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이탈리아 볼로냐 수채화 페스티벌(Bologna, Watercolor Festival)
몰타로 어학연수를 가는 이유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유럽으로 여행이 아주 편리하다는 점입니다.직장인이나 시니어 어학연수의 경우 영어와 여행의 비중이 비슷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그래서 몰타 어학연수 중에 우리나라에서 가기에는 거리가 먼 곳이나 혹은 직항이 없는 나라만 일부러 찾아서 여행을 다녀오는 경우도 더러는 있더라고요. 그런데 말입니다. 생각지도 않게, 계획에도 전혀 없었던 볼로냐(Bologna)를 다녀오게 됐습니다.
+ 거기서 볼로냐가 가깝나? 우리 볼로냐 가는데 올래?
"해경 씨, 몰타에서 볼로냐가 가깝나? 2주 뒤에 볼로냐 가는데 올래요?"
갑자기 걸려온 한국에서 전화 한 통은 생뚱맞게 볼로냐로 오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어, 어, 어디요? ㅂ, 볼 볼로냐요? 갑자기 볼로냐는 왜요? "
해마다 국제 아동도서전이 열리는 '볼로냐'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도시지만 그곳이 정확히 이탈리아 어디쯤에 있는지는 몰랐다. 한 번도 나의 여행지 목록에 있던 도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볼로냐가 몰타에 있는 것도 아닌데 갑자기 볼로냐라니 싶었다. 이건 마치 '서울에서 제주도 올래' 이런 느낌이랄까.
몰타로 오면서 작정을 하고 준비한 것이 있는데 '어반스케치'다. 말로는 또 하나의 취미라고 했지만 욕심 같아서는 제대로 된 그림을 좀 그려보고 싶어서 꾸준히 어반스케치를 배우고 있었다. 코로나 기간 동안 울산에서 지내게 되면서 좀 더 영역을 확장해 보고 싶어서 창원에 있는 교수님께 정통 수채화를 배우러 다녔었다.
교수님이 2022년 볼로냐 수채화 페스티벌에 참여하게 되면서 화실 사람 몇몇이 함께 볼로냐를 방문한다고 했다. 볼로냐에서 수채화 페스티벌이 열리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알았다고 하더라도 내가 수채화 페스티벌에 참석할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생각지도 못했던 볼로냐 수채화 페스티벌이라니 혹했다.
볼로냐가 어디에 있나 구글지도를 확인한 후 해당날짜에 비행기표를 알아보니 몰타에서 약 2시간 정도 소요되고 가격은 왕복 25유로니 원화로 약 35천 원이다. 가끔 저가항공을 아주 싸게 끊을 때 10유로에도 끊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종종 듣긴 했었다. 물론 5월 중순의 볼로냐는 비수기이고 수하물이 없다고 해도 이탈리아 왕복이 35천 원이라니- 서울 부산 KTX 편도 가격보다 싸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몰타에서 살고 있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이렇게 되니 볼로냐를 안 갈 이유가 없다.
그래, 내가 언제 또 볼로냐라는 곳을 가보겠나 싶어 2박 3일의 일정으로 볼로냐로 향했다.
몰타에서 이탈리아 볼로냐로
메마른 몰타와 초록의 볼로냐
몰타는 4월이 지나면 비가 오지 않는 건기가 시작되고 5월이 되면 날씨도 갑자기 더워진다. 모든 식물들이 뜨거운 여름을 견디기 위해 생장을 멈추고 메마르기 시작하고 추수 끝난 가을 들판으로 바뀐다. 그런 몰타를 뒤로 하고 볼로냐에 오니 갑자기 초록 세상이다. 몰타에서 약 세 달의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몰타에서 흐르고 있는 시간에 완전히 스며들었다.
볼로냐의 첫인상은 그저 그랬다. 국제공항이라고 하지만 소규모 공항이었고 특이하다면 공항 안에 까르푸 익스프레스가 있다는 정도. 가장 불편한 점은 공항 안에 유심을 팔지 않는다는 점이다. 몰타 전화번호를 사용하고 있었기에 이탈리에서는 별도의 유심 없이도 자동으로 로밍이 돼야 하는데 전화기를 아무리 껐다가 켜도 로밍이 되지 않았고 전화기는 먹통이 됐다. 유심을 새로 끼워야 일행들과 연락을 할 텐데 공항 안에 유심을 팔지 않으니 식은땀이 줄줄줄. 일단 와이파이가 되는 곳에서 지인들과 연락을 한 후 택시를 타고 수채화 페스티벌이 열리는 곳으로 향했다.
지방 소규모 정도인 볼로냐 국제공항
수채화 페스티벌은 'FICO'라는 곳에서 열렸는데 볼로냐 중심에서 약 10km 정도 떨어져 있었다. FICO에 도착하니 상당한 규모였다. 택시기사가 정문에 내려줬는데 수채화 페스티벌이 열리는 곳은 후문 쪽에 있었고 10분 넘게 걸어서 도착했다.
