는 기적처럼 아이를 만났다.


임자의 깊은 물속에서 질척이는 현실속에서 이 삶 또한 내 삶이라고 받아들이는 순간이었다.


내 나이 마흔일곱. 대운이 바뀌던 해의 초봄이었다. 나는 그때서야 알았다. 붙잡고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길이 손을 놓고 나서야 보이기도 한다는 걸. 그때서야 손을 놓는 방법을 알았다.

[길 위에서 펼친 운명의 지도]


머물지 못한 생명의 이유

경자(庚子)·신축(辛丑)년 운에서 자식의 기운인 금(金)이 찾아왔으나, 당시 내 땅(土)은 너무 차갑고 물에 젖어 있었다. 씨앗은 왔으되, 얼어붙은 땅이 차마 품어주지 못한 셈이다.


놓아버렸을 때 다시 시작되는 삶

결혼도 출산도, 악착같은 통제를 내려놓았을 때 비로소 찾아왔다.

명리학적으로 농부가 씨를 뿌리는 행위는 '식신(食神)'이다.

씨를 뿌린 뒤 매일 흙을 파헤치며 싹이 텄는지 확인하면(과도한 집착), 씨앗은 스트레스로 죽고 마는 법이다. 씨를 뿌렸다면 그 뒤엔 잠시 잊어야 한다.


결과를 통제하려는 욕심을 버리고 지금 이 순간의 행위에만 머물 때, 비로소 풍성한 수확(재성)이 찾아온다. 명리는 수천 년 전부터 우리에게 가르쳐 왔다. 조급하게 결과를 계산하기보다, 지금 이 순간을 살라고. 내 굳은 땅을 녹여준 건 억척스러운 노력이 아니라, 모든 것을 비워낸 순간 찾아온 늦은 봄의 온기였다.



[함께 읽으면 좋은 글] 이 시기, 운명이 나를 어떻게 흔들고 다시 세웠는지에 대한 가장 날것의 기록은 저의 지난 브런치북 <지각생 인생>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jjinsmile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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