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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탐 Oct 21. 2023

흔들려도 되요. 그래도 당신은 결국 버틸 테니까

5년 차 직장인, 연아


적당히 다닐 만합니다


습하고 더운 날이 계속되더니 갑자기 쏟아붓듯이 비가 내리던 날. 공원 근처, 조용한 카페에서 연아를 만났다. 단정한 투피스와 구두, 적당한 핸드백. 눈이 마주쳤다. 조용히 앉아 가만히 차를 마시던 서른 초반의 회사원이 가볍게 웃으며 눈인사한다.     


연아는 5년 차 직장인이다. 한 정부 기관 연구원에 재직 중이다. 학사 전공은 법학. 이후 국제개발학 석사 공부를 했고, 다른 청년들과 비슷하게 눈물과 불안의 취업 준비 기간을 보낸 뒤 이십 대 후반쯤 지금의 직장에 취직했다. 이제 서른넷. 꽤 오랜 시간을 버텼다. 때려치울까 말까 수십 번 고민했지만 어쨌든 여전히 근속 중.      

입사 초 몇 년은 상사와의 마찰이나 동료와의 갈등 같은 소소한 회사 이벤트에 속앓이하며 스트레스로 몸부림쳤지만, 이제는 그럭저럭 무던하고 무난하게 출퇴근하는 삶을 살고 있다.

      

“예전에는 그런 문제들이 저만 겪는 일인 것 같아 속상했는데, 알고 보니 누구나 겪는 거더라고요. 초심자가 겪어내는 과정이라는 걸 알게 되니 마음이 좀 나아졌습니다. 이제는 연차가 어느 정도 쌓인 만큼 예전처럼 스트레스가 심하지는 않아요.”      


회사 그거, 견디다 보니 이제 적당히 견딜 만하다며. 5년 차 직장인이 덤덤히 웃는다.     


물론 연차가 찼다고 회사 생활이 마냥 쉽기만 할 리 없다. 스트레스는 늘 있다. 그럴 때면 연아는 

맛있는 음식을 찾아 먹고 운동한다. 일견 단순해 보이지만 나름 오랜 탐구와 배움 끝에 찾은 해결책이다. 자전거도 타고, 달리기도 하고, 등산도 한다. 때로 기도도 하고. 그러면 몸과 마음의 상태가 좀 나아진다는 걸 학습했다.      


“무언가를 먹고, 몸을 움직이고, 기도하는 건 다 생각을 끊어내는 효과가 있거든요.”     


상황에 익숙해지고 그에 따른 자신의 반응을 적절히 조절하는 것. 직장생활에 익숙해진 어엿한 사회인의 모습이다. 연아는 이제 ‘일’이 자신과 함께 고군분투하는 어떤 존재로 느껴질 정도로 ‘직장인의 삶’에 익숙해졌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원래 삶은 늘 속 터지고 어렵죠


지금이야 어느 정도 편하게 이야기하지만, 사실 연아의 취업 준비 기간과 취업 후 조직에 적응하던 기간은 다른 평범한 사람들의 그것처럼 눈물과 불안, 스트레스로 가득했다.      


“석사 공부를 마치고 직장을 찾을 때, 살면서 가장 불안정하다고 느꼈던 거 같아요. 뭘 해야 할지 모르겠고, 하고 싶다고 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정말 불안하고 무서웠어요.”     


취직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공부한 걸 어떻게 살려야 할지 찾는 것도, 겨우 찾은 길에 머리를 들이미는 것도 믿기지 않을 만큼 어렵고, 막막하고, 답이 없었다. 대체 이걸 어떻게 하는 거야? 아니, 우선 뭘 해야 한다고?     


예상하고 각오했던 것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을 헤매고 기다린 뒤에야, 연아는 겨우 ‘취업 성공’ 딱지를 붙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부터는 또 색다른 종류의 어려움이 연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부도 힘들었는데, 취직도 힘들고, 취직한 뒤에도 또 힘들어야 하다니. 삶은 단 한 순간도 쉬울 생각이 없나 보다.     