이동하는 중간에 보니 소를 키우고 있었고 오리도 있었다. 학생들이 견학을 하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도대체 이곳은 뭐 하는 곳인가 싶었는데이탈리아 음식 전용 테마파크의 복합 문화공간이었다. 코엑스 같은 컨벤션센터인데 양재동의 aT 한국농수산식품 유통공사의 역할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소를 키우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이었더 FICO
너무 넓어 자칫 일행들과 못 만나는 게 아닌가 살짝 걱정을 했는데 무사히 교수님을 만났고 한국에서 페스티벌 입장권을 미리 등록해 주신 덕분에 수월하게 입장을 할 수 있었다. 페스티벌 행사는 3일에 걸쳐 이뤄지는데 다양한 행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페스티벌 입장 고고~
+ 작가들의 시연
국제적인 수채화 페스티벌 행사 참석은 처음이라 어떤 행사들이 있는지 궁금했다. 유익했던 행사가 몇 가지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전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작가들의 시연을 현장에서 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어떤 표현 기법을 사용하는지, 어떤 종류의 물감을 사용하는지 등등 현장에서 시연은 보는 것만으로도 유익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눈에 띈 작품은 건축가이면서 작가로 활동하는 사람의 시연이었다. 필요한 부분 외에는 모두 과감하게 생략하는 방식은 내가 제일 어려워하는 부분이어서 정말 유심하게 볼 수밖에 없었다. 건축가라서 그런지 수채화를 그리기 전에 드로잉 작업을 미리 해 놓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작가들의 시연이 끝나고 나면 다들 우르르 몰려나가 직접 질문도 하고 사인도 받고 함께 사진도 찍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외국이라고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초청 작가들은 오전, 오후 매 시간마다 시연을 볼 수 있었는데 어떤 작업인지 모르는 백지상태에서 작가들의 작품을 선입견 없이 보게 되니 오히려 더 좋았다. 아직 생초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나로서는 누구의 작품이 됐던 모든 시연들이 다 공부가 되는 시간이었다.
시연을 마친 작품은 한 곳에서 따로 모아서 전시.
+ 파브리아노 다큐멘터리 상영
작가의 시연 외에도 2개의 다큐멘터리를 봤다. 하나는 종이가 어떻게 유럽에 전파됐고 어떤 과정을 통해 정착을 하게 되었는지를 다룬 것이었고 파브리아노 종이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였다. '종이의 여행'이라는 다큐멘터리는 외국인의 시각에서 '종이'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엿볼 수 있는 시간이어서 흥미 있게 봤다.
두 번째 다큐는 이번 수채화 페스티벌에 스폰서로 참여한 세계적인 제지회사인 파브리아노(Fabriano) 다큐였다. 파브리아노의 수채화지가 만들어지는 공정 하나하나를 모두 담은 다큐였는데 종이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던 나로서는 정말 인상적이었다. 혹자는 파브리아노 홍보 다큐라고 할 정도였지만 'EBS 지식채널'을 보고 있는 느낌이라 유익했다. 마지막 날에는 파브리아노 공장 견학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시간이 안 맞기도 했고, 개인적으로는 파브리아노보다 아르쉬 종이를 더 선호하기에 거기까지는 참석하지 않았다.
+ 전 세계 각국에서 출품한 수채화 그림 전시
전 세계의 수채화 인구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으나 5개 대륙의 각 나라에서 골고루 출품된 작품들도 한자리에서 전시를 하고 있었다. 내가 따라 그려보고 싶은 화풍들도 있었고 추상에 가까운 수채화도 있고, 여하튼 정말로 다양한 스타일의 수채화 작품을 원 없이 봤다. 물론 한국 작가들의 출품한 그림도 있었다.
+ 수채화 재료 판매 부스
수채화 페스티벌에 참석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다양한 수채화 재료를 합리적인 가격에 구매가 가능한 건 큰 장점이다. 사진작가의 경우 필요한 카메라 장비가 있을 경우 카메라 장비 박람회가 열릴 때 구매하면 이득인 것과 마찬가지다.
수채화를 그리는 사람들이라면 다들 익숙한 브랜드의 부스들로 꾸며졌기에 각 부스마다 하루종일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우리나라 수채화 브랜드인 이오이오(EOEO)도 참석을 했는데 불티나게 붓이 팔리고 있었다. 외국 작가 중에 이오이오 붓을 사용해 봤다는 사람도 꽤 있었다. 한동안 외국 브랜드의 붓을 사용하다가 교수님 추천으로 이오이오 붓을 사용해 보니 괜찮아서 나도 이오이오 붓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
우리나라 브랜드 이오이오(EOEO)도 불티나게 팔리는 중
여기저기 둘러보다 보니 아주 특이한 붓이 눈에 띄었다. 러시아 출신의 화가는 신의 이름을 건 붓을 직접 만들었고 판매도 하고 있었다. 세계 각국에서 참석한 작가들도 이 붓의 정체가 궁금했는지 이 붓으로 어떤 표현이 가능한지 굉장히 호기심을 보였다. 심지어는 작품집을 보면서 어떻게 그렸나고 직접적으로 물어보는 작가도 있는데 그걸 또 개의치 않고 흔쾌히 설명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나는 이미 한국에서 넘치도록 물감과 종이를 챙겨 왔기에 구매할 물품은 없을 거로 생각했는데 결국 이 붓은 꼭 한번 쓰보고 싶어서 구매를 했다. 하지만 아직 한 번도 사용을 하지 않고 있다.
