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연출가, 예지
내내 장맛비가 내리더니 오랜만에 해가 났다. 비 온 뒤 내리는 여름 햇살은 유독 그 품은 빛이 커서, 순식간에 온 세상의 명도를 환하게 올려 버리는 듯하다. 길 위의 물웅덩이, 나뭇잎에 맺힌 물방울이 반짝거리기 시작하면, 풍경을 눅눅하게 누르던 물기는 그렇게 최고의 조명 판이 된다.
비 온 뒤 맑게 갠 거리에서, 예지를 만났다.
미술에 음악 받고 공연까지!
예지는 자신을 연극 연출가라고 소개했다.
“공연 시놉시스를 쓰고, 대본을 실제로 사람들 앞에 보여주기 위해 공연화 하는 사람입니다. 배우라는 재료로 사람들에게 보여줄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예지는 원래 미술을 했다. 고등학교도 예고로 다녔다. 미술, 회화 쪽을 공부하며 서양화를 그렸다. 이후 미대로 진학했고, 조소를 전공했다.
“저 연필 소묘를 정말 잘해요. 잘하는 사람 중에서도 잘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미술 가르치는 것도 잘하고요.”
그렇게 말해놓고 예지가 씩 웃는다. 그 미소에서 자신의 미술 세계, 그리고 그 안에서 쌓아 올린 시간에 대한 자부심이 엿보인다.
그렇다면 예지는 어쩌다 연극의 길에 들어섰을까?
“원래 음악에도 관심이 많았어요. 그래서 프로듀싱 팀, 작곡 팀에 속해있기도 했고요. 고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들과 같이 프로듀싱도 하고 앨범도 냈었죠. 그런데 학교에서는 미술, 학교 밖에서는 음악 작업을 병행하니 힘들더라고요. 완전히 다른 두 가지를 동시에 하려니 머리가 아팠어요.”
그런 예지의 앞에 연극이 나타났다.
“둘 다 너무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다가 공연이 떠올랐어요. 생각해 보니 무대 위에는 글, 춤, 연기, 노래, 영상 등 모든 게 올라가더라고요. 그때 공연이 제가 원하는 분야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공연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술에 대한 넓은 흥미와 다양한 재능 사이에서 고민하던 예지는 그렇게 공연, 무대, 연극이라는 세계를 바라보게 됐다.
할 수 있는 것부터 꾸준히, 계속, 당장
일단 마음이 정해진 뒤 예지의 행보는 거침없었다.
“저는 일단 해버리는 타입이거든요. 당시 제가 대학생이었는데 학생 신분으로는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더라고요. 아마추어 느낌이라도 없애려면 우선 대학을 졸업해야 했어요.”
뭘 하려고 해도 우선 졸업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졸업하기 전까지는 어떻게 해야 할까?
예지는 그 시간을 그냥 두지 않았다.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극을 써보는 거죠. 먼저 마음을 뒀던 건 연출이지만 꼭 전업으로만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생각보다 서로의 영역에 도전하는 작가와 연출가들도 많거든요. 써보니 생각보다 글이 잘 맞더라고요. 그래서 열심히 썼고, 계속 썼습니다.”
예지는 꾸준히 극을 써 내려갔다. 어떤 건 30분 만에 나오기도 했고, 어떤 건 1년 넘게도 썼다.
그렇게 극을 배워갔다.
“너무 배우고 싶었는데 가르쳐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어요. 인터넷을 뒤져도 가르쳐주는 곳이 없고, 저는 비전공자라 아는 것도 없고 인맥도 없잖아요. 그러니 그냥 무작정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말 많이 노력했어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수없이 극을 써 내려가던 예지는 결국 연극을 제작하는 데에 이른다. 공연장, 배우, 스텝을 섭외했다. 제작비용은 장학금을 때려 박아 마련했다.
연극 쪽 사람들이 모이는 커뮤니티에 프로젝트 이름과 연극 이름을 올렸다.
