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타어학연수 제3장 #26 고조섬(4) 더시타델, 고조의 수도
50대에 어학연수는 핑계고
#26 고조섬(4) 고조의 수도, 더 시타델(The Citadel)
고조에서 가장 첫 방문지였던 타피누 성당을 나서 고조의 수도인 빅토리아(Victoria)로 향했다. 고조는 몰타에서 두 번째로 큰 섬으로 인구는 약 3만 명 정도가 살고 있다. 고조를 부르는 이름과 고조 사람을 부른 이름이 따로 있는데 몰타어로 아우데시(għawdex)와 고지탄(Gozita)이다. 고조는 뭐랄까, 우리로 치면 제주도 같다고나 할까. 제주도가 육지와 달리 언어, 음식, 문화 등에서 차이가 있는 것처럼 몰타와 고조도 그랬다.
몰타 수도가 발레타라면 고조 수도는 '빅토리아(Victoria)'다. 빅토리아라는 이름이 굉장히 익숙하다 싶은데 영국의 영향이다. 고조의 수도가 빅토리아라는 이름을 갖게 된 건 영국통치하였던 1887년 6월 10일 영국 빅토리아 여왕 즉위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몰타 주교 몬스(Mons)의 요청으로 영국 정부가 붙인 이름이다.
시타델에 간다고 했더니 누구는 빅토리아 가냐고 했고 누구는 라밧 가냐고 했다. 임디나 '라밧'을 말하는 줄 알고 상당히 혼란스러웠고 빅토리아와 라밧이 다른 곳인 줄 알았는데 빅토리아의 원래 이름인 이르-라바트(Ir-Rabat, 줄여서 '라밧'이라고 부른다)이었다. 고작 인구 40만밖에 되지 않는 나라인 몰타는 수많은 외세의 침입이 있었고 특히 영국의 지배 당시에 영어가 공용어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여전히 몰타어를 사용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강대국의 지배를 받은 약소국 대부분이 자국의 언어를 잃었음에도 몰타라는 조그만 나라가 자신의 언어를 여전히 잃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 놀랍다. 그런데 요즘은 몰타어 대신 영어만 사용하자는 의견이 조금씩 나오고 있다고 한다. 하긴 몇 해전 일본에서도 일본어 대신 영어 쓰자는 어떤 미친 장관의 말이 이슈가 된 적이 있었는데 부디 몰티즈들이여 그대들의 언어를 잘 지켜내시길.
고조 섬 중앙에 있는 빅토리아는 신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유서 깊은 곳이다. 몰타 최초의 사람은 시칠리아에서 온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고조를 통해서 들어왔다. 몰타에 거석 신전이 여러 곳이 있지만 가장 앞선 시기인 즈간티아(Ggantia) 신전이 고조에 있는 것만 봐도 고조가 얼마나 오랜 역사를 가진 곳인지 알 수 있다.
고조 버스 정류장에서 구불구불 제멋대로인 골목길을 걷는다. 이정표가 있지만 어디가 어디인지 모르니 좀 특이한 골목이다 싶으면 이리 기웃 저리 기웃 골목이란 골목은 다 가볼 요량으로 걷다 보니 어느 순간 탁 트인 광장이 나타났다. 고조에서 만남의 장소로 불리는 '독립광장(Independent Square)'이었다. 몰타어로 it-Tokk라고 부르는데 세인트 조지 성당(St George's Basilica) 앞으로 펼쳐진 광장으로 이 일대는 노천카페가 즐비했다. 이곳은 18세기 성요한 기사단이 지배하던 시절 고조 시청이라고 할 수 있는 방카기우라탈레(Banca Giuratale)가 있던 곳으로 매일 아침이면 노점시장이 펼쳐진다. 특히 해마다 2월이면 카니발 축제가 열려 대규모 록 콘서트를 비롯해 다양한 볼거리가 있어 엄청난 관광객을 불러 모은다고.
몰타의 한국인 가이드인 루피나 씨 말에 따르면 노천카페에서 느긋한 시간을 즐기는 사람들은 대부분 몰타인이라고 했다. 고지탄(고조 사람)은 몰티즈(몰타인)를 '베짱이'라고 부르기까지 한다고 했다. 고조 사람들은 카페에서 절대로 노닥거리며 시간을 쓰지 않는단다. 아침 일찍 배 타고 몰타로 가서 열심히 일하고 저녁 늦게 배 타고 다시 고조로 돌아올 만큼 고조 사람들이 부지런하다고 했다. 고조와 몰타의 차이를 가장 극명하게 알 수 있는 설명이었는데 왜 지역감정이 있는지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빅토리아 시내를 둘러본 후 오늘의 목적지 시타델로 향하는 길, 어느새 배꼽시계가 사정없이 울린다. 시타델 근처에 오니 멋진 공연장처럼 보이는 곳에 또 하나의 노천광장이 있었다. 실제 공연이 열리기도 하는 건물은 고조 문화관광부에 해단하는 건물이었다.