“취업 전에는 취업 전대로 힘들었는데, 취업 후에는 또 그 나름의 어려움과 고민이 있더라고요.”      


경력 문제, 이직, 직장 생활, 인간관계 등 온갖 문제가 여기저기서 자기들 멋대로 튀어나왔다. 그리고 대부분은 정답이 없었고. 머리가 터지겠다.     


“취업 준비할 때 나름 계획도 짜고 열심히 노력해도 생각대로 안 될 때가 너무 많았잖아요. 그런데 겨우 취업했더니 또 실상은 생각과 너무 다른 거예요. 결국 문제와 어려움은 늘 있는 거 같아요. 아직도 이런 과정 중에 있습니다.”      


연아는 마음대로 안 되고 속 터지는 상황은 늘 계속된다며 웃었다. 그러니 그때그때 상황에 너무 일희일비할 필요 없는 거 같다고. 그러지 말자고.     


“조금 마음을 가볍게 가지고 도전할 필요가 있습니다. 매번 마주하는 당황스러움과 속상한 일 앞에 마음이 너무 무너지지 않으면 좋겠어요. 이건 저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삶의 단계 단계에서 여러 번 울고, 좌절한 끝에 직장인 연아라는 나무에는 어느새 줄기마다 튼튼한 마디가 생겼다.           






여전히 만들어지는 중입니다


직장인이 된다는 건 그냥 어딘가에서 일하고 돈을 받는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연아의 삶에는 수많은 변화가 찾아왔고, 딱 그만큼 많은 질문이 생겼다.     


나는 왜 여기에 있고, 왜 이 일을 해야 하며, 왜 이런 감정을 느끼고, 왜 견뎌야 하는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이런 물음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 모든 질문은 결국 ‘내가 누구인지’를 묻는 목소리가 되었다.      


대체 나는 누구인가.     


“몇 년 전부터 이 질문을 계속하고 있어요. 답을 찾기 위해 계속 고민 중입니다.”     


나는 누구며, 어떤 사람일까.      


사람들과 웃으며 대화하는 걸 좋아하는 나.

동시에 문득문득 느껴지는 불안정함. 

그리고 높은 불안.     


착실하게 일상의 길을 따라 걸어가는 거 같으면서도 끊임없이 생각하기를 멈출 수 없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시간, 감정 속에서 연아는 끝없이 고민했다. 하지만 결국 답을 알 수 없었다.      


“‘나’에 관해 고민하고 탐구하는 건 요 몇 년 제게 정말 중요한 문제였어요. 그 끝에 알게 된 건, 결국 제가 생각보다 저 자신에 대해 잘 모른다는 거였죠. 조금 알게 됐나 싶으면 또 모르는 모습이 나오고, 또 나오고. 그렇게 하나하나 알아가는 시간이 계속되는 거 같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연아는 자신을 아직 “만들어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결론 내렸다.     


“일상에서 사람들과 마주치고 다양한 일을 겪으면서, 제가 조금씩 영향을 받고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제가 변하고 있음을 느낄 때가 있어요. 그리고 그런 모습이 좋습니다. 현재에 안주하고 싶지 않거든요.”      

그래서 올해는 좀 더 다양한 도전을 해볼 생각이다. 전에는 못하고 안 했던 일들. 생각지도 않았던 것들. 예를 들면, 패들보드 타기 같은 거?      


“이 인터뷰에 응한 것도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누군가에게 제 삶과 생각을 이렇게 정식으로 말해보는 거, 살면서 처음 해보거든요.”     


‘다음에도 또 참여할래요!’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어서 아주 재밌고 뜻깊다며, 연아가 눈을 반짝인다. 





