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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지숙 Sep 16. 2023

여기 시간은 저녁 여섯 시 사십육 분

2023년 4월 14일 금요일

모처럼 진한 늦잠 자고 일어나 비 오는 창밖을 내다보며 앉아있다. 저 멀리 보이는 게 독일과의 국경지대인 우스티주 데친(시?)의 데친 열차역이다. 

오늘부터 나흘간 계획한 일정이 없다. 체코 한달살이에서 거의 반이 지나가는 동안 늘 함께한 S와 H는 어제 체스키크롬로프에서 팀에서 빠져나가 잘츠부르크로 향했다. 잘츠부르크 도시를 돌고 비엔나로 갔다가 17일 데친 숙소로 올 것이다. 세 사람이 다같이 가기로 했다가 나는 패키지여행으로 갔던 곳인데 싶어 빠졌다. 셋이서 나흘간 재밌게 돌아다니는 것도 재미는 있겠는데 내가 했던 패키지처럼 바쁘게 찍고 오는 여행이라면 크게 의미가 없다 싶었다. 

일이 그렇게 되어 지금 나는 이 나흘을 어떻게 쓸까 생각 중이다. 아, 물론 다른 팀원들도 있긴 한데 지난 보름간 우리 3인조 나, S, H가 너무 똘똘 뭉쳐 다니는 바람에 저쪽 6명 팀과는 살갑게 어울리지 못했다. 내가 혼자 숙소에 남았다고 그쪽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실실거리는 것도 우습고, 같이 어울려 어딜 가는 것도 피곤했다. 내 비록 길치에 안면치로 문 나서면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수준이지만 혼자 다니는 게 편하지 싶다.

그리하여 다시 눈을 들어 창밖을 힐끔힐끔 내다보며 앉아있는 지금 내가 결정해야 할 것은 텅 빈 나흘을 어떻게 보내야 하나, 하는 것이다. 숙소 쥔장인 데친 샘에게 엘베강을 따라 가는 열차가 있다는 말을 얼핏 들어 아침에 물어보려고 했는데, 배낭 메고 나서면서 머시기머시기(여기 지명이 낯설어 한 번 만에 못 알아들음)에 간다고 했다. 바쁜 사람 붙잡고 물을 수도 없어 잘 다녀오시라고만 했다. 

이제 창밖 멍은 그만 때리고 지도를 열어놓고 열차역을 중심으로 점을 찍어볼까 하는데… 맘속으로는 엘베강도 볼 만큼 봤고 지난 보름간 내 여행스타일로는 따라갈 수 없는 빡셈과 에너지 과잉분출의 일정을 보냈으니 나흘을 아예 틀어박히고 싶은 유혹에 끌리고 있다. 여기 체코에 올 때 제목만 달랑 붙여서 가져온 단편을 이 나흘간 집중적으로 쓸 것이냐. 아니면 엘베강을 따라 달리는 열차에 올라탈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방콕해서 노트북 앞에 앉아있다가 답답해서 늦은 오후 동네마실을 나갔다. 우산을 받쳐들고 슬리퍼를 질질 끌며 숙소 뒤로 난 길을 30분쯤 걷다가 이 동네 시장 격인 빌라(BILLA)로 갔다. 1층은 슈퍼마켓과 올리브영 비슷한 가게, 담배와 잡지를 파는 가게가 있고, 2층은 옷가게와 맘카페가 있다. 

맘카페에서 뛰어노는 애들이랑 커피를 마시며 쉬는 엄마들이 십여 명 흩어져 앉아있는 모습이 되게 편안해 보였다. 커피와 주스 같은 마실 것이랑 과자 종류를 여러 개 놓고 여자 둘이 카운트를 지키고 있었다. 어깨에 우산을 걸고 슈퍼에서 산 빵과 요구르트와 소시지 봉다리를 들고 들어서자 여자 둘이 호기심 어린 눈길을 보냈다. 

둘러보려고요, 로 말하려 했는데 "I'm looking around,'가 튀어나온다. 이건 둘러보는 중이에요,라는 뜻인데... 이러거나 저러거나 알아듣지 못하지만 뜻은 통했는지 좋아요, 라는 표정으로 웃는다.

잠시 앉아서 커피나 마실까 하다가 메일 보낼 것을 띄워놓은 게 생각나서 그대로 돌아나왔다. 

아까 숙소를 나섰을 때 입성 초라한 30, 40대 남녀가 체코KB은행 ATM창구 앞에 모여 목소리를 높이며 뭐라뭐라 떠들고 있었는데 아직도 그 자리에 있다. 여전히 뭐라뭐라 떠드는데 조금 어린 축에 드는 남자 하나가 거의 울부짓듯 소리를 친다. 뭔가 일이 틀어져 인출해야 할 돈이 사라지기라도 한 건가. 비는 오고, 이곳 날씨는 이상한 냉기를 품고 사람을 춥게 만드는데.

보내려던 메일을 임시저장하고 원고를 한 번 더 읽어보고 있다. 구성이나 캐릭터 행동방식을 새롭게 좀 시도해본 건데 이게 괜찮은 건지, 엉망진창인 건지 감이 안 잡힌다. 애매하고 막연하다.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다 그랬다. 여기 시간은 저녁 여섯 시 사십육 분이다.

데친 숙소 바로 옆에 베트남 쌀국수집이 있다. 엄청나게 양이 많고 고기도 푹푹 넣어주는 맛좋은 쌀국수를 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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