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빛과 그림자의 경계
천라성의 높은 담장을 넘어 아침 해가 떠올랐다. 구름이 붉게 물든 하늘 아래, 단청은 스승 현운도인을 마주하고 서 있었다. 현운도인의 눈은 고요했으나, 그 속에는 무거운 예지가 스며 있었다.
"단청아."
그의 목소리는 낮고 깊었다.
"너는 봉황의 불꽃을 다루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단청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제가 다루는 것이 불꽃이라면… 그렇다면 그림자는 대체 무엇인가요?"
현운도인은 천천히 죽간(竹簡)을 들어 그녀에게 보였다. 그 위에는 오래된 문자가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 빛이 있는 곳에 그림자가 있고, 그림자는 빛을 따르며, 둘은 하나가 되리라.
"봉황의 아이는 두 가지 힘을 모두 지녀야 한다. 빛과 어둠, 불꽃과 그림자… 네가 강해질수록 그림자도 함께 강해진다."
단청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럼… 제가 강해질수록, 어둠도 저를 따라온다는 뜻인가요?"
현운도인의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렇다. 그 어둠을 두려워하지 마라. 그 또한 네 일부다."
단청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지금까지 그녀가 믿었던 것은 봉황의 불꽃이었다.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강렬한 힘… 하지만 이제 그녀는 그 불꽃 뒤에 감춰진 그림자까지 받아들여야 했다.
"하지만 스승님… 만약 그 어둠이 저를 삼키면요?"
현운도인은 잠시 침묵하더니, 나직이 말했다.
"그래서 네 곁에 백랑이 있다."
단청은 놀란 눈으로 백랑을 돌아보았다. 백랑은 한 걸음 뒤에서 무표정하게 서 있었지만, 손가락 끝은 살짝 떨리고 있었다.
"네가 불꽃이라면, 그는 바람이다. 불꽃이 과열되지 않도록, 때로는 진정시키는 바람."
백랑은 조용히 말했다.
"난 그저… 네가 무너지지 않도록 곁에 있을 뿐이야."
단청은 한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불꽃과 그림자가 동시에 일렁였다.
같은 시각, 칠야문 본산
칠야문의 문주가 어둠 속에서 웃고 있었다.
"빛과 어둠이 하나가 되는 순간… 단청은 더 이상 봉황의 아이가 아니다."
그의 손끝에서 검은 안개가 피어오르며 방 안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단 한 사람이 무릎 꿇고 있었다.
사도(使徒).
그는 고개를 숙이며 나지막이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문주님?"
칠야문의 문주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답했다.
"천라성을 무너뜨려라.
봉황의 아이가 스스로 빛과 어둠을 깨닫게 되도록."
그의 눈동자는 심연과 같았다.
천라성의 밤
달빛이 성벽을 감쌌다.
단청은 혼자 성벽 위에 서 있었다. 백랑은 잠시 자리를 비웠고, 현운도인은 깊은 명상에 들어갔다.
그 순간—
휙!
어둠 속에서 화살 하나가 날아왔다.
단청은 반사적으로 불꽃을 일으켜 화살을 태워버렸다. 그러나 곧이어 수십 개의 그림자가 성벽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칠야문이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올 것이 왔군."
그리고 불꽃이 그녀의 손끝에서 거세게 타올랐다.
전쟁의 서막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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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둠 속에서 피어나는 불꽃
천라성의 밤하늘이 불길로 물들었다.
단청의 손끝에서 피어오른 봉황의 불꽃이 칠야문의 그림자들과 부딪쳤다. 불꽃은 타오를수록 더욱 붉게 번져나갔고, 그 주위로 어둠의 안개가 소용돌이쳤다.
"단청, 정신 차려!"
백랑의 외침이 허공을 가르며 들려왔다.
그가 칠야문의 사도들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그의 검은 마치 바람과 같았고, 칼끝은 그림자들을 벨 때마다 허공에 바람자국을 남겼다.
"너무 불꽃에만 의지하지 마라! 네 그림자를 잊지 말라고 했잖아!"
단청의 눈이 흔들렸다.
스승 현운도인의 말이 떠올랐다.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도 강해진다…
순간, 칠야문의 한 사도가 그녀의 등 뒤로 다가왔다.
"등 뒤를 조심하라, 봉황의 아이."
날카로운 단검이 번쩍였다.
하지만 그 순간—
단청의 그림자가 검은 물결처럼 꿈틀거리며 사도를 감싸 안았다. 단검이 바닥에 떨어지고, 사도의 움직임이 멈췄다.
"이게… 뭐지?"
단청은 숨을 헐떡이며 자신의 그림자를 내려다보았다.
"내 불꽃이 만든… 그림자?"
그녀의 불꽃이 만들어낸 그림자가 스스로 생명력을 가진 듯 움직이고 있었다. 봉황의 불꽃이 빛이라면, 이 그림자는 어둠이었다.
그러나 두 개의 힘은 서로를 소멸시키지 않고 공존하고 있었다.
그때, 칠야문의 문주가 성벽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재미있군."
그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네가 불꽃과 그림자를 동시에 다루게 될 줄이야… 봉황의 아이가 아니라, 재앙의 아이가 될 수도 있겠구나."
단청의 눈이 번뜩였다.
"나는 재앙이 아니다!"
그녀의 불꽃과 그림자가 동시에 일어나, 성벽 위로 불길과 어둠의 파도가 몰아쳤다.
하지만 칠야문의 문주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손끝에서도 검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자, 이제 이 싸움의 진짜 의미를 알려주마."
밤하늘에 번개가 치고, 천라성 위에 거대한 검은 봉황의 형상이 떠올랐다.
그 순간, 단청의 불꽃이 더욱 격렬하게 타올랐다.
