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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작가 정해경 Oct 04. 2023

몰타여행 성엘모요새, 한눈에 보는 몰타 역사

몰타어학연수 제3장 #19 발레타(7) 성엘모요새

50대에 어학연수는 핑계고   


제3장 인터미디어트 몰타  

#19  성엘모요새(Fort St Elmo), 몰타가 우리나라와 관련이 있다고?



+ 몰타의 역사는 지중해 패권의 역사

처음에는 몰타 역사에 대해 1도 관심이 없었다.  이런 작은 나라에 뭐 그리 대단한 역사가 있겠나 싶었던 나의 생각은 막상 몰타에 오니 완전히 바뀌었다.  어쩌면 우리나라에 덜 알려진 나라여서 그 가치를 몰랐다고 하는 게 맞겠다. 몰타에서 어학연수로 살아보니 몰타 주요 스폿들은 대부분 '성요한기사단'과 관련이 있었고 그런 곳은 어김없이 오스만을 막아냈다는 자부심이 넘치고 있었다.


'성요한기사단'은 십자군 전쟁 때 활약했던 기사단 중 하나였다는 것 외에 몰타라는 나라는 어학연수 전까지 나에게 존재감이 전혀 없던 나라였다. '몰타공성전(Great Siege of Malta)'이 뭔지도 몰랐던 나는 '전쟁에서 이긴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인가' 싶기도 했다. 또 한 가지, '오스만 제국'이 유럽 사람들에게 어떤 존재였기에 이 작은 나라에 그날의 영광이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남은 것인지 점점 호기심이 생겼다.


그 호기심에 대한 답은 생각지도 못했던 뜻밖의 장소 '성엘모요새'에서 찾게 됐다.

성엘모요새의 평화로운 바다 너머 직선으로 이어지는 곳에 오스만, 지금의 튀르키예가 위치한다


+ 성엘모요새( Fort St Elmo)

성엘모요새를 한 마디로 정의하는 문구는 이것이다.


Fort st Elmo known as Malta's star Fort, this architectural masterpiece is best known for the starring forle it played during the Great Siege.

몰타의 별 요새로 알려진 성엘모요새(Fort st Elmo)는 대공성전 당시 주연을 맡은 역할로 가장 잘 알려진 건축학적 걸작입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것은 십자가와 코란의 전투다.  -성요한기사단 그랜드마스터 발레트-

 

성안젤로 요새는 원래 감시 초소탑만 있던 곳이었다. 1551년 오스만의 몰타 첫 공격이었던 당시 감시탑이 무용지물이었고 오스만 군대가 고조까지 바로 진격할 수 있었고 고조가 큰 피해를 입었다. 이후 다시 쳐들어 올 오스만 군대에 대비해 감시탑을 허물고 요새를 짓게 된다.  5년 뒤인 1565년 오스만 제국이  몰타를 다시 침공했고(몰타대성전) 성엘모요새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격전지였다. 약 28일간 목숨을 다해 저항했지만 결국 요새는 함락됐다. 대신 쓰리시티즈에 있는 성안젤로요새가 전쟁을 준비하고 유럽 군대가 지원군이 오기까지 시간을 벌어준 덕분에 결과적으로 몰타공성전을 승리를 이끌 수 있었다. 당시 이 전쟁이 얼마나 치열했던지 기사단과 시민들은 모두 전사했고 단 9명만이 그랜더하버를 헤엄처 성안젤로 요새로 피신해 살아남았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몰타대공성전 승리 후 쏟아지는 유럽의 후원금으로 성엘모 요새밖에 없었던 이곳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다. 당시 성요한기사단의 그랜드마스터였던 발레타의 이름이 도시 지명 '발레타'가 됐고 쓰리시티즈 비르구에서 발레타로 수도를 이전했다. 발레타를 건설할 당시 몰타대공선전 때 폐허가 된 성엘모요새를 재건하면서 여러 가지 시설물을 보강해 증축했고 이후 여러 차례 개조가 된다. 최종적으로 영군이 세계 1,2차 대전을 위해 성안젤로요새의 시설을 보강하면서 개조를 했다. 불행히도 세계 제2차 대전 당시 몰타 최초의 공중폭격 장소가 바로 성안젤로 요새였고 이때 심하게 파손됐는데 일부는 지금도 여전히 복구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2009년부터 복원작업을 거쳐 현재는 몰타 국립전쟁박물관(National War Museum)으로 운영되고 있다.

