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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지숙 Sep 17. 2023

'동유럽에서 반달 살이' 해보니

소설가 안지숙의 체코 여행

더칼럼니스트’ 문주용 대표님의 청탁으로 더칼럼니스트에 게재한 에세이이다. 귀한 지면에 실리는 건데 이왕이면 예쁜 내용을 싣자, 싶어서 다소 여행을 좋게 각색한 점이 없지 않다. 여행이 어디 다 편하고 좋기만 하겠는가. 하다보면 툴툴거릴 수도 있고, 또 좀 멋진 장면 만나면 감동해서 호들갑을 떨 수도 있고 그렇지 않나. 앞에 나온 내용과 상충하는 게 있어도 양해를^^ 실린 날짜는 4월 20일이지만반달살이를 하고 쓴 글이라 이쯤에 글을 놓는다.




-분단국 여행자의 국경탈출(?)

만우절인 4월 1일 시작된 이번 여행에서 아무런 계획도, 일정도 없는 나흘이 주어졌다. 날이 맑든 흐리든 우산과 물과 휴지와 커피와 필기구와 충전기와 여권과 지갑과 휴대폰을 넣은 묵직한 배낭을 메거나 캐리어를 끌고 나섰던 여느 아침과 달리 커피 한 잔 앞에 놓고 앉아있는 한가로움이 좋아 나도 모르게 미소가 새 나온다. 창 너머로 멀찍이 보이는, 옆으로 길쭉한 건물은 체코 우스티주(州) 데친(Děčín)시의 데친역이다. K하우스에 머무는 우리의 여행은 늘 저 잘생긴 데친역에서 열차를 타는 것으로 시작한다.     

체코로 오기 전 내가 생각했던 여행은 K하우스가 있는 데친시에 눌러앉아 구시가지를 걷거나 국경마을을 돌아보는 거였다. 고재열 여행감독의 기획으로 꾸며진 이 여행에 결정적으로 끌렸던 게 K하우스가 독일과의 국경지대에 있다는 점이었다. 생각해보라. 버스를 타거나 열차를 타고, 아니면 엘베 강에 띄운 유람선을 타고 동네 마실 다녀오듯 슬렁슬렁 국경마을을 돌아보는 자신을 말이다. 너무 짜릿하고 설레지 않는가.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에피소드 하나. 여기 온 다음 날인가, 우리 일행이 독일과 폴란드의 접경지역인 즈고젤레츠로 넘어가 강변식당에서 만두요리를 먹었다. 만두 국물이 엄청 맛있었던 게 문제였는지 나이세 강을 건너 독일 괴를리츠로 와서 마을을 구경하던 일행 몇이 다리를 건너가 강변식당에서 '볼 일'을 보고 오는 기행을 저질렀다며 자랑스러워(?)했다. 웃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실로 자랑스러워할 만한 게, 분단국가의 현실을 사는 입장에서는 국경을 무시로 넘어 화장실을 갔다오는 이게 실화냐 싶었다.     


-체코 데친시에서 한달살이

국경마을의 매력에 빠져 느긋한 한달살이를 꿈꾸며 날아왔는데 도착한 이튿날부터 일정은 내 생각과 달리 바쁘게 돌아갔다. 짜놓은 일정도 그렇고, 열한 시간이나 비행기에 갇혀 날아왔으니 뭔가 하나라도 더 보고 싶다는 욕심이 내 등을 떠밀었다. 첫날부터 바로 어제까지 딱 하루 쉬고, 체력에 무리다 싶게 너무 열심히 쏘다녔다. 물론 바지런히 쏘다닌 덕분에 탄성을 자아내는 곳곳의 장관을 눈에 담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어느 것만이 옳다고 할 수는 없어 지난 보름을 뜻하지 않게 잘 지낸 건지, 정신없이 달리기만 했는지 잘 모르겠다.     

사실 어느 쪽이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지금 이 순간 사기를 당하거나 어디 한 군데 다친 데 없이 건강하고 무탈한 상태로 평화로운 아침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이 정도면 됐지, 생각하니 마음이 너그러워진다. 넉넉하고 한가로운 시간 속으로 데친의 아침 풍경이 흘러든다. 연이어 바람처럼 떠돈 여정이 선물박스처럼 포장된 채 내 앞에 두둥 떠오른다. 실로 ‘동유럽 유(有)작정 한달살기’라는 컨셉트로 시작한 여행의 절반이 지났다.     

