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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탐 Oct 21. 2023

온 삶으로 아이들을 돕는 일 - 그게  제 직업입니다

시원한 바람 같은 키다리 아저씨, 창균


한여름. 때로 우리는 그런 날을 걷는다.

유독 햇볕이 따갑고, 숨이 턱 막힐 만큼 덥고 습한 날.


조금만 걸어도 온몸에서 땀이 나고, 다리는 금세 지쳐 너무 무겁다. 어디 쉴 곳이 없을까 둘러봐도 그늘 하나 보이지 않고, 답답하고 무거운 마음에 언제 끝날지 모를 뜨거운 길 위를 망연히 바라보게 되는 순간.      


그럴 때 문득,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있다. 그 한 줄기 바람이 얼마나 달고 반가운지. 이마 위 잔뜩 맺힌 땀방울과 땀에 젖어 무거운 옷자락을 훅 훑어주는 그 손길이 마치 마음도 만지는 것 같아서. 어느새 조금 힘이 돌아온 다리를 움직여 다시 삶의 길을 걷는다.     


그런 바람이 있다.          





어린이집 선생님이 되려 했던 언어재활사

창균은 1급 언어재활사다.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거나, 언어나 말에 어려움을 겪는 영유아, 청소년들을 돕는다.      

“언어 발달 지연이 있는 아동들이 더 성장할 수 있도록 언어 중재를 하거나, 언어 재활이 필요한 친구들을 주로 담당하고 있습니다.”      


창균이 원래부터 이 길을 꿈꿨던 건 아니다. 사실, 한창 장래 희망에 관해 고민할 때는 이런 직업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아이들을 좋아해서 어린이집 선생님이 되어볼까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무래도 제 외모가 좀 이질감 있어 보일 것 같아서 고민했죠.”     


어린 시절 나름 진지했던 고민을 떠올리며, 190cm 훌쩍 넘는 건장한 청년이 씨익 웃는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린이집 교사에 자기 외모가 적합할까 아닐까를 고민하던 어린 남학생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자신의 길을 발견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자주 봉사하러 가던 아동 복지 기관이 있었는데, 제가 워낙 아이들을 좋아하니까 사회복지사 선생님께서 아이들을 도울 수 있는 직업으로 언어치료사를 추천하시더라고요. 언어 치료라는 개념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언어 치료로 아이들을 돕겠다고 다짐한 뒤 그는 꾸준히 한 길을 걸었다. 대학에서 언어 치료를 공부했고, 이후 석사 학위도 마쳤다. 언어 치료라는 게 뭔지도 몰랐던 학생은 그렇게 어엿한 언어재활사가 되었고, 어느새 하나의 아동발달센터를 운영하는 센터장이 되었다.          






도움이 필요한 아이를 돕는 일

창균의 일은 높은 전문성을 요한다. 그의 일이 누군가의 삶과 가능성을 다루기 때문이다.     


언어는 한 개인이 삶을 쌓아 올리는 데 꼭 필요한 기둥과도 같다. 환경, 생각, 결정, 관계, 인식 등 삶의 수많은 부분과 대단히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언어 발달이나 활용에 어려움이 생기면 그와 연결된 삶의 수많은 부분이 흔들린다.      


“대부분 아이가 생후 12개월이면 첫 낱말을 산출합니다. 24개월 정도 되면 문장 표현도 하죠. 그런데 30개월, 36개월이 됐는데도 아직 엄마, 아빠밖에 못 하는 아이들이 있어요. 이런 경우 언어 지연일 확률이 높아서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합니다.”     


창균의 센터를 찾는 아이들의 상태는 다양하다.     


단순 언어 지연인 경우, 적절한 재활 수업을 꾸준히 진행한다면 일반적인 생활이 가능할 확률이 높다. 하지만 지적 능력에 문제가 있거나 특정 장애군이 있다면 더 장기적인 관점이 필요하다.     


“‘무발화’라고 해서 표현이 제한적인 친구들이 있습니다. 표현이 어려우니 전달을 잘 못하거나, 자기를 때리고 상대방을 꼬집는 등 문제 행동을 보일 수 있죠. 자폐 스펙트럼을 앓는 아이도 처음에는 무발화인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고기능 자폐의 경우는 말은 잘하더라도 화용언어 생활 규칙을 어려워할 수 있습니다. 드라마 속 우영우 같은 경우는 정말 극소수입니다.”     


