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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작가 정해경 Oct 10. 2023

몰타여행 몰타 선사시대 출토 유물은 다 어디에 있을까

몰타어학연수 제3장 #22 발레타(8)고고학 박물관, 프랑스 기사단숙소

0대에 어학연수는 핑계고   


제3장 인터미디어트 몰타  

#22 발레타(8) 중세 성요한 기사단의 숙소였던  몰타 고고학박물관




도대체 출토된 유물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몇 군데 거석 신전군에서도, 할 사플리니 지하무덤에서도 출토된 유물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간간히 모조품이 놓여 있긴 했지만 출토된 유물이 전혀 없으니 현장에서 볼 수 있는 건 돌이 전부다. 관람객의 입장에서는 신석기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남은 곳을 직접 눈으로 보는 것도 의미가 있긴 하지만 출토 유물이 없으니 본 것은 맞으나 안 본 것이니 비싼 입장료를 내고 간 것에 다소 볼멘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출토유물은 어디를 가야 볼 수 있을까? 신석기시대 유적지에서 발굴한 유물들은 국립 고고학박물관(National Museum of Archaeology)에서 모두 볼 수 있다.

몰타 고고학 박물관에서  유물을 관람하고 있는 사람들


+ 몰타 국립 고고학 박물관은 중세 성요한 기사단 프로방스 기사단의 숙소


몰타 고고학 박물관은 발레타의 메인도로인 퍼블릭 스트리트(Public street)에 있다. 시티게이트를 들어서면 본격적인 발레타 여행이 시작되는데 입구 오른쪽의 국회의사당을 지나 조금 걷다 보면 화려한 바로크 양식의 건물이 몰타 국립고고학 박물관이다. 박물관이라고 하기엔 건물이 지나칠 정도로 화려하고 웅장함마저 느껴지는 곳인데 이곳은 원래 박물관이 아니었다.


성요한 기사단이 몰타를 지배하던 시절인 1571년에 오베르주 드 프로방스(Auberge de Provence), 즉 프랑스 기사단을 위해 지은 건물이다. 성요한 기사단은 8개 출신지역으로 구성이 됐는데 그중 가장 힘이 강했던 기사단은 프로방스 기사단이었다. 몰타 수도의 이름인 발레타는 그랜드 마스터였던 '발레타(Jean Parisot de Valett) e'의 이름을 붙였는데 그가 바로 프로방스 기사단 출신이다. 그랬기에 오베르주 드 프로방스는 메인 스트리트에서 가장 좋은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성요한 기사단의 건물이었던 곳이 국립고고학박물관으로 되기까지 450년의 역사가 이곳에 녹아 있다.    


처음 지어질 당시에는 전쟁을 대비해야 했기 때문에 건물 안에 안뜰과 빵집, 노새 또는 방앗간, 지하실, 저장실 및 마구간과 같은 기타 편의 시설이 있어 자급자족이 가능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전쟁의 위험이 사라지자 드넓었던 공간은 성요한 기사단 교단에서 이익을 위해 정원 등 부지를 팔면서 규모가 조금씩 줄어들게 된다.


다양한 사교의 장이었던 곳은 프랑스가 지배했을 때는 군인들이 거주하기 위한 아프트로 개조가 되기도 했었다. 이후 영국이 지배했을 때는 영국 장교의 막사로도, 상업 시설로도 사용되기도 하면서 부지를 계속 팔았고 지금의 규모로 줄어들었다. 몰타 유니언 클럽(Malta Union Club)이 창립되면서 한동안 사교클럽으로 사용되다가 임대가 끝난 국립 고고학 박물관으로 개관했다.

발레타 리퍼블릭 스트리트에 있는 국립 고고학박물관은 프로방스 기사단을 위한 건물로 지어졌다.


1571년에 지어진 오베르주는 1638년에 건축가 Mederico Blondel의 대대적인 개조 공사가 있었고 450여 년이 지나는 동안 다양한 용도로 건물이 사용되면서 원래의 모습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2층의  그랜드 살롱(Grand Salon)만은 그 분위기를 엿볼 수 있었다. 성요한 기사단 시절 식사와 연회장이었던 곳은 영국 통치하에서도 행정부 상층부를 위한 연회장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림은 영국 지배시절에 그려진 것 같다고 하는데 분위기는 기사단 시절의 느낌이 여전했다.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2층의 그랜드 살롱
성요한 기사단의 그려진 천장 패널

 

+ 7000년 몰타 역사를 아우르는 국립 고고학박물관,

국립 고고학 박물관은 처음 개관 당시에는 1층은 고고학 컬렉션이, 2층은 미술품이 있었는데 현대미술관인 무자(MUZA, Museum of Fine Arts) 개관 후 미술품들은 모두 이전했고 현재는 오롯이 고고학 박물관으로만 사용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몰타의 신석기시대(기원전 5200~2500년)부터 페니키아 시대(기원전 8~6세기)까지 다양한 유적을 볼 수 있다.  