별 모양의 성엘모요새 (이미지 출처= 구글 검색)
성엘모요새 모형도


발레타의 가장 끝 부분에 있는 성엘모요새까지 직선으로 약 1km 남짓, 곧장 걸어도 대략 20분 정도는 걸린다. 뜨거운 여름 내리쬐는 태양을 머리에 이고 걸었으니 관람 시작도 전에 온몸은 땀범벅이다.  성엘모요새는 지중해콘퍼런스센터와 마주 보고 있는데 피아니스트 손열음의 공연을 보러 왔을 때 입구에서 잠깐 보기는 했었다.


성엘모요새 매표소 안으로 들어가니 간단한 기념품 숍도 같이 운영되고 있고 물이나 음료 등도 팔고 있었다. 성엘모요새는 섬의 끝부분에 있기 때문에 가게 등이 없다. 성엘모요새와 지중해콘퍼런스센터를 보기 위해 관광객들이 다니기 때문에 중요 행사가 있을 때는 간단한 푸드트럭  한 두대가 운영하기도 했다. 가끔은 아이스크림 차량이 있기도 했고. 매표를 하고 성엘모요새 안으로 들어서니 바로 건물이 나올 줄 알았는데 한참을 걸어야 했다.


안으로 안으로 걸어가니 이중 성벽에 아치형의 공간이 특이한데 영국군이 몰타를 지배하던 시절에 포와 총을 쓸 수 있는 공간으로 개조한 곳이었다. 바다와 접하고 있는 곳에 외벽을 둘러치고 안쪽으로 성을 쌓은 성안젤로요새의 정문이 아치형 성벽과 마주 보고 있었다. 입구에 기사단 복장의 조각품은 내 눈에는 춤을 추는 것처럼 느껴져 '풉' 웃음이 터졌다.  

성엘모요새 매표소
매표소에서 엘모어요새 정문까지 한참을 걸어야 한다.


입구에서 걸어 들어올 때는 몰랐는데 정문에서 계단을 올라서니 '요새'라는 이름에 걸맞은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비르구에서 발레타로 수도를 옮긴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성안젤로요새에서 직선으로 이어지는 곳에 오스만 제국이 있던 지금의 튀르키예가 있다는 점도 큰 이유로 작용했을 것이다. 저 바다를 통해 몰타로 들어온 오스만 제국의 군대가 가장 맞닥뜨리게 되는 곳이 바로 이 성엘모요새니 이곳이 지리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겠는가.  

성안젤로요새 정문을 통해 들어오면 이런 풍경을 만나게 된다.
성엘모요새에서 오른쪽 대각선으로 성안젤로요새가 보인다.


중세 때 지어졌다는 성이 이렇게 잘 관리가 되어 있나 싶지만 성엘모요새 대부분은 복원된 모습이다. 세계 제2차 대전 때 공습으로 대부분 파괴된 채로 버려졌던 곳이었는데  2009년부터 약 5년간에 걸쳐 상부인 Upper Saint Elmo와 Carafa enceinte의 복원작업을 끝냈고 복원을 마친 공간은 전쟁박물관으로 일반인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복원됐다고 하더라도 성엘모요새의 고풍스러움은 여전했는데 기록을 보니 아주 특별한 행사가 이곳에서 열린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2015년 발레타 이주 정상 회담 (Valletta Summit on Migration)으로 당시 갑자기 아프리카의 난민들이 증가해 유럽으로 들어오자 유럽 각국에서 사회문제가 됐다. 그때 난민처리를 위해 EU와 아프리카 각국의 정상들이 모여 대책회의를 한 장소가 발레타였다. 회담이 이뤄진 장소는 지중해콘퍼런스센터였고 성엘모요새는 미디어 센터로 사용이 됐는데 당시 외국 언론들이 'EU 정상회담을 개최한 곳 중 가장 멋진 장소'로 극찬을 받았다고 한다.


아프리카 난민은 지금도 전 세계의 사회문제 중 하나인데 유럽뿐 아니라 우리나라도 난민이 요청이 들어오는 상황이니 우크라이나 전쟁을 비롯해 오늘도 지구 어디에 선가는 죽고 죽이는 의미 없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왠지 씁쓸했다. 국제적인 행사만 하는 곳인가 싶지만 이곳에서는 여름 페스티벌로 오페라 갈라 콘서트가 열리기도 했고 내가 방문했던 날에는 결혼식 피로연 준비가 한창인 거로 봐서는 개인적인 행사로 대관도 가능한 것 같았다.  

전쟁박물관이지만 다양한 행사가 이곳에서 펼쳐진다.