벌써 절반이라니. 십여 일간, 중세와 르네상스의 건축물과 체코의 역사와 문화의 공간 여행을 했던 날들이 속도감을 높이며 달아나는 것 같다. 이러면 곤란하지. 나는 달아나는 날들을 붙잡아 어깨에 내려앉은 피로까지 기억하며 그날그날의 행로를 떠올려본다. 발음하기 어려운 단어들이 혀에 얹히고, 내가 발을 디뎠던 땅과 성과 수목의 정원이 마을 앞을 지나는 강물의 윤슬처럼 반짝이며 머릿속을 스쳐간다.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순례여행

3월 31일 밤늦게 도착한 이튿날부터 팀 전체일정으로 K하우스 주인장이자 베테랑 유럽 가이드인 데친 샘을 따라 폴란드와 독일의 경계를 넘나들었고, 잠시 틈이 나면 데친 성(Děčín Castle)이 있는 강 너머 산책길을 따라 걷는 것으로 하루를 보냈다. 전체 일정이 잡히지 않은 날을 그냥 흘려보낼 수 없다며 S, H와 3인조를 이루어 부다페스트 여행을 감행했다. 도나우 강 언덕에 자리잡은 부다 왕궁과 어부의 요새, 마차시 교회와 부다페스트 시내만 도는 얌전한 여행이 아니었다. 부다페스트 켈레티역에서 기차를 타고 가다 이름도 낯선 도시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헝가리의 소도시를 찾아가는 일정까지 소화해낸 빡센 여행이었다. 라벤다 향이 가득한 에게르 마을에 이어 벌러톤 호수와 티허니 마을을 섭렵하고 돌아와서는 드러누워 쉬어도 모자랄 판인데 프라하행을 감행했다.     

이쯤 되면 몸살 기운이 오는 건 당연지사. 프라하를 갔다온 다음날 하루는 아무 데도 나가지 않고 온전히 쉬었다. 덕분에 슬며시 찾아온 몸살을 물리쳤는데 이튿날 팀 전체일정이 시작됐다. 2박3일의 전체일정은 체코의 역사를 더듬고 중세와 르네상스에 지어진 건축물이 외세에 시달렸던 체코의 역사와 맞물려 파괴되고 재건되어 온 과정을 더듬어보는 시간으로 채워졌다. 녹록지 않았던 이 일정에 나는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순례여행’이라는 이름을 지어붙이고 지도상 위치를 짚어가며 여행을 즐겼다.     

순례여행의 출발은 수직으로 뻗은 나무가 인상적이었던 트리탑이었다. 이어 찾아간 곳은 쿡스라는 작은 마을. 온천이 솟은 땅에 병원을 세워 부상당한 군인을 치료하고 양로원으로 운영되기도 한 캐슬 쿡스(Castle Kuks)는 동부 보헤미아에 속하고, 페트라 넴초바가 지은 소설 ‘할머니’의 배경이 된 라티보르시는 지도상으로 확인하니 남보헤미아에 속했다.     


-"유럽에서 가장..."이라는 것들의 향연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르네상스 건축물로 꼽히는 리토미슐 성은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경계에 위치해있고, '유럽의 정원'이라는 별명을 가진 레드니체 성은 모라비아와 오스트라의 경계지역에 있었다. 잠깐 옆길로 새자면, 레드니체의 또 다른 명소인 발디체 성의 와인 살롱(Wine Salon)에서 생전 처음 와인 시음 체험을 했다. 하마터면 지하 살롱에서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꼴을 보일 만큼 맛이 있었는데, 살롱 소믈리에는 자부심 어린 표정으로 내가 들고 있는 와인을 가리키며 최고의 모라비아산 와인이라고 했다.     

2박3일 일정의 마지막 날 체코의 대표적인 맥주인 버드와이저의 고향, 체스케 부데요비체를 잠시 들렀다. 우리 팀을 인솔하고 가이드해 준 강 선생님에 의하면 블타바강과 말세강이 합류하는 이곳에 1265년 프르세미슬 오타카르 2세가 보헤미아 왕국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도시를 세웠다고 한다.     