          

삶의 곳곳에 새로운 꿈을 배치하세요


연아는 꿈이나 목표도 중요하지만, 자칫 너무 몰두하거나 매이면 삶을 짓누르는 부담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한때는 꿈이 아주 중요한 무언가라고 생각했어요. 방향을 정하고 그 길을 쭉 따라가는 게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꿈은 작을 수도 있고 다양할 수도 있다는 걸 알아갑니다. 모양도 크기도 다양한 여러 작은 꿈들이 삶의 곳곳에 배치되어 있어야 삶을 살아갈 동력이 된다는 것도요.”     


조금 더 어릴 때 이런 걸 알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연아가 장난스러운 웃음을 짓는다. 그 사이로 진심이 슬쩍 어렸다 사라졌다.     


“만약 십 년 전의 제게 말을 전할 수 있다면, ‘그냥 있는 그대로를 즐기라’고 말해줄 거예요. 이십 대 때 공부와 일, 인간관계 사이에서 수많은 방향으로 고민했는데, 사실 그 모든 게 다 중요하고 옳은 거잖아요. 그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 조차도요. 그러니 그냥 해도 된다고. 잘하고 있다고, 그렇게 스물넷이라는 시간을 즐기면 된다고요.”     


불안하고 어쩔 줄 모르던 때에서 조금 더 자란 어린 어른은 약간의 회한과 그리움을 담아 어린 날의 자신에게 마음을 전했다.


그렇다면 역시 거창한 목표나 꿈은 필요 없는 걸까? 연아는 그건 또 아니라면 잘라 말했다.      


“너무 과하지 말자는 거지, 목표나 꿈을 잘 활용하는 건 삶의 멋진 원동력이 될 수 있어요. 요즘 제 꿈은 좀 더 역량을 갖추고 성숙해져서 주변 사람들과 공동체에 더 많은 기쁨을 불러일으키는 거예요. 꼭 대단한 무언가가 되겠다는 게 아니라 그저 범주를 좀 확장하고 싶달 까요? 행복한 관계를 넓힐 수 있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내 곁의 누군가를 향한 관심


요즘 연아의 관심은 공동체를 향한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주변 사람들과 공동체를 통해 여러 도움을 받으며 살아왔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최근에 종교를 갖게 됐는데, 성당 미사 중에 주변 사람에게 ‘평화의 인사’를 하는 시간이 있더라고요. 성당이라는 공동체에 묶여 있는 낯선 타인에게 인사를 건네는 거죠. 어떤 날은 그렇게 인사를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큰 위로가 됩니다.”     


회사 생활의 답답함, 낯선 타지 생활의 외로움, 답 모를 삶의 문제들 앞에서 연아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그저 자신에게만 몰두하지 않고 상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있다는 걸 배웠다. 평범한 순간에서 찾은 놀라운 발견은 연아의 삶에 새로운 활력이 됐다.     


“더 넓은 공동체에 기여하고 ‘좋은 사회’를 만들자는 말은 확실히 막연해요. 하지만 동시에 아주 멋있는 생각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막연한 노력이 누군가에게 살아갈 힘이 되기도 하죠. 제가 직접 체험했어요. 진심으로, 저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아주 사소해도 좋으니 공동체에 도움이 되는 일. 동시에 당장 실천할 수 있는 일. 그런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연아는 지금 하고 있는 일도 그 일부가 될 수 있음을 알았다.      


“물론 여전히 제 능력이 부족하다고 느낄 때가 있어요. 지금 직업이나 위치에서 오는 한계가 명확하거든요. 공동체에 좋은 영향을 미치겠다는 목표와 잘 부합하도록 이를 보완하기 위해 방법을 찾는 중입니다. 계속 발전하려고 노력해야겠죠.”     


수많은 고민과 물음 끝에 연아는 자신의 현 위치를 ‘끝’이 아닌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발전을 꾀해야 하는 하나의 단계, 더 나아가야 하는 과정이라고.      


“지금을 ‘과정’이라고 인식하니 못 견디게 몰아치던 불안과 스트레스도 좀 낮아지더라고요.”     


연아의 얼굴에서 한결 여유로움이 묻어난다.          