몰타 전쟁박물관은 총 7개의 전시실이 있는데 선사시대부터 시작해 연대순으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몰타의 전쟁과 관련된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꾸며져 있었다. 1번 전시실부터 7번 전시실까지 차례로 번호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성엘모요새를 한 바퀴 다 돌아볼 수 있도록 관람동선이 안내를 하고 있었다. 우리로 치면 용산 전쟁박물관인 셈인데 역사적인 장소이니 둘러나 보자는 마음으로 갔다가 자연스레 몰타 역사에 대해 알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었다.  


굵직굵직한 사건들 위주로 전시물을 구성했고 영어를 잘 모른다고 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된 구성인데 무엇보다 볼거리가 상당해 7 전시실까지 집중력을 유지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몰타 전쟁박물관이지만 전쟁에 관한 내용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몰타 전체 역사에 대해 시대별로 구분되어  마치 몰타를 시간여행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알고 보면 몰타의 역사는 유럽 지중해사의 축소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문명이 거쳐간 나라이니 몰타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야 말로 내겐 유럽 역사의 숨어 있는 1cm를 발견해 내는 즐거움이겠다.


개인적으로는 옛날 자료사진이 많아서 참고할 수 있어서 더없이 좋았다. 성안젤로 요새의 전시물이 다소 아쉽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성엘모 요새에서 그 아쉬움을 다 날렸다.

페니키아, 로마 문명이 거쳐간 몰타는 지중해의 심장이라고 불린다.


2번 전시실과 3번 전시실은 가장 많은 공을 들인 공간이었는데 '성요한기사단'의 영광을 기록한 공간이었다. 특히 이 시기의 세계사는 십자군 전쟁이라는 엄청난 사건이 있었고 십자군 전쟁의 길목이자 지중해 한복판에 위치한 몰타는 가톨릭과 이슬람 세력이 정면승부를 겨룬 곳이다. 게다가 몰타가 처음으로 세계사에 비중 있게 등장한 시점이고 몰타 역사에서 가장 영광의 순간이니 어쩌면 많은 공간을 할애하는 것이 당연했다.


성요한기사단의 눈부신 활약을 담은 기록과 영상물, 기사단이 사용했던 물품들을 비롯해 그랜드마스터들의 업적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이중 몰타공성전이 인상적이었는데 성안젤로요새에서도 느꼈지만 오스만제국이 유럽을 급속하게 장악해 나갔던 것이 기독교 문명에겐 얼마나 큰 공포였을지 오롯이 와닿았다. 큰 나라들도 오스만 세력이 속수무책으로 정복당하는 마당에 몰타라는 작은 나라가 오스만을 막아냈으니 유럽사회가 가지는 몰타에 대한 마음이 남달랐으리라. 발레타라는 도시를 건설하고고 남을 정도의 후원금이 쏟아졌으니 더 설명이 필요하랴. 그러니 EU 회원국이 된 것도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겠다 싶은데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초기 성요한기사단 시절의 몰타


전시실에서 다음 전시실로의 이동하는 동안 성엘모요새 곳곳에서 전쟁과 관련된 시설들이 그대로 복원되어 있었다.

2번과 3번 전시실은 모두 성요한기사단과 관련된 전시공간이다.
성요한기사단 그랜더마스터 시기별 어떤 업적이 있었는지 설명하는 안내판


성요한기사단 그랜더 마스터의 통치시기별 업적만으로도 몰타의 역사 대부분 파악이 가능했다. 성요한대성당은 성요한기사단 그랜더마스터들이 자신의 성과를 뽐낸 또 하나의 전시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떤 그랜더마스터가 어떤 상징으로 꾸며 놓았는지 설명을 듣지 않으면 성요한대성당도 반쪽짜리 관람이 될 수밖에 없다. 성엘모요새에 시대별로 적어 놓은 그랜드마스터의 업적을 기록해 놓은 전시물 덕분에 뒤늦게라도 제대로 성요한대성당을 기억할 수 있겠다. 그동안 한국인 가이드 투어, 몰타 현지인 투어 등을 했고 나름대로 몰타 역사 공부를 하면서도 뭔가 조금 아쉽다 싶은 부분을 이곳에서 모두 채울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 너무나 유익한 전시실이었다.

성요한기사단 후반기의 모습이 기록된 전시실.


뿐만 아니라 성요한기사단이 지배하던 봉건 중세가 무너지는 계기가 된 것이 단 7일간 머물런던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가 몰타에 주둔하면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도 이곳에서 그림과 사진으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말로만 들었던 몰타 기차 운행 사진도 있고 1900년대 초에 찍은 발레타의 모습이 지금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도 눈에 띄었다.  

단 6일간 머물렀던 나폴레옹
몰타 20세기 초에 있었던 일들


4번 전시실부터는 세계 1,2차 대전 당시 몰타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 전시실부터 전쟁기념관 분위기였다. 실제로 세계 대전 당시 사용됐던 비행기 등 모형전투기들도 있는데 나이 지긋한 남자분들이 굉장히 흥미로워하며 상당히 긴 시간을 이 전시실에 머물던 모습이 꽤 인상적이었다.