작가 자신의 이름을 내건 수채화 붓을 판매하고 있다.
+ 친교의 시간
오후 5시 정도가 되니 얼추 공식적인 일정이 모두 끝난 뒤에는 간단한 칵테일파티와 함께 아이스 브레이킹 시간이 마련됐다. 서로 칵테일 잔을 들고 다니며 자유로운 대화의 시간이 이어진다. 공통점이라곤 딱 하나 '수채화' 뿐이지만 그것 하나면 충분했다. 주위에 있는 몇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토스카나 지방에서 온 사람도 있었고 이탈리아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도 많았다. 무엇보다 이런 시간을 통해 평소에 좋아하는 작가들도 직접 만날 수 있고 꼭 작가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과 어울리고 소통하고 교류하면서 이야기를 나놀 수 있어 정말 좋았다. 그러다가 서로 자신의 나라나 지역으로 초대가 이뤄지기도 했다.
나로선 내 생애 또 언제 수채화 페스티벌을 참석하겠냐 싶어 가벼운 마음으로 경험 삼아 와 본 곳이었는데 전 세계에 수채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하긴, 국제적인 페스티벌인데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한편에서는 오늘 다들 처음 만난 작가들이 국적도 다른데도 불구하고 서로 모여 와인 한 잔을 곁들이며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서로의 작품을 비교하기도 하고 교류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이들이 그린 그림 중 피렌체와 볼로냐를 그린 그림에 유독 눈이 갔다. 이중 터키에서 온 사람이 있어 유난히 친근하게 느껴졌는데 자신이 그린 그림을 선뜻 선물로 건네주었다.
+ 금강산도 식후경
이탈리아 음식 전용 테마파크답게 다양한 이탈리아 음식을 판매하고도 있고 다양한 음식점을 맛볼 수도 있었다. 콜라를 시키니 이곳에만 파는 한정 제품인지는 모르겠으나 이탈리아 국기가 있었다. 가장 특이한 건 이탈리아는 아직 아이스아메리카노가 흔하지 않다는 사실. 아이스아메리카노가 뭔지 모른다는 직원에게 아이스아메리카노 사진을 보여주고 만드는 방법을 설명해 준 끝에 아주 어렵게 아이스아메리카노 커피를 마실 수 있었던 건 두고두고 추억으로 남았다.
+ 그림은 언제 그리나?
페스티벌 마지막 날에는 부스마다 엄청난 가격으로 할인해서 판매하는 제품들도 많았고 제품 구매하면 덤으로 주는 사은품이 있었다. 수채화 페스티벌에 참여한 동양인은 우리 팀과 중국인 한 두 명 외에는 거의 없었는데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마지막 날에는 부스 앞을 지나가기만 해도 말을 걸면서 사은품을 잔뜩 안겨주었다.
이틀 동안 참여했던 페스티벌이 끝나고 몰타로 돌아왔을 때는 빈 가방이 수채화 재료와 한국에서 주신 음식들로 꽉꽉 찼다. 교수님은 몰타에서도 그림을 많이 그리라며 특별히 내 이름 새겨진 붓을 선물해 주셨고 지인들은 자신들이 받은 사은품까지도 모두 내게 안겨주고 떠났다. 먼 타국에서 늦은 나이에 공부한다고 이것저것 일부러 챙겨 온 물건들에 담긴 그들의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
몰타에서 그림은 얼마나 그렸나 궁금할 텐데 그 이야기는 따로 풀어보도록 하겠다.
수채화 페스티벌이 끝나고 나니 각종 물품이 한가득
교수님이 수채화 페스티벌로 나를 부른 건 실은 '통역'이 필요해서였다. 이때가 프리인터미디어트에 올라가고 약 8 주차 정도 되는 시점이었기에 통역을 할 정도의 실력은 아니라서 통역은 극구 사양했지만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된다고 해서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이었다.
다행히 수채화 페스티벌 담당자를 만나 교수님이 전하고자 하는 내용은 다 전달을 했다. 게다가 다큐 상영도, 작가들의 시연도, 칵테일파티도 그렇고 완벽하게 알아듣지는 않아도 대체로는 다 이해가 가능했고 말을 하는 데는 크게 어려움이 없어서 영어가 늘긴 늘었구나 싶어 영어 실력을 확인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수채화 페스티벌에 참여하느라 이틀 동안 수업에 빠졌는데 어학원 수업시간보다 더 많은 영어를 사용하게 되니 나에겐 훌륭한 현장학습이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