날이 너무 뜨거워 노천광장보다 맞은편에 시원한 에어컨이 있는 카페 주빌리에로 들어갔다. 몰타에 살고 있으니 굳이 맛집을 찾기보다 그냥 눈에 띄는 곳에 들어가기 일쑤였는데 구글 평점도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입구에 쓰인 문구에 끌렸는데 카페 주빌리에만의 '오늘의 메뉴'인 셈이었다. 고조에서 뭐로 만들고 어쩌고 저쩌고 했는데 지금은 다 잊어버렸고 맛이 너무 짰다는 것만 기억한다. 다만 올드한 분위기가 내 취향이었고 마음씨 넉넉한 아저씨가 있어 그걸로 퉁.
시타델까지 가는 길은 계속 오르막이다. 7월 몰타 태양의 뜨거움은 상상을 초월한다. 한국에서라면 절대로 나다니지도 않을 날씨에 약 100m에 달하는 오르막을 오르고 있자니 연신 내뱉고 있는 뜨거운 날숨을 들숨으로 들이키기 일쑤다. 몸은 이미 땀으로 범벅이다. 몸에 걸친 건 모두 거추장스럽다. 훌떡훌떡 벗어 제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다. 헉헉 거리다가 고개를 치켜드니 육중한 시타델이 나타났다.
이미 몰타에서 수많은 요새를 봤기에 고조 시타델도 그런 곳 중 하나일 거로 생각했는데 분위기가 뭔가 묘하게 달랐다. 몰타 기사단이 지배하던 시절에 대부분 지어진 요새는 중세풍의 느낌인데 고조 시타델은 '뭐가 이렇게 현대적이지'하는 느낌이 먼저 들었다. 그런 느낌은 당연했다. 중세 때 성으로 개조된 시타델이지만 수차례 공격으로 상당 피해를 입었고 여러 번에 걸쳐 재건되기도 했지만 북쪽 부분은 상당히 훼손된 상태였다. 1998년에 유네스코 잠정 문화유산에 지정된 후 2008년에 EU의 지원을 받아 한 차례 복구를 했고, 2014년에 또 한 번의 복구 작업을 거쳤는데 그 비용이 약 2,100만 유로가 들었을 정도로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했기 때문이었다.
시타델이 고조 빅토리아의 가장 꼭대기에 있는 이유가 '중세의 요새'라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지만 시타델의 역사는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간다. 이 지역은 출토되는 유물로 추정컨대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거주를 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가 몰타를 지배했을 당시는 아크로 폴리스였고 주노(Juno) 신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주노 신전이 있었던 곳에 중세에 고조 대성당(Gozo Cathedral)이 세워졌다. 서로마가 망하면서 로마 도시였던 곳은 잊혔고 아크로폴리스는 성으로 개조됐다. 12세기가 되면서 고조는 다양한 세력으로부터 침략을 받았는데 그때마다 시타델은 주민들의 안전한 피난처가 되어 주었다.
언뜻 보기에 굉장히 현대적인 느낌이 들었던 곳인데 시타델 안으로 들어서니 완전히 다른 공간이었다. 계단 몇 개를 올라섰을 뿐인데 순식간에 중세시대로 타임슬립한 기분이 묘했다. 정면에는 고조 대성당이, 왼쪽으로 고조 법원이다. 성당 왼쪽 옆 골목을 따라 오르막을 오르니 시타델의 가장 높은 부분에 도착했다.
우와 -
사방팔방 확 트인 고조 섬의 풍경이 발아래로 펼쳐진다.
성채에 서면 누구라도 연신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다. 성채가 단차가 있다 보니 성채를 걷고 있는 사람들도 풍경이 되어 준다. 몰타를 대표하는 요새인 발레타, 비루구, 임디나의 성채들과는 묘하게도 다른 느낌인데 요새가 아니라 작은 소도시가 내려다 보이는 전망대에 선 기분이 들었다. 한쪽은 도심의 풍경이, 반대쪽은 전형적인 목가적인 풍경이 묘하게 대비되는 고조섬이다. 같은 풍경은 어디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느낌도 감상포인트였다. 빅토리아 가장 놓은 언덕에 지어진 덕분에 따로 전망대를 갈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성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면 천혜의 요새인 시타델은 고조의 가장 높은 곳에서 천진스러운 표정으로 도심을 굽어 살핀다. 한 번도 침략되지 않은 듯 고고한 자태지만 시타델은 고조의 비극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다. 몰타 최고의 승리인 '몰타공성전'이 있기 전 1551년 지중해 해적과 손을 잡은 오스만은 고조섬을 먼저 공격했다. 이때 고조 시민들과 기사단은 성을 걸어 잠그고 치열한 전투를 벌였지만 6일 만에 오스만에 패하게 된다. 가까스로 탈출한 300명을 제외하고 기사단 포함 약 6,000명은 포로로 잡혔고 리비아로 끌려갔고 노예 생활을 했다고 당시 고조의 인구는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다.