세계 제1차 대전 당시의 모습들


4 전시실에서 5 전시실로 이동하는 공간에는 야외전시물이 설치되어 있는데 폭탄을 전시한 것만으로도 그 의미가 충분히 와닿았다. 특히 이곳에서는 재정문제로 아직 복구 시작도 못한 Lower Saint Elmo의 모습이 폐허로 여전히 남았다. 화약고와 함께 남은 한 동의 건물에는 잡초가 무성하다. 그곳의 시간만은 여전히 세계 2차 대전에 멈춰 있는 듯했다.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만이 정지된 시간을 일으켜 세운다.

4와 5 전시실 사이의 야외공간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모습을 연상하게 했다.
Lower Saint Elmo는 재정적인 문제로 복구가 아직 되지 않았다.


+우리나라와도 깊은 관계가 있는 몰타

5 전시실은 뜻밖에도 우리나라와 깊은 관계가 있는 곳이었다.  

세계 2차 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면서 우리나라도 드디어 해방을 맞이하게 되지만 결론적으로 얄타회담에서 남과 북의 분단이 현실화된다.  본격적인 얄타 회담을 앞두고 프레 얄타 회담(pre-yalta conference malta 194)이 당시 중립국이 있던 몰타에서 열리게 된 것이니 우리가 아무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던 몰타도 알고 보면 전혀 관련이 없는 건 아닌 셈이다.

1945년 프레 얄타회담이 열린 몰타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그냥 지나치는 것 중 하나가 유독 내 시선을 붙잡는다. 세계 2차 대전 중에 큰 활약을 펼친 몰타에 영국 국왕이 조지크로스 십자가를 내렸다. 이 십자는 현재 몰타 국기에도 표시되어 있는데 간혹 진보적인 몰타 사람들은 독립주권국이니 조지크로스 십자가를 빼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지만 큰 대세는 아니라고 했다. 우리로 치면 일본 국왕이 내린 문양인 셈인데 국기에 버젓이 새겨 넣은 게 좀 이해는 되지 않았다. 하지만, 사진을 보라. 일반 시민들이 얼마나 자랑스럽게 보고 있는지. 음- 그런 것이었어.

몰타국기에 남아 있는 영국 식민지의 흔적


6 전시실은 몰타의 EU 가입 등을 사진으로 볼 수 있도록 구성이 됐는데 이곳에서도 중요한 역사의 한 장면을 만날 수 있었다. 이 '냉전'이 종식된 것이 바로 '몰타회담'이었다는 걸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1989년 미 합중국 대통령인 조지부시와 소비에트 연방의 서기장인 미하일 고르바초프간의 몰타 회담으로 냉전이 공식적으로 종식됐다.  이젠 냉전이라는 말도 생소한 단어가 되어 버렸고 냉전 종식 후 이제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 있는 한반도다. 


세계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회담 중 하나로 손꼽히는 몰타 회담이 왜 하필 지중해 작은 섬나라인 몰타에서 열렸을까? 몰타는 지리적으로 동, 서, 남, 북이 교차하는 곳에 있고 영국의 지배를 받은 후 '비동맹을 선언'하며 사실상 중립국이었기 때문에 냉전종식 선언을 위한 곳으로 최적이었던 셈이다. 좀 비약해 보자면 1945년 프레 얄타회담에서 시작한 전 세계인의 평화를 위한 갈망은 1989년 몰타회담으로 그 방점을 찍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1989년 몰타회담에서 사실상 공식적인 냉전을 선언했다.


가볍게 둘러볼 줄 알았던 성엘모요새는 몰타 7천 년의 역사가 총망라된 곳이었기에 생각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걸렸다. 몰타가 '지중해의 심장'이라는 별명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다. 포에니 전쟁, 십자군 전쟁, 나폴레옹전쟁, 세계 1,2차 대전까지 주요 역사의 고비마다 동서양의 문명이 뺏고 빼앗았던 몰타의 운명이 바로 지중해의 운명이었고 몰타의 역사가 곧 유럽 세계사의 축소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런 몰타를 몰타를 단지 '유럽의 휴양지' 정도로만 인식하기엔 몰타로선 참 섭섭한 일이겠다.


#성엘모요새 #발레타 #몰타어학연수 #몰타여행 #몰타갈만한곳 #성요한기사단 #몰타


+ 다음 이야기 : 피라미드보다 오래된 몰타 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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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에 어학연수는 핑계고, 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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