원래 삶은 흔들립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죠


20대 때는 흔들리는 자신이 불안했다. 남들은 뭔가 하나를 정해서 올곧고 무던하게 잘 가는 거 같은데 나는 왜 그 ‘하나’가 없나. 정해진 건 하나도 없고, 이랬다가 저랬다가. 나는 왜 이렇게 휘청거리는가. 왜 늘 그렇게 불안해하는가.     


“한때는 제가 긴 여름풀 같다고 생각했어요. 가냘프고, 휘청거리고. 여름의 후텁지근한 바람이 이리저리 불어 지나갈 때, 매번 반항도 못 하고 흔들리는 풀이 마치 제 모습 같았거든요.”     


어린 연아의 마음에는 늘 이런 생각이 가득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건 잘못된 것도 아니고 나쁘지도 않다는 걸. 오히려 그 불안이 자신을 끊임없이 노력하게 만들었고, 결국 변화를 추구할 수 있는 힘이 되었음을.     


“풀이 엄청 흔들리는 거 같아도 사실 뿌리는 땅에 잘 박고 있고, 성장도 해요. 덥고, 바람 불고, 여름 해는 쨍쨍 뜨겁고 고난의 연속 같지만, 사실 바람 따라 휘청거리는 게 즐거울 때도 있고, 여러 풀들 사이에서 나름 안정감 있는 풀떼기랄까요? 은근히 싱그러운 느낌도 있고요.”     


연아는 “여름 풀떼기가 나름 버티는 힘도 강하고 번식력도 높아서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며, 여름 풀 같은 자신이 나쁘지 않다고 웃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고, 걸어온 길을 긍정하는 모습에서 확실한 자기 확신이 엿보인다.      


“앞으로도 분명 이전에는 겪어보지 못한 힘든 일들이 튀어나올 거예요.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그 누구도 이를 혼자 다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요. 그러니 주변 사람과 함께해야 하고, 그게 정말 소중합니다.”     


연아는 ‘함께하다’는 개념이 꼭 주변 사람뿐만 아니라 공동체, 사회로까지 확대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그게 누구든, 너무 혼자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늘 흔들리고, 늘 고민하니까요. 혼자 다 이겨내고, 해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건 불가능해요. 잘 느끼지 못하지만, 우리는 사회로부터, 공동체로부터 분명 아주 많은 걸 받았습니다. 기억은 다 못해도 우리 모두 그랬을 거예요. 이를 둘러볼 수 있길 바랍니다.”     


삶은 어느 방향으로도 흔들릴 수 있다. 아니, 반드시 흔들릴 거다. 그러나 그 흔들림이 존재와 의미의 뿌리를 뽑아낼 수는 없다. 그 어떤 변화도 결국 당신이라는 존재 자체를 없앨 수는 없다. 연아는 온몸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자신이 지금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사실 다들 잘하고 있는 겁니다. 혹시 결과가 맘에 안 들어도 자신을 부정하지 마세요. 잘하고 있다고 믿고 계속 살아가세요. 아, 나한테 하는 얘기 같네요.”     


     




카페 창밖으로 폭염과 장맛비에 잔뜩 시달린 크고 작은 여름 풀들이 보인다.      


뜨거운 바람에 이리저리 휘던 여름풀은 때로 시들고, 때로 흔들리면서도 끝까지 그 뿌리를 지켰다. 그리고 어느새 풍성해진 몸을 부풀려, 이제 막 자라기 시작한 어린 풀들 위로 그늘을 만든다.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를 향해 뿌리를 길게 얽어 단단히 잡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언젠가 바람이 몹시 불던 날 제 뿌리를 튼튼히 잡아주던 땅과, 같이 뿌리를 얽고 버티며 사투를 벌여주던 이웃들처럼.     


후텁지근한 공기, 뜨거운 햇살, 장맛비. 그리고 계절을 온 몸으로 보여주는 푸른 무리 사이로. 지독한 것 같았던 여름이 사실, 어느새 싱그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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