1층은 신석기시대인 거석신전군과 할 사플리니에서 출토된 유물이, 2층은 청동기와 페니키아 시대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에 가장 주목을 끌고 있는 유물은 1층 할 사플리니 하이포지움(Hal Saflieni Hypogeum)에서 출토된 '잠자는 여인(The sleeping lady)'이다.

총 3개 층의 구조에 약 10m를 파내려 간 할 사플리니는 기원전 4천 년에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오라클챔버에서 출토된 잠자는 여인


붉은 염료로 천장에 그림을 그린 오라클챔버(Oracle Chamber)에서 출토된 잠자는 여인몰타 선사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이다.  하반신에 치마만 입고 있는 잠자는 여성은 달콤한 꿈에 빠져 깊은 잠을 자고 있는 모습인데 섬세한 표현이 엄청났다. 살짝 포갠 듯한 두 다리, 치마의 주름, 뒷 머리카락, 소파의 무늬, 그녀의 육중한 무게로 인해 소파가 휘어진 것까지 너무 사실적이다. 신석기시대에 이런 조각 장식을 했다는 것이 너무 놀랍다. 소파를 사용하고 소파의 무늬까지 그려 놓았는데 당시 시대상을 알 수 있는 유물이라 우리로 치면 거의 국보급 유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360도 다른 각도에서 찬찬히 잠자는 여인을 요모저모 뜯어보고 있는데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조각도 조각이지만 푸근함이 느껴지는 조형미에 더한 묘한 균형미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우리나라도 다양한 신석기 유적이 출토되고 있지만 잠자는 여인과 같은 유물은 본 적이 없었다. 실제로 전 세계를 통틀어 조형적인 독창성과 몰타 문화의 독립성이 반영된 신석기시대 예술 걸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고 했다.


아직까지는 이 여인이 누구인지, 누가 이런 작품을 남겼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이지만 출토된 곳이 지하무덤이라는 걸 생각할 때 '영원 잠' 즉, 죽음을 표현한 것으로 짐작하고 있단다. 우리의 죽음이 이리도 평화로울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는가. 죽음을 바라보며 현재의 삶을 생각하니 죽음은 끝이 아니라 삶의 연속이고 일부분이다.  오늘을 충실하고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라고 '잠자는 여인'이 말을 건넨다.


 할 플리니 하이포지움은 잠자는 여인 외에도 개인 장신구와 관련된 유물이 많이 발견됐다고 하는데 펜던트와 함께 조개 조각, 돌, 동물뼈 등으로 만든 목걸이오 팔찌도 출토가 됐다고 한다.  

죽음은 삶의 또 다른 버전이라고 말을 건네던 잠자는 여인


거석신전이나 할 사플리니 하이포지움을 가기 전에 고고학 박물관을 먼저 보았기에 두 군데를 다녀오고 난 뒤 고고학 박물관을 다시 찾았을 때는 훨씬 이해하기가 쉬웠다.  아무래도 ㄱ접 방문했던 곳들이라 그런지 더 관심 있고 집중력 있게 유물 관람을 할 수 있었다.


현장에서는 거석 신전에서는 전체 모양을 짐작하기도 힘들고 시대상에 따라 어떻게 변화해 갔는지 알기는 어려운데 박물관에서는 시대별로 거석신전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모형으로 전시가 되어 있어 한눈에 파악할 수 있어 좋았다.


시대별로 거석신전이 어떻게 발전했고 거석 신전의 돌을 어떤 식으로 운반했는지 이해를 돕고 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몰타 거석 예술이었다.  

'와, 저걸 수천 년 전에 돌에 새겼다고?'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몰타 거석 예술이었다. 몰타 거석에서 발견되는 모양은 주로 4가지 범주인데 나선형, 각종 동식물의 표현, 추상장식, 움푹 패인 장식이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나라 신석기 기대에 암각에 남겨놓은 모양과 비슷한 것들이 눈에 띈다. 서로 다른 대륙에서 시간도 조금씩은 차이가 있는데 문명은 일정한 속도로, 일정한 방향으로 비슷하게 진화한다는 점은 정말 놀랍다.