전쟁의 서막은 이제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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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황의 깃털, 그림자의 날개
천라성의 밤이 이토록 깊었을까. 불꽃과 그림자가 뒤엉킨 전장은 숨소리조차 날카롭게 갈라졌다.
단청의 손끝에서 타오르는 봉황의 불꽃은 점점 더 푸르게 변해갔다. 처음엔 붉었으나, 푸른 불꽃은 생명을 깎아 태우는 듯한 기운을 뿜어냈다. 그 불꽃에 둘러싸인 그녀의 그림자는 마치 살아 숨 쉬듯 춤을 추었다.
“푸른 불꽃… 봉황의 진정한 힘인가?”
백랑이 중얼거렸다. 그의 검끝은 이미 칠야문의 사도들의 피로 물들었고, 그러나 그 역시 체력이 고갈되어가고 있었다.
반면, 칠야문의 문주는 느긋하게 단청의 푸른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의 불꽃이 빛날수록, 그림자는 더 깊어질 것이다.”
그의 말에 단청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누르며 대답했다.
“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거지?”
“너의 빛과 그림자가 하나가 되는 순간… 너는 진정한 봉황도, 그림자의 주인도 되지 못한다. 단지 서로를 파괴할 뿐.”
문주의 손끝에서 검은 안개가 또 한 번 피어났다. 이번에는 이전보다 훨씬 짙고,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안개가 흩날릴 때마다 주위의 기운이 뒤틀렸다.
“칠야문의 ‘암연(暗焰)’이다.”
백랑의 눈빛이 얼어붙었다.
암연.
칠야문이 금기의 어둠과 불꽃을 합쳐 만들어낸 파멸의 힘이었다. 오직 칠야문의 문주만이 쓸 수 있다고 알려진 기술이었다.
순간, 하늘 위에 떠 있던 검은 봉황의 형상이 암연에 휩싸이며 천둥처럼 울부짖었다. 그 소리만으로도 천라성의 성벽이 흔들렸다.
“이대로라면 천라성은…”
백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주가 손을 휘둘렀고, 암연의 봉황이 천라성으로 내려앉았다. 성벽은 갈라지고, 불꽃과 그림자가 한꺼번에 폭발했다.
그러나 그때—
단청의 불꽃과 그림자가 합쳐지며 거대한 쌍둥이 봉황의 형상이 떠올랐다. 하나는 푸른 불꽃, 하나는 칠흑의 그림자였다.
두 봉황이 서로의 깃털을 부딪치며 하늘 위에서 소용돌이쳤다.
“너의 빛은 곧 어둠이다.” 문주가 속삭였다.
단청은 이를 악물며 손끝에 남은 마지막 힘을 끌어올렸다.
“나는 빛도, 어둠도 아니다. 나는 봉황이다!”
푸른 불꽃과 검은 그림자가 동시에 폭발하며 밤하늘을 갈랐다.
천라성의 운명이, 그리고 봉황과 그림자의 결말이 결정될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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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명의 날개가 겹칠 때
하늘에 그어진 불꽃과 그림자의 선은 마치 두 세계가 맞부딪치는 경계를 이루었다. 푸른 봉황과 칠흑의 봉황은 서로의 날개를 휘감고 고요히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한순간의 적막. 그러나 그 적막은 곧 폭풍처럼 터질 준비를 마친 것이었다.
“빛과 어둠이… 서로를 삼키고 있군.”
백랑은 이를 악물었다. 저 싸움은 단순한 힘의 충돌이 아니었다. 서로가 서로를 융합하려 하고 있었다. 봉황의 불꽃이 어둠을 태우고, 어둠이 불꽃을 삼키는 악순환.
그 순간, 칠야문의 문주가 입가에 섬뜩한 미소를 그렸다.
“단청, 네가 이 싸움을 끝내려면 네 안의 그림자를 온전히 받아들여야 한다.”
단청의 손끝이 떨렸다. 그녀의 불꽃은 푸르게 타오르지만, 반대편 날개에서는 어둠이 번져나갔다. 봉황의 한쪽 눈은 푸른 불꽃, 다른 쪽은 칠흑의 안개였다.
“어둠은 나의 일부가 아니다. 너희가 내 안에 심어놓은 독일 뿐!”
단청이 외쳤다. 그녀는 문주가 과거 자신에게 가한 저주, 그리고 봉황의 피에 스며든 어둠의 힘을 떠올렸다.
그러나 문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것은 네 안에 원래부터 존재하던 것. 빛만 있는 봉황이란 없다. 진정한 봉황은 빛과 어둠의 두 날개를 가진다.”
순간, 검은 봉황이 단청의 푸른 봉황을 덮치려 했다. 그 순간 단청은 눈을 감고 자신의 불꽃과 어둠을 동시에 끌어안았다.
두 날개가 겹치는 순간—
하늘에는 푸른 불꽃과 검은 그림자가 함께 피어오르며, 새로운 봉황이 탄생했다. 빛과 어둠이 조화를 이룬 한 쌍의 날개가 하늘 위에 펼쳐졌다.
문주의 표정이 굳었다.
“이… 이럴 수가…!”
“나는 빛도 어둠도 아닌… 존재 자체다.”
단청의 목소리가 천라성 위에 울려 퍼졌다. 새로운 봉황이 날개를 한 번 휘두르자, 칠야문의 암연이 산산이 부서지며 흩어졌다.
문주는 뒤로 물러나며 이를 갈았다.
“네가 봉황의 진정한 주인이라면… 이 싸움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그는 휘몰아치는 어둠을 타고 성벽 너머로 사라졌다.
푸른 불꽃과 어둠의 잔재가 공존하는 밤, 천라성의 전투는 그렇게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