체스케 부데요비치에서 20분쯤 더 달려 도착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로 불리는 체스키크룸로프는 체코 남보헤미아주에 속하는 도시이다. 크룸로프 성을 비롯해 마을을 이루는 모든 건물, 집, 길, 다리가 하나같이 아름답기 그지없어 구시가지 자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게 하나도 놀랍지 않았다. 참, 체스키는 체코어로 ‘보헤미아의 것’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 체스키라는 단어로 모라비아에 있는 모라프스키크룸로프와 구별된다고 한다.  

   

-난 유럽 여행자가 아니라 산책자!

돌아보니 십여 일이 물살 센 강처럼 거침없이 흘렀다. 숨 가쁜 날들이었다. ‘동유럽 유(有) 작정 한달 살기’의 엔간한 일정은 치러낸 듯한데, 며칠 후에 진행될 3박4일의 전체일정이 또 남아 있다. 그리고 나머지 날들은 자유일정이다. 이 기간에 부다페스트 여행동지들과 베를린 4박5일을 계획했는데 아무래도 포기해야 할 것 같다. 그러기 있냐고 원성을 들을 게 분명하지만 말이다.     

사실 3박4일 전체일정까지 나흘이 텅 빈 건 늘 함께 어울리던 부다페스트 동지들과 헤어졌기 때문이다. 셋이서 잘츠부르크와 비엔나를 가기로 했는데, 예전에 패키지여행으로 갔던 데를 또다시 점을 찍는 여행처럼 옮겨 다니는 게 크게 의미가 없겠다 싶어 내가 빠져나온 거였다. 홀로 빠져나와 아무 계획 없이 펑퍼짐하게 퍼져서 낮잠도 즐기고 엘베 강변 산책도 좀 하고 동네 사람들이 모여드는 카페에서 체코맥주도 마시면서 보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조금 심심하다 싶으면 프라하를 한 번 더 다녀오는 것도 좋겠고, 체코의 그 어느 곳보다 역사적 상흔이 깊은 드레스덴을 돌아다녀도 좋을 것이다. 이까지 왔으면 꼭 가봐야 된다는 '천국의 문'도 가보고 싶긴 하다. 딱 요 정도가 좋지. 나는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고 창밖으로 보이는 데친역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젓는다. 딱 이 정도라고 못박을 것도 없지 싶어서.     

지금 시각은 09시 40분이고, 나는 커피잔을 치우고 노트북을 연다. 사실은 여행 중 재미있는 '꺼리'로 에세이 한 꼭지를 써보라는 <더 칼럼니스트>의 청탁을 가벼이 받을 수가 없어 아침 일찍 일어나 원고를 쓰는 중이었다. 끝까지 마무리하고 밥 먹고 고양이세수만 하고 드레스덴 나들이를 하자 싶은데 써놓은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뭐랄까, 글이 매력이 없다. 간지가 안 난달까.     

늦은 아침을 챙겨 먹고 드레스덴이든 마이센이든 바깥바람을 쐬고 와서 저녁에 마무리해도 되는데 의자에서 엉덩이가 떨어지지 않는다. 커피 한 잔을 다 마셨더니 배도 안 고프다. 조금 전 두 끼분으로 안쳐놓은 밥은 오늘 저녁과 내일 아침으로 먹으면 된다. 햄과 김과 양파와 고추장과 치즈가 있으니 마켓에 들를 필요는 없겠고…아, 피망도 있다.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글에 간지가 날 리 있나.     

다른 소재를 꺼내어 다시 써봐야 작가가 같으니 없던 간지가 살아날 것 같지 않다. 독자가 이 글을 읽고 조금이라도 건질 수 있는 내용을 충실히 채워서 보내는 걸로 마음을 잡는다. 임시저장해 놓은 메일도 꺼내 퇴고를 끝낸 단편소설을 첨부해 보내고, 하는 김에 공과금도 오늘 중으로 처리하기로 한다. 이런저런 번잡한 거 오늘로 다 처리하고, 오후 네 시(이상하게 나는 오후 네 시가 좋다. 어떤 일을 시작하기에도 좋고, 끝내기에 좋은 시간 같다)에 숙소를 나서 동물원이 있는 방향으로 두어 시간 걷다가 오는 걸로 오늘 하루를 보내야겠다.     

음, 차 타고 혼자서 어딜 다녀오는 게 썩 내키지 않는다는 말을 참 길게도 썼다. 결론은 내가 동네 산책자이지 여행자가 아니라는 것. 나보고 자유영혼이니 뭐니 했던 분들, 죄송하지만 말짱 헛짚으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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