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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작가 정해경 Oct 11. 2023

몰타어학연수,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는 없다

몰타어학연수 제3장 #23 어학연수의 본질

 50대에 어학연수는 핑계고   


제3장 인터미디어트 몰타  

# 23 어학연수는 어학연수



+ 처음에는 가능할 줄 알았다.

처음 몰타로 어학연수를 결정할 때는 가장 우선순위에 둔 것은 당연히 '영어'였다. 하지만 단지 '영어'만이 목적이었다면 몰타를 선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몰타는 아직 우리나라에 덜 알려진 여행지라 내 인생에서 아주 특별한 여행지가 될 예정인 몰타이니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겨 놓고 싶었다. 십 년 전 내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느꼈던 모든 기록을 남겼던 것처럼 말이다.   


사진 장비를 새로 세팅했다.  

대략 10개월 동안 몰타와 런던에서 살 예정이라 카메라 장비도 다시 세팅했다. 통상 해외 출장이라면 DLSR 바디와 렌즈(단렌즈, 망원렌즈, 줌렌즈) 등을 모두 챙겼을 테지만 공부도 해야 하는 상황이니 사진만 찍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무겁고 불편한 전문가용 장비 대신 편하게 가지고 다니면서 막 찍어도 어느 정도 퀄리티가 보장되는 하이엔드 카메라로 준비했다. 해외에서 카메라가 고장 나서 고치지도 못하고 새로 샀던 적이 있었기에 만약을 대비해 여분의 카메라까지 한 대 더 준비했다. 전문가용 카메라 장비를 빼는 대신 영상 장비를 추가했다. 오즈포와 포켓 마이크, 그리고 몰타가 지중해이니 바닷속 영상도 찍고 싶어서 방수장비까지 챙겼다.


직업의 노하우를 십분 발휘해 사진도 찍고, 영상도 찍고, 글도 쓰고... 몰타에 있는 동안 일상에서 일어나는 매일을 기록하겠다 생각했다.  여행작가인 내가 늘 하는 일이니 어려운 것이 있겠나 싶었다.

몰타에 가지고 간 카메라 장비들


또 하나, 그림 배우기

여행작가이면서 사진작가이기도 한 나는 지난 몇 년간은 사진보다는 '어반스케치'에 더 집중했다. 어반스케치는 수채화의 일종으로 현장에서 2~3시간 안에 채색까지 빠르게 그리는 그림인데 어반스케치가 가지고 있는 아날로그적인 느낌이 정말 좋았다. 취미 삼아 시작했던 그림은 잘 그리지는 못해도 언젠가부터 사진을 대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림을 그리는 일이 좋았다.


코로나로 인해 어학연수가 갑자기 2년이나 미뤄지게 됐고 이렇게 된 거 그림이나 제대로 배워보자 싶었다. 다소 가볍게 느껴지는 어반스케치도 좋았지만 정통 수채화의 느낌을 그림에 좀 담아 보고 싶어 정통수채화를 배웠다. 1년 정도면 어느 정도 실력이 늘지 않을까 생각했던 건 오산이었다. 그림이라는 게, 특히 수채화는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하는 작업이었다. 어차피 정통 수채화를 그릴 것은 아니기에 몰타로 가는 날까지 최대한 노력해 보자는 마음으로 틈틈이 몰타의 랜드마크들을 연습 삼아 그렸다.

내가 그렸던 몰타의 랜드 마크 발레타, 마샬셜록, 임디나


수채화 도구 챙기기  

몰타에서 사진도 찍겠지만 그림도 그려야 하니 그림도구도 살뜰히 준비했다. 수채화 종이 약 50장, 수채화 패드 2권, 브랜드가 다른 물감 3종류, 각종 붓들까지 챙기니 수하물 큰 캐리어 2개는 어림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메라 장비와 수채화 도구는 하나도 빼지 않고 모두 챙겼다.