창균의 일은 또한 높은 섬세함을 필요로 한다. 그를 찾아오는 아이 한 명, 한 명이 모두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상태를 획일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 처음 아이의 상태를 관찰할 때도 그저 ‘평가’ 단계에서 멈춘다.      


“저는 ‘재활’을 담당하는 재활사이기에 ‘진단’을 내리지 않습니다. 그건 의사의 역할이거든요. 자칫 섣부른 판단이 아이에게 낙인을 찍을 수 있으니, 제가 ‘말할 수 있는 선’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합니다.”     


잘못된 판단 하나가 얼마나 큰 파급효과를 가져올지 감히 예상할 수 없다. 그렇기에 창균은 아이를 판단할 때 극도로 세심히 움직인다.     


그렇게 섬세하고 조심스럽게 돌본 아이 상태가 조금이나마 진전될 때. 창균은 정말 큰 보람을 느낀다.     


“4살 때부터 4년 정도 본 아이가 있었어요. 특정 장애가 있는 건 아니고 언어 발달 지연이 좀 있었습니다. 그 친구가 이번에 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발표회를 할 때 그 아이가 ‘나는 말을 가장 잘해!’라고 발표했다는 거예요. 아이 어머니가 그 이야기를 해주실 때 정말 기뻤습니다. ‘내가 정말로 아이들을 돕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너무 어려운데 또 너무 좋은 일

창균에게 언어 치료는 가장 자신 있는 일이자, 동시에 가장 어려운 일이다.     


“계속 공부해 왔고, 봐온 케이스도 정말 많아요. 거기서 오는 자신감이 있습니다. 잘할 수 있다고도 생각하고요. 하지만 한 번씩 어려운 케이스가 생겨요. 아이들은 다 다르거든요. 성향도 다르고, 장애 중증도도 다르고. 그래서 한 명 한 명이 참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창균의 직업 만족도는 얼마나 될까? 그는 10점 만점에 8점이라고 답했다. 원래도 아이들을 좋아하는데,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도울 수 있다니 이보다 좋을 수 없다는 것.     


“원래는 10점 만점에 10점이었어요. 그런데 아이들을 치료하다 보니, 종종 제 생각만큼 진전이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아무래도 제가 남자 치료사다 보니 좀 중중도가 있는 아이들을 주로 맡아서 더 그런 것 같기도 해요. 물론 예상대로 안 되는 게 당연합니다. 아이들은 모두 다른 존재이니까요. 그래도 제 노력이 부족한가 싶어 마음이 힘들 때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만족도가 조금 낮아졌어요.”      


사실, 재활치료를 한다고 모든 아이가 빠르게 바뀌는 건 아니다. 사실, 진전이 더딘 아이들이 훨씬 더 많다. 그게 애타고 마음 아프다.     


“이런 부분은 저 혼자 해결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매달 전체 회의를 진행해요. 우리 센터에 언어재활사만 있는 게 아니라 감각 통합 선생님, 인지치료사도 계시거든요. 함께 아이에 관해 이야기하고 논의합니다. 제가 못 본 면을 다른 선생님들이 보실 수도 있으니까요. 아내도 언어재활사라 혹시 제가 놓친 게 없는지 같이 의논하며 목표를 조절하고 접근법을 고민합니다.”     


센터에는 창균을 포함한 4명의 언어재활사와 2명의 감각통합 선생님, 그리고 2명의 인지치료사가 근무한다. 그리고 이 모든 인원을 관리하고 센터를 운영하는 건 센터장인 창균이다. 그렇다 보니 창균의 하루는 일로 가득 차 있다. 일의 밀도로 치면 이거야말로 10점 만점에 10점!     


“아내와 함께 있는 시간이 많습니다. 아무래도 출퇴근을 같이하니까요. 그렇다 보니 둘이 거의 일 얘기를 하게 되는 거 같아요. 아내도 일에 열정이 많아서 함께 있을 때면 계속 아이들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어느 순간 우리 이야기가 주로 센터 아이들에 관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삶에 일이 아주 많이 녹아있는 느낌이에요.”      


창균 부부가 삶의 경계가 흐려질 때까지 아이들의 치료에 온 마음을 쏟는 건 재활 중인 아이들과 그 아이의 가족들이 겪고 있을 힘든 시기가 마음 아프기 때문이다.     


“재활을 한다고 해도 아이들 상태가 단기간에 확 좋아지는 게 아니잖아요. 최소 6개월 정도는 수업을 해야 하고, 대부분 더 장기적인 관점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기간은 고스란히 가족들의 부담이 되죠. 내내 비용도 부담하셔야 하고 여러모로 힘드실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면 아이들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하게 됩니다. 솔직히 부담될 때도 있어요.”