고조의 패배로 인해 성요한기사단은 절치부심 후 오스만에 대한 대비를 더 단단히 했고 1565년 몰타공성전에서 대승을 거두게 된다. 몰타공성전 승리 이후 몰타 본섬에서 고조로 사람들이 이주해 살기 시작했는데 자료를 찾아보니 1551년 전의 고조 인구로 회복하기까지 약 150년 정도가 걸렸다고 한다. 지금으로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비극의 역사다.
날도 뜨거운데 성채를 한 바퀴 돌았더니 떡실신 직전이었다. 잠시 목이라도 축여야겠기에 적당한 곳을 찾아다 '루프트 탑 테라스 오픈'이라는 카페를 발견했다. 당연 가봐야지. 3층의 건물로 2층까지는 평범한 건물이었는데 몰타 풍의 인테리어로 장식해 놓았다.
몰타 뱃머리에는 뱃사람의 안녕을 기원하는 눈을 장식하는데 그 부분만 잘라 벽에 걸어 놓으니 훌륭한 인테리어가 됐다. 고조의 풍경을 그림으로 그려놓은 액자는 2층으로 올라가는 길을 심심하지 않게 만든다. 태풍으로 하루아침에 사라지기 전까지 고조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 중 하나였던 '아주르 윈도'가 가장 눈에 띄었다. 만약, 아주르 윈도가 사라지지 않았더라면 교통이 불편해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갔을 드웨자 베이인데 아주르 윈도가 없으니 아예 가보지 않았던 곳이기에 그림으로나마 아쉬움을 조금 달랬다.
다소 평범했던 2층을 지나 루프트 탑으로 가는 길은 나선형의 계단을 이용해야 했다. 이 주택이 성곽과 연결되어 있다 보니 해질 즈음이나 저녁이라면 모를까 이미 성채를 한 바퀴 돌면서 본 풍경들과 큰 차이가 없었다. 게다가 아직 해가 드는 야외는 숨이 막힐 지경이라 구경만 하고 다시 내려왔다. 그나저나 저곳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서빙해야 하는 종업원들은 정말 힘들겠구나 싶었다.
테라스를 포기한 대신 골목길 놓아둔 테이블에 앉으니 골목 위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다. 혼자만 시간을 정지시킨 채 일인칭 시점으로 부지런한 관광객들의 시간을 눈만 따라다닌다. 사람들이 지나다니건 말건 맥주도 마시고 커피도 마시고 일기도 쓰고 모처럼 여유를 부린다. 무리 지어 시끄러운 발자국 소리가 한 차례 훑고 지나가다 갑자기 골목이 고요해진다. 몰타를 떠날 시간이 며칠 남지 않아서인지 수만 가지 생각으로 마음이 복잡한 날들이었다. 비로소 내 마음에도 적막감이 화사하게 내려앉는다.
혼자만의 시간에 흠뻑 취했는데 누군가가 고요를 깬다.
"기념사진 찍으실래요?" 커피를 가져다준 이였다. "네? 아, 괜찮아요." 했다가 얼른 다시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다.
사람이 모두 사라진 시간을 남겨놓고 싶었다.
이젠 다시 몰타로 돌아가야 할 시간. 계산을 하러 1층으로 가니 처음에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기념품이 보였다. 종류는 많지 않은데 몇 가지 수공예 기념품이 있었는데 몰타 테라스를 앙증맞게 빚어놓은 것이 있는 게 아닌가. 마음 같아서는 종류별로 다 사고 싶어 들었다 놨다를 몇 번 하다가 결국 가장 마음에 드는 건 하나만 샀다. 글을 쓰면서 사진을 다시 꺼내보니 몇 개 더 사 올 걸 후회가 되네.
하루종일 빅토리아와 시타델 곳곳을 돌아다니다가 집으로 가는 길, 고조 대성당이 굉장히 분주하다 싶었기에 무슨 일인가 했더니 누군가의 장례미사가 진행 중이었다. 슬며시 옆문으로 따라 들어가 장례미사를 엿봤다. 성당 안을 가득 메운 사람들 사이에 죽음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삶과 죽음의 묘한 경계다. 고인이 누구인지 모르겠으나 천국에서 편히 쉬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하며 내 삶의 시간으로 돌아왔다.
+ 다음 이야기 : 시타델 안에 박물관이 이렇게나 많다니? 고조 박물관 도장 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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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에 어학연수는 핑계고' 1장과 2장은 브런치북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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