종이 무게가 꽤 나가는 편이라 수화물 무게 때문에 수채화 패드를 넣었다 뺐다 하면서 고민을 좀 했다. 간단하게 당장 쓸 것만 조금 들고 가고 몰타에서 살까 생각도 했다. 한국에서 몰타로 출발 전 구글지도를 확인했더니 몰타에 화방은 총 3개가 있었지만 규모가 크지 않고 내가 원하는 수채화지가 있을지, 물감은 있을지, 무엇보다 가격이 얼마일지 알 수가 없으니 무겁더라도 다 가지고 가야 했다.


10개월에 4계절이 모두 있으니 가뜩이나 짐이 너무 많아서 미칠 지경이었는데 카메라 장비에 수채화 도구까지 챙기려니 짐이 어마어마했다. 어학연수 짐을 사면서 이번 생 미니멀리스트는 폭망이라고 몇 번을 되뇌었지만 모험을 할 수는 없었다. 그만큼 그림에 진심이었다.


영어 공부도 하고, 여행도 다니며 사진도 찍고, 그림도 그리고, 영상 찍어 유튜브에도 올리고, 글도 쓰고 ,,,,,


부푼 꿈을 안고 몰타로 날아왔다.

한국에서 챙겨간 수채화 도구


+ 몰타 화방

몰타에 오자마자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화방이었다. 슬리에마 중심가로 이어지는 골목에 화방이 2개가 있었기에 집에서 멀지 않아 다행이었다. 몰타에서 화방을 가 보니 너무 바보 같았다. 내가 주로 사용하는 독일 브랜드 쉬민케 물감도 있고 새로 추가한 이탈리아 브랜드인 시넬리에까지... 붓도 다 있다.. 게다가 수채화 용지도 종류도 다양했다. 가격의 경우 환율 적용해도 한국과 큰 차이가 없었다. 굳이 수하물 초과하면서 가져올 일이 아니었다고 뒤늦게 후회를 했다. 하긴 몰타에도 화가가 있고 나와 비슷한 종류의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도 수두룩한데 내가 몰타를 너무 얕봤다. 몰타 미안.

몰타 화방, 다 있다... 굳이 들고 올 필요가 없다.


물감 중 아직 우리나라에는 없는 브랜드가 눈에 띄었다. 조색이 힘든 색깔과 가장 많이 쓰는 울트라마린블루를 테스트 삼아 샀고 드로잉 펜도 하나 샀다. 발색 테스트를 해보니 베네치아라고 적힌 물감들은 색이 너무 쨍해서 내 타입은 아니었다. 재료가 어떤 것으로 만든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시넬리에처럼 끈적끈적한 것도 특이했다.

gk
너무 쩅한 색감


이것저것 필요한 것이 있어 우연히 플라잉 타이거 코펜하겐에 들렀는데 화방이 아니어도 드로잉 북, 수채화 저널지 등 가볍게 쓰기 좋은 수채화 도구들이 수두룩 했다... 아놔... 여행 초보도 아니고 정말 내 꾀에 내가 속았다.

문구류 코너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는 수채화 관련 도구들


+ 정작 그림은 하나도 못 그렸다.

한국에서부터 수채화 도구들을 다 챙겨 왔으면 하루에 한 장씩 그림을 그려도 모자랄 텐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몰타에서도, 런던에서도 정작 그림은 한 장도 못 그렸다. 처음 한 달 정도는 몰타 생활에 적응하느라 그림 그릴 시간을 내지 못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몰타 생활에 적응을 하고 나니 여유로운 몰타 생활을 즐기게 됐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림을 그릴 여유는 없었다.