하기아 임(Hagar Qim), 므나이드라(Mnajdra), 즈간티아(Ggantija)를 비롯해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된 6개의 석조 사원에서 출토된 다양한 석조 장식품들 중 가장 나중에 지어진  타르젠(Tarxien) 사원의 장식품이다. 가장 나중이라고 해도 기원전 3,000년 전이니 지금으로부터 약 5천 전. 지금도 이런 조각 장식을 한다는 걸 생각하면 엄청나다고 할 수밖에.   

다양한 거석신전에서 출토된 유물


하기아 임에서 출토된 다양한 인물의 인형도 모두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다. 고고학적으로 시대가 다른 신전에 출토된 인형이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도 확인할 수 있으면 더 좋았겠지만 일반적인 관람자 수준 정도의 지식만 있는지라 그냥 크게 훑어봤다. 다만 고고학에 대해 깊은 지식이 없어도 인형들의 모양이 비슷하다는 점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이 조각상이 여자인지, 남자인지 불분명하다고 했는데 다른 것들도 대부분 성별 구분이 모호했다. 어쨌거나 이런 류의 조각상들은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고 있다는 점은 공통이다.


엄청나게 많은 인물상이 출토된 것도 특별한데 더 특이한 건 대부분 목이 없다는 사실이다. 재질이 다른 것으로 만들어졌거나 혹은 목을 끼울 수 있도록 만들어졌기에 얼굴 부분만 교체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에 무게가 실리고 있단다.

다양한 출토 인형들


+ 몰타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을까?

몰타의 역사를 간략히 훑어보면,  기원전 4~5천 년 경 시칠리아에서 배를 타고 가르 달람( Għar Dalam)이라는 동굴에 처음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르 달람 단계에서는 시칠리아 출신의 농업 정착민들이 몰타에 정착했고 말과 가축, 농업이 시작되는 신석기 혁명이 몰타에서도 시작됐다. 빗살무늬 토기들을 비롯해 다양한 다양한 그릇들이 신석기와 청동기 시기까지 출토되고 있는 점은 우리나라와 비슷했다.  

다양한 토기들


할 사플리니 지하무덤도 그렇고 라밧에도 카타콤 즉, 지하무덤이 있다. 지하무덤은 땅에서 수직으로 파내려 가면서 타원형 모양으로 방을 만들고 시신과 함께 다양한 물건들을 함께 묻는 풍습이다. 특히 몰타의 경우 기원전 4100~2500년경까지 계속 지속됐다. 당시 이런 장례 문화는 지중해 중부 전역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매장문화라고 설명하고 있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몰타에도 이집트 파라오와 비슷한 관이 출토됐다는 점이다. 청동기가 지나면 인류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페니키아 인들이 지중해를 장악하게 되는데 페니키아 인들이 몰타로 들어오게 된다. 이들은 시신을 다양한 방법으로 매장했는데 이집트 파라오 무덤에서 볼 수 있는 관과 비슷해서 놀라웠다. 이 유적은 1797년 라바트 측면의 외곽에 있는 가르 바르카(Ghar Barka)에서 발견된 것이라고.


실제로 페니키아 본토에서는 이집트에서 가져온 관을 가지고 와서 다시 사용하기도 했고 영원한 잠을 방해하는 사람을 저주하기 위해 뚜껑에 비문을 썼다고 설명에 적혀 있었다. 페니키아는 지금의 레반토 지역 일대인데  거리상 가까운 이집트의 문화도 비슷한 점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다만, 몰타에도 파라오 무덤 같은 것이 있는 줄은 고고학 박물관에 오지 않았더라면 전혀 몰랐을 것이다.

페니키아 인의 장례문화


발레타에서 한때 가장 유명한 랜드마크였던 프로방스 기사단의 건물을 사용하고 있는 몰타 고고학 박물관은 고고학에 크게 관심이 없다고 하더라도 몰타를 그저 관광지가 아닌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하고 싶다면 꼭 가봐야 할 곳이라는 생각이다.



+ 다음 이야기 :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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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에 어학연수는 핑계고' 1장과 2장은 브런치북에서 볼 수 있습니다.



50대에 어학연수는 핑계고, 런던 

https://brunch.co.kr/brunchbook/life-of-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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