<필요한 배우>
여자 0명, 나이 대략 00살쯤
남자 0명, 나이 00 정도
오디션도 봤다.
“오디션 보는 게 정말 힘든 건데 저는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했어요. 다행히, 알게 된 연극인 한 분이 도와주셔서 같이 볼 수 있었어요. 아마 오디션 보러 온 배우들도 큰 기대는 없으셨을 거예요. 듣도 보도 못한 극단의 처음 보는 연출자가 생소한 작품을 한다고 하니까요. 배우들이 저 처음 봤을 때 아마 ‘얘를 뭘 믿고 연기하지’ 싶으셨을 거예요. 그래도 다행히 ‘고생 좀 하고’ 무사히 첫 작품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렇게 첫 번째 연극이 만들어졌다. <탄생불>이었다.
“그때 제가 진짜 막무가내로 들이댄 거라고밖에 할 수 없어요. 비전공자에 인맥도 경험도 전무한 상태였거든요. 오히려 그렇게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서 더 무대뽀로 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몇 년 전에는 10분짜리 단막극에 조연출로 참여하기도 했다.
“제가 보기에는 아주 어설펐는데, 그때 올린 걸 좋게 봐주신 분들이 생각보다 많았어요. 그중 한 분이 지금 제가 속해있는 극단 <가교>의 대표님이세요. 작년에 연출, 작가님들과 모여서 서로의 글을 읽고 고치는 워크숍에 자주 참여했었는데, 그때 대표님을 만나고 단원으로 들어가게 됐어요. 거기서 단막극 조연출로 참여하게 됐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작점에서 당장 갈 수 있는 방향으로 꾸준히 걸었더니, 어느새 예지는 원하던 세계에 들어와 있었다.
현실과 꿈 사이, 직업으로서의 연극
연극을 연출하고 극을 쓰는 일은 직업으로서 어떨까?
예지는 “완전 별로”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직업으로서 경제적인 면을 보면 영 아닌 것 같아요. 진짜 어렵거든요. 하지만 발전하고 자아를 실현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정말 좋은 업일 겁니다. 그래서 계속하게 되는 거 같아요.”
그렇다면 예지는 경제적 필요를 어떻게 충족할까?
예지가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멋진 세계, 미술을 통해서다.
“스무 살 때부터 미술 학원 강사를 해왔어요. 지금까지 꾸준히 하고 있는데 요즘에는 학교 시간 강사로도 나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돈을 벌어요. 사실 전문성만 따지면 제 미술 쪽 커리어가 훨씬 전문적이죠.”
계약서를 쓰고, 얼마만큼 일하면 되는지 정해져 있고, 어느 정도 보장된 급여를 받는다. 예지는 직업으로서는 연극 연출보다 미술 교육이 낫다며 웃었다.
“나름 커리어가 쌓여서 급여가 올라가는 걸 보면 보람을 느끼기도 해요. 아이들을 가르치는 걸 ‘엄청 좋아한다’고 까지 말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르쳐준 내용을 바탕으로 발전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뿌듯하거든요.”
이렇게 안정되고, 잘하고, 인정받는 길을 두고도 예지의 눈은 여전히 연극으로 향한다.
“돈이 많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그러면 작품 시기도, 어떤 사람들과 할지도 쉽게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거든요. 저 사람이 이 역할에, 이 디자인에 꼭 필요한데 돈이 없으면 그 사람을 쓸 수 없잖아요. 그래서 돈이 부족하면 작품 질이 떨어지기도 해요.”
극을 하나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인력이 필요하다. 배우와 연출을 제외하고도 무대 제작 감독, 무대 감독, 디자이너, 조명 감독, 각 감독들을 따라오는 보조 인원들, 조명 오퍼와 음향 오퍼, 홍보 담당 등 수많은 사람이 일한다.
“그러니 돈이 많으면 좋겠어요. 저는 앞으로도 이 일을 계속하고 싶거든요.”