초보에 가까운 그림 실력은 B5 한 장을 그리는데도 3~4시간은 꼬박 걸릴 정도로 집중을 해야 하는데 나의 에너지는 몽땅 영어가 가져가 버렸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영어에 들이는 시간과 노력이 상당했기에 체력도, 집중력도 옛날 같지 않았다. 내 나이가 50대라는 걸 그동안은 잊고 살았는데 몰타에서 매일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영어에 모두 소진한 집중력은 다른 활동을 허락하지 않는 나이라는 걸 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림에 대한 부채감은 점점 심해졌고 그림을 한 장도 그리지도 못할 거면서 20kg에 달하는 그림 재료들을 챙겨 온 내가 너무 한심했다. 이러고 있는 와중에 볼로냐에 수채화 페스티벌이 있어서 잠시 이탈리아를 다녀왔다. 한국에서 날아온 교수님과 지인들은 내 열정을 알고 있었기에 수채화 재료들을 선물로 주고 갔다. 페스티벌의 이런저런 사은품까지 몰타로 돌아왔다. 안 그래도 손도 대지 않고 있는 수채화 재료인데 짐만 더 늘었다.  

볼로냐 페스티벌 이후 더 늘어난 나의 수채화 재료들


+ 한 번도 사용 못한 방수 장비

그림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지중해 바다도 촬영하고 싶어서 간단하지만 오즈모 포켓에 방수캡까지 준비를 해왔는데 수중장비와 마이크는 한번 사용해보지도 못했다. 5월 말 수영이 가능해지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느닷없이 젤리피쉬에 쏘이는 통에 수영을 몇 번 하지도 못했고 이런저런 이유로 몰타를 두 달여 일찍 떠나게 됐기 때문이었다. 한 번도 사용하지 못할 장비들을 왜 들고 왔을까 애꿎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번 생에 미니멀리스트는 그렇게 완전히 내게서 멀어졌다.


무엇보다 몰타에 관한 사진과 영상을 찍고 외장하드에 옮겨 놓기만 할 뿐 결과물을 확인할 여유가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찍어 놓은 사진과 영상을 확인하는 데도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리는데 결과물 확인도 못 하니 글을 쓰기는커녕, 동영상 편집은 언감생심이었다.


몰타에서 '영어 공부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유튜브도 하고, 글도 쓰고'를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한국에서도 하는 일이고 여행지에서도 늘 하는 일이기 때문에 많이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처음에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영상편집은 못해도 일주일에 한 개 정도는 브런치에 글을 썼다. 하지만, 어학연수가 조금씩 진행되니 내가 생각했던 것을 다 하기에 불가능하다는 걸 느끼는 데는 채 한 달이 걸리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나의 몰타 생활은 영어 공부만으로도 하루가 빠르게 지나갔다. 대학생의 경우 '외국인들과 어울려 놀면서 영어가 늘었어요'라는 말을 종종 듣기도 했는데 막상 뒤늦게 영어 공부를 해보니 영어 기초와 어휘가 너무 부족한 나에게 해당되는 말은 아니었다.


그러니 영어 공부 하면서 어학원에서 만난 친구들과 함께 몰타를 여행하는 것 정도까지가 내게는 최선이었다. 오죽하면 초반과 달리 매일매일 쓰던 일기도 점점 뜸해졌다. 영어 공부에 다른 것까지 하기 위해서는 24시간도 모자랄 지경이었고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데 현실이 따라주지 않으니 시간이 흐를수록 내적갈등은 점점 심해졌다. 몰타에서 하루하루는 느긋하고 여유롭게 지나가는 데 영어를 제외하면 다른 일을 할 마음의 여유는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 두 마리 토끼 잡을 수 있을까?

두 달 정도가 지났을 즈음 50대 중반의 나이에 4주 단기 연수를 온 여자분이 있었다. 젊은 시절 못 해본 어학연수가 평생의 꿈이었기에 자녀들이 다 독립을 하자마자 남편을 설득했고 결혼 후 처음으로 오롯이 자신을 위해 한 달이란 시간을 선물 받았다고 했다.


그녀에게 물었다.  


"영어 공부 할만하세요?"


