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빛탐 Oct 21. 2023

때로 불안하고 슬퍼요 - 하지만 이겨낼 겁니다

고민하는 직장인, 보라

올해 장마는 유독 길었다. 비는 또 얼마나 많이 오던지. 우산에 의지해서 아무렇지 않은 척 또 하루를 보내도, 습하고 눅눅한 공기에 어느새 잔뜩 젖어버린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삶도 때로 그런 시기를 지난다. 작은 우산에 의지해서 길을 가야 하는 시간. 비가 오는 것 같은 마음을 숨기기 위해 애써 웃어 봐도 기운이 나지 않는 날들.

      

그래도 우리는 안다. 아무리 긴 장마라도 언젠가 반드시 끝난다는 걸. 마음을 가리는 웃음이 아니라 정말 즐겁고 기뻐서 웃음이 터져 나오는 날이 온다는 걸 말이다.






어쩌다 보니 제약회사 다닙니다

보라는 제약회사에 다닌다. 

새로운 의약품이 개발되면 그걸 식약처에 등록하고 의약품 허가를 받는 일을 한다.      


많은 직장인이 그렇듯, 보라도 꿈을 좇아 직장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사실 제약회사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었다. 

관련 경험은 대학생 때 선배의 권유로 잠깐 아르바이트를 해봤던 것 정도.     


“화학과를 나왔는데, 원래는 디스플레이 전자 쪽으로 가고 싶었어요. 졸업 후에는 대학원도 가고 싶었고요.”     

하지만 결국 보라는 제약회사에 취직했다. 솔직히, 별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당시 취업난이었고, 집에서도 대학원 가는 걸 좀 반대하셨거든요. 그런데 또 막상 취직하려고 하니 화학과 졸업생으로서 갈 수 있는 자리가 많지 않더라고요. 취업 준비를 하다가 제약회사에서 아르바이트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제약사에 입사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어쩌다 보니’, 보라는 제약회사의 직원이 되어 있었다.          






어찌어찌 잘 견디는 중입니다

업무 만족도는 10점 만점에 6~7점 정도. 그냥 ‘직장’이라고 생각하며 다닌다.      


“돈을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요. 저는 정말 현실적인 이유로 이 일을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 지금 회사는 나쁘지 않죠. ‘워라벨’이 꽤 좋은 편이거든요. ‘칼퇴’도 가능하고요. 퇴근 후 남는 시간을 잘 쓰자는 주의인데, 그런 면이 만족스럽습니다.”     


물론 아무리 ‘워라벨’이 좋아도, 그게 일 자체가 쉽다는 소리는 아니다.      


“제 일은 상당히 ‘예민’한 편이에요. 식약처를 상대하다 보니, 공무원 상대하는 게 쉽지 않을 때가 많거든요. 법이나 규정도 계속 바뀌고 빡빡해질 때도 많아요. 규정도 점점 강해지고요. 매번 이런 변화를 확인하고 챙기는 게 종종 힘들다고 느껴질 때가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따라갈 수밖에 없죠. 제가 발버둥 친다고 식약처가 바뀌는 게 아니니까요. 그렇다 보니 일 자체가 마치 예민한 사람을 상대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좋은 이직처에 대한 가능성에도 늘 마음을 열어 두고 있다.     


“‘꼭 이 회사여야 한다!’는 식의 집착은 없는 편이에요. 좀 더 큰, 경력을 살릴 수 있고, 전문가로 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곳이라면 옮기는 것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상태로는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거나 더 높이 올라가는 데에 한계가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개발부에 있긴 하지만 저는 약사가 아니거든요. 제약회사에서 약사가 아닌 상태로 올라갈 수 있는 선에는 한계가 있어요. 일종의 유리천장이랄까요?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 회사를 언제까지 다닐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아마 마흔 정도까지밖에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뒤에 관해 계속 생각하게 됩니다. 고민이 많아요.”          




사실 고민도 되고힘들어요.

워라벨 좋은 직장 다니면서 취미 생활도 하고 여행도 다니는 보라. 최근에는 바리스타 자격증도 땄다. 그 모습에 주변에서는 부러움의 목소리도 들린다. 직장에 미련 없이 자기 하고 싶은 거 하며 사는 삶이 속 편하고 멋져 보인다는 것.     


그러나 보라의 가까운 지인들은 그 모습이 조금 걱정스럽다.      


경력 10년이 되어가는 시기. 이직을 해야 할지, 커리어는 어떻게 할지. 보라가 얼마나 고민하고 스트레스 받고 있는지 알고, 동시에 그녀가 커다란 상실을 극복하는 중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아버지는 언제나 제게 다시 일어날 힘을 주는 존재였죠. 이전 회사에서 정말 힘든 일이 있었는데, 버티고, 버티다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가 유일하게 그 결정을 지지해 주셨거든요. 그게 정말 고마웠어요. 절 딱 붙잡아 주는 느낌이 들어서 정말 든든했는데...... 아빠를 다시 한번 보고 싶어요. 살아계실 때 ‘아빠 사랑한다’고 말을 못해서. 사랑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한동안 눈물을 닦던 보라가 얼굴을 정리하고 방긋 웃는다.     