가볍게 웃으며 툭 뱉어내는 말에 깊은 진심이 가득하다.
내일의 날씨는 맑음
여러 재능, 하고 싶은 일과 잘하는 일. 그 사이를 오가며 예지의 삶은 늘 바쁘다.
그래도 별 불만은 없다. 기실, 예지는 그런 바쁜 삶이 오히려 기껍다.
“지금까지 삶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너무 바쁘다’일 지도 몰라요. 주위 사람들에게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도 언제나 ”너 진짜 바쁘게 산다“ 아니면 ”너 진짜 열심히 산다“였거든요. 그런데 저는 그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바쁜 게 좋거든요.”
예지는 일과 자기 계발에 시간을 많이 쓴다고 했다. 그리고 그게 너무 좋다고. 삶의 대부분을 일에 할애하고 있지만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시간이 한 시간 있다면, 이를 아주 잘 쓰는 걸 좋아해요. 계획을 세우는 것도 좋아하고, 늘 그 시간을 어떻게 잘 보낼까 궁리합니다. 그래서 바쁜 게 좋고, 일이 좋아요. 하지만 그게 꼭 돈이나 생산성과 관련될 필요는 없습니다. 가족들과 와인 한잔하는 시간도 참 좋거든요. 그 시간을 최대한 재밌게 보내는 것, 그런 걸 좋아합니다.”
기꺼이 맞이하는 바쁜 삶. 이십 대 초반에는 더 심했다. 꼼꼼히 쓰인 스케줄러에는 30분 단위로 일정이 빼곡했다. 밥 먹는 시간, 자는 시간도 아껴 만들어 낸 시간에는 온갖 할 일이 테트리스처럼 짜여 들어갔다.
그랬던 예지의 요즘 최대 관심사는 ‘여유 있게 살기’. 반전이다.
“어릴 때는 ‘너 잘하고 있어’라는 말을 정말 듣고 싶었어요. 그래서인지 일을 너무 쉬지 않고 해왔던 거 같아요. 지금은 그래도 식사 시간, 수면 시간은 지키려고 노력하는데 그때는 그런 시간도 아깝다고 느꼈고요. 이제는 어느 정도 제 페이스를 유지하고 여유도 가지면서 일하는 법을 알고 싶습니다.”
만약 몇 년 전의 자신에게 말을 전할 수 있다면 ‘좀 쉬라’고 하고 싶다며, 예지가 둥근 눈을 길게 접어 웃는다.
이런 변화 역시 결국은 좋아하는 일을 더 잘, 오래 하기 위함이다.
“좀 장기적으로 이 일을 지속하고 싶다는 꿈이 생겼거든요. 연극 연출과 극을 쓰는 일이 제 직업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그게 무엇이든 직업이 되는 순간, 더는 재미로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게 된다. 또한 ‘계속’해야 하는 방향성이 생긴다. 그렇게 오래, 꾸준히 뛰기 위해서 속도 조절이 필요해졌다.
“어떤 일을 선택했다면 사실 일이 힘들다, 재미있다는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꿈과 목표를 이루기 위해 계속 노력할 뿐이죠. 노력하다 보면 ‘가능성이 있다’는 자기 확신이 들기 시작하고, 거기서 행복감이 찾아옵니다. 꿈과 목표는 그렇게 삶을 활기차게 만드는 거 같아요.”
예지는 그렇게 삶의 방향성과 행복을 이해하고 있었다.
바쁜 게 좋지만, 앞으로 더 많이, 오래 뛰어나가기 위해 오히려 여유를 고민한다는 예지. 앞으로도 그 목표를 향해 계속 걸어가게 될까? 예지는 그럴 거라며 시원하게 웃었다.
“저는 제가 무언가를 계속 만들어 내야 하는 사람이라고 느끼거든요. 그러니 그게 무슨 형태가 되었든 만들어 내는 일을 계속할 거 같아요. 저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고, 힘들수록 이를 기억하며 계속해 나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