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한 상상 속에서 태어난 장면은 마치 어딘가에 있지만 동시에 없는 세계처럼 흐릿했다. 혜원은 텅 빈 잔을 내려놓으며, 묘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칼바도스의 향이 그녀의 생각 속에서 이질적인 공간을 열어준 듯했다.
“있다가도 없고, 있어도 없는 존재…”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순간, 그녀의 앞에 또렷한 실루엣이 나타났다. 어디선가 본 듯하지만 기억 속에서 자꾸만 흐릿해지는 얼굴이었다. 눈을 깜빡이는 사이 그는 사라질 듯, 다시 나타날 듯 불완전한 형체로 움직였다. 혜원은 그가 카이임을 깨달았다.
“혜원, 우리가 무엇을 찾고 있는지 알고 있나요?” 카이의 목소리는 단호하지만 흔들렸다. 그는 인간과 기계의 경계에서 늘 혼란스러워했다. 자신의 존재는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유전자 조작으로 태어난 그는 자신이 가진 초월적인 능력이 그를 인간으로 만들어주는지 아니면 이방인으로 밀어내는지 이해하려 애썼다.
“우리 모두 불완전한 상상 속에 살고 있는 거 아닐까?” 혜원은 잔잔히 대답했다. “칼바도스 같은 거야. 잠깐 향을 느꼈다가도,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그들은 침묵 속에 빠졌다. 불완전한 존재는 단지 카이와 같은 신인류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인간 자체가, 이 세계 자체가 그런 것은 아닐까? 혜원은 고개를 들어 흐릿한 달빛 아래를 바라보았다. 달빛은 분명히 거기 있었지만, 닿으려 하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엠마는 이 모든 이야기를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늘 카이와 혜원이 위험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과 기술의 조화를 논하면서도, 엠마는 이 모든 실험 자체가 인류를 한 단계 더 파괴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녀는 혜원이 잔을 내려놓는 소리를 듣고 차분히 걸어왔다.
“혜원, 이 모든 게 실재하지 않는다면, 왜 이렇게 고통스럽겠어?” 엠마의 말에 혜원이 고개를 들었다.
“고통도 환영일 수 있잖아. 우리가 느끼는 모든 감각이 다 기계의 오류라면…” 엠마는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그녀는 칼바도스 잔을 손에 들고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래도 마셨잖아. 그리고 마셨기 때문에 잔이 비었어. 이건 현실이야.”
혜원은 엠마의 태도에 미묘한 불쾌감을 느꼈다. 그녀는 늘 그렇게 단호하고, 논리적이었다. 하지만 이 세계는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혜원은 카이를 돌아보았다. 카이는 엠마의 말에 흔들리지 않았다.
“엠마, 현실은 네가 정의할 수 없어.” 카이가 낮게 말했다. “우리 모두의 현실이 다르고, 그 현실 속에서 존재의 이유를 찾는 것뿐이야.”
그날 밤, 혜원은 홀로 다시 칼바도스를 따라 마셨다. 그녀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문장을 정리해 종이에 적었다. “없어도 있고, 있어도 없는 존재라면, 그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
그녀의 질문은 결국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카이는 어디로 가야 하고, 그녀는 이 여정에서 어떤 역할을 맡아야 할까? 엠마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 단호한 결론을 내리려 하는 걸까?
이들은 결국 불완전한 세상 속에서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찾는 과정에 놓여 있었다. **‘제로의 시대’**는 단지 기술과 자연의 충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불완전한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여정이 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