"아유~ 공부 안 해요. 이 나이에 영어 공부하려니 공부만 줄창해도 조금 영어가 진전이 있을까 말까 싶더라고요. 4주 동안 공부만 하다가 가기에는 너무 아까우니 저는 4주 동안 신나게 놀다 갈 거예요. 그래도 어학원 생활은 정말 즐거워요. 외국인 친구들도 좋고요. 여행이었다면 결코 해보지 못할 경험을 어학연수를 하게 되니 특별하네요. "


그녀의 쿨한 대답에 머리가 띵했다. 영어 레벨이 업그레이드될수록 공부를 해야 하는 양이 점점 늘어났다. 의자에 앉아 있는 시간은 점점 길어지는데 영어가 늘지 않으니 영어는 영어 대로, 그림도 글도 제대로 못하고 있으니 그것은 그것대로 스트레스가 쌓이던 중이었는데 그녀의 심플한 대답에 외려 내가 당황했다.


방구석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수채화 재료들과 카메라 장비를 보고 있자니 갑갑했다. 다시 오지 않을 2022년 10개월 동안 다른 건 다 제쳐두고 영어 공부에 집중할 것인가 아니면 어학원 대충 다니고 그림도 그리고 유튜브 편집도 하고 글도 쓰면서 본업에 충실할 것인가?


비싼 돈과 시간을 들여 큰 결심으로 떠나온 몰타이니 이왕이면 영어 공부도 하고 여행작가로서의 소기의 목적도 달성해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싶었다. 하나, 이상과 현실은 달랐다. 어느 쪽이 최선의 선택일까 보다 어느 쪽이 후회를 덜 남길 것인가에 초점을 맞췄다. 고민의 시늉만 하고 있을 뿐 사실은 이미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이었다. 후자였다면 어학연수가 아니라 10개월 동안 세계여행을 선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었지만 내 마음이 그걸 놓지 못하고 있었을 뿐.


저마다 영어와 휴양을 목적으로 몰타를 어학연수지를 선택한다. 나도 그랬고. 하지만 모든 공부가 그렇듯, 영어 공부에서 적당히는 없었다. 여행으로 몰타로 다시 올 수는 있겠지만 공부는 지금도 늦었는데 더 늦으면 더 힘들 것이기에 '영어 공부'에 집중하기로 했다. 내가 언제 또 이렇게 공부를 열심히 해 보겠는가 하는 마음이 컸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진짜 늦은 거라는 뼈 때리는 개그맨 박명수 씨의 말이 이상하게 더 용기가 났다.


공부에는 다 때가 있다고 했지만 나에게 그때는 바로 지금이다.  


한 장도 못 그린 그림과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카메라 장비는 미련 없이 박스에 넣어 닫았다. 내가 그리지 못한 그림은 누군가가 그린 그림을 한참 쳐다보는 것으로 대리만족을 해야 했지만 아쉽지 않았다. 학창 시절을 통틀어서 했던 공부보다 더 열심히 공부를 했기에 아무런 아쉬움이 없다. 그렇다고 영어가 일취월장 원어민 수준으로 올라간 것은 아니어도 도전해 봤으니 그걸로 충분히 만족한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에야 1년 전 몰타에서 찍은 사진들을  찬찬히 본다. '내가 왜 그곳을 안 찍었지?' 하는 것도 많고 사진을 너무 대충 찍은 것 같아 좀 아쉽긴 하지만 괜찮다.


그리고, 나는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언젠가 몰타에서 진짜 휴식하며 그림 그리고 실시간 유튜브 라이브 방송하고 현장에서 생생한 느낌을 글에 닮을 그 날을 기대하며.

다른 사람이 그린 그림으로 대리만족


어학연수가 끝나고 난 뒤 어학연수를 다녀온 다른 이들에게도 물었다. 그들의 대답 역시 인터미디어트, 어퍼 인터미디어트 레벨로 올라가니 제대로 공부하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나의 경험이다. 어떤 것을 선택하고 어떤 것에 집중하느냐는 그대의 몫.



+ 다음 이야기 : 몰타 헤리티지 도장 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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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에 어학연수는 핑계고' 1장과 2장은 브런치북에서 볼 수 있습니다.



50대에 어학연수는 핑계고, 런던 

https://brunch.co.kr/brunchbook/life-of-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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