보라에게 웃음의 의미를 물었다. 그는 어떨 때 웃는 걸까?

잠시 고민하던 보라가 솔직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감정을 숨기고 싶을 때 웃는 거 같아요. 감정 표현을 잘 못하는 편이거든요. 생각을 정리해서 얘기하는 것도 너무 어렵고요. 주로 슬픈 걸 숨길 때 웃는 거 같아요.”          





파란 하늘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보라가 지금 본인에게 가장 주고 싶은 선물은 휴식. 

쉬면서 여행을 다니고 싶다.      


하지만 보라는, 그렇게 바라면서도 “그럴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2달 정도 유럽을 여유롭게 둘러보고 싶어요. 소도시 같은 곳도 보면서요. 미국도 가고 싶네요. 하지만 아마 못할 거예요. 그러려면 회사를 그만둬야 하는데, 그렇게 그만두고 여행을 다녀오면 공백 기간을 견디며 취직을 준비해야 하잖아요. 코로나 이후 이직도 더 어려워진 상황인데. 그렇게 생각하면 못 갈 거 같아요. 겁 많고 현실적인 저에게는 너무 큰 모험이거든요.”     


그렇다면 현실적인 범위 내에서 그녀를 숨 쉬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보라는 자전거, 한강, 파란 하늘을 말했다.     


“날씨 좋은 날, 자전거를 타고 한강 변 달리는 걸 좋아해요. 정말 행복해지거든요. 날씨에 기분이 많이 좌우되는 편인데, 바람을 맞으면서 파란 하늘을 보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어요. 맑은 하늘을 정말 좋아하거든요. 그런 날은 하늘 사진을 참 많이 찍어요.”     


보라의 쉼은 현실적이고 소박했다.     


문득 궁금해진다. 좋은 삶이란 뭘까? 

‘워라벨’이 지켜지고, 해외여행을 마음껏 다니면 좋은 삶을 사는 걸까? 혹은 멋진 커리어를 쌓아서 직장 내에서 인정받고, 승승장구하는 삶?      


보라의 답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삶”이었다.      


“지금 좋은 삶을 살고 있는 거 같으냐고 물어보면 솔직히 그렇다고 말하기 어려워요. 얼마 전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고, 아직 그 상실감이 정말 크거든요. 하지만 그래서 더욱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삶이 가장 좋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살게 되길 꿈꾸고요.”     


보라는 꿈이 없다고 했다. 겁이 많다고 했고 자신을 ‘하루하루 살아가는 하루살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실제로 보라의 삶은 얼핏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삶의 표피 위로 보이는 워라벨, 칼퇴, 여행 같은 단어들만 본다면.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결코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올해 목표를 ‘노후를 제대로 고민해 보는 것’이라고 말하는 모습을 본다면.

‘앞으로 직장생활을 몇 년이나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사정을 알게 된다면.

‘죽을 만큼 힘들어도 충동적인 결정을 내리지 않고 버텨내는 모습’을 본다면.

헤어지지 않을, 평생의 반려자를 만나고 싶다는 마음을 안다면.

어떤 마음으로 ‘가정’을 바라는지 그 소망을 알게 된다면.

비에 젖은 우산 아래서 기분 좋은 파란 하늘을 기다리는 단단하고 간절한 눈을 본다면.     





보라를 만난 날. 카페 밖으로는 오랫동안 비가 내렸다. 긴 장우산을 가져온 보라는 인터뷰 중 문득 창밖을 보다, ‘오늘은 자전거 타기 어렵겠네요’라며 아쉬워했다.

     

인터뷰를 마친 뒤, 우리는 같은 방향으로 함께 걸었다. 그렇게 몇 분 지났을까. 조금씩 얇아지던 빗줄기가 어느새 멈췄다. 겨우 비가 그쳤지만 여전히 구름이 두껍다. 그 너머 어디 쯤에나 파란 하늘이 있을까? 


우산을 탁탁 털어 접던 보라가 문득 하늘을 바라본다.     


“역시, 이번 금요일에는 퇴근하면 자전거 타고 한강에 가야겠어요.”     


가로등에 하나둘 불이 들어온다. 온 길에 가득한 물기 위로 여름 저녁의 빛이 번진다.      

여전히 두꺼운 비구름 너머로, 보라의 눈은 분명 파란 하늘을 보고 있었다.




이전 06화 온 삶으로 아이들을 돕는 일 - 그게 제 직업입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