가정과 일터 사이의 키다리 아저씨

창균은 종종 자신의 일이 ‘키다리 아저씨’ 같다고 느낀다.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보면 유연석 님이 ‘키다리 아저씨’가 되어 어려운 사람을 꾸준히 돕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걸 보면서 제 일이 그와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이 일도 누군가를 계속 돕는 일이거든요.”     


사실이다. 그동안 아동발달센터의 이 키다리 아저씨는 전문성과 성실함으로 쉼 없이 아이들을 도왔다. 심지어 가정에 돌아가서도 아이들 생각으로 마음을 쉬지 못할 만큼. 그러는 사이 창균의 삶의 추는, 어쩌면 ‘일’을 향해 너무 과하게 치우쳐 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창균의 삶에도 다시 균형을 맞춰야 하는 시간이 찾아왔다. 작년 10월, 아빠가 되었기 때문이다. 일이 전부였던 삶의 추도 자연히 가정을 향해 조금 더 옮겨져야 할 때가 됐다.     


출산 전 그는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지 종종 고민했다.      


“아빠, 가장이 된다는 걸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더라고요. 아이가 생긴 게 정말 기쁘면서도 제가 그 역할을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이 많이 됐습니다.”     


창균은 앞으로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더 배우고, 더 알고, 더 열심히 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첫 아이라 아는 게 거의 없거든요. 아기에 관해 더 많이 알고 배워야 할 것 같아요. 아이와 아내를 생각하면 ‘아, 더 열심히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동시에 또 힘이 납니다.”     


아무래도 이 키다리 아저씨는 ‘덜 열심히’하는 방법을 영 모르는 것 같다. 남을 돕는 일도, 가정을 돌보는 일도 그저 열심히 하려고 달려든다.     


심지어 좌우명도 ‘어제보다 오늘 더 열심히 사는 것’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을 만드는 것’이란다.          






바람의 꿈

그렇다면, 이 키다리 아저씨의 꿈은 뭘까?     


창균의 꿈은 발달 지연 아이들도 잘 적응할 수 있는 사회다. 그리고 이 꿈을 많은 사람이 함께 꾸어주길 바라고 있다.     


“발달 지연 아이들이 우리의 ‘평범한’ 기준에 적응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니 그 아이들이 잘 적응할 수 있게, 사람들의 생각이 조금 더 깨어 있으면 좋겠어요. 아이들을 위하는 마음이 삶 곳곳에 잘 반영되면 좋겠습니다.”     


그는 앞으로 “많은 사람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제 직업 자체가 누군가를 돕는 일이잖아요. 그러니 저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더 많아진다면, 더 좋지 않을까요? 더 많이 도울 수 있으니까요.”     


그보다 더 사적인 소망을 묻는다면 가족과, 특히 부인과 여행을 가는 것이다.     


“센터를 시작한 후 여행을 거의 못 갔어요. 코로나 때 신혼여행으로 아내와 잠깐 제주도에 다녀온 게 마지막이었죠. 아내와 꼭 해외여행을 가보고 싶었는데, 아직 못 갔습니다. 제가 일주일 빠지면 아이들이 일주일 수업을 못 하잖아요. 아이들에게는 정말 중요한 시기일 수 있는데. 그럴 수가 없었어요.”     


이런 이유로 여행은 아직도 꿈으로만 남아있다.

언젠가 이 키다리 청년이 부인과 아이 손을 잡고 해외여행을 다녀오는 날이 올까?     





     

모두 잔뜩 지쳐버린 더운 날. 바람은 부지런히 움직이며 삶의 더위에 지친 사람들을 향해 최선을 다해 자신을 불어 넣었다. 그러다 문득 고민했다. ‘여전히 날씨는 뜨거운데, 내가 불어 내는 바람은 너무 약한 게 아닐까? 나는 잘하고 있는 걸까?’ 하고.     


어쩌면 바람도 조금 지쳤을까?     


열심히 달려온 두 발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섬세한 키다리 바람을 향해, 누군가 말을 건다. 어쩌면 그가 쓸어 주었던 사람들이, 또는 그를 보낸 하늘이.       


“정말 잘하고 있어. 지금까지도 잘 해왔고, 앞으로도 분명 그럴 거야.”

“너는 내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었어.”     


그제야 바람이 웃는다. 조금은 순박하게, 그래서 참 시원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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