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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작가 정해경 Nov 09. 2023

런던 여행자는 절대로 가지 않는 곳 [시크릿런던]   

50대에 어학연수는 핑계고, 런던 #5 파클랜드 워크

0대에 어학연수는 핑계고, 런던   


#4 기찻길이 숲속 산책로로, 파클랜드워크 


+ 나 제주도 숲 속을 걷고 있는 거니? 

파클랜드 워크(Parkland Walk)를 알게 된 건 우연이었다. 

런던을 오게 되면 관광객들이 필수적으로 가야 하는 곳들이 있다. 하지만 길어야 일주일 정도인 관광객이 아닌 3개월을 런던에서 살게 됐으니 런던에서 생활은 관광객 모드를 버릴 수는 없겠지만 최대한 현지인 모드로 살아보고 싶었다. 


몰타도 런던도 정보가 없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런던은 몰타보다 정보가 더 없었다. 다만, 몰타에서 5개월 남짓 살아보니 미리 어디를 갈지 계획을 세우기보다 구글 지도를 보면서 그때그때 갈 곳을 정하고 그날의 기분과 날씨에 따라 즉흥적으로 움직이는 것도 나름 괜찮았었다. 전형적인 'p' 스타일의 나답게 런던 역시 즉흥적으로 마음이 끌리는 대로 만나보리라 마음먹었다.  


몰타에서 런던으로 온 첫 주 주말에 어디를 갈까 고민을 하며 구글맵을 보니 집 근처에 핀즈베리 공원을 비롯해  꽤 많은 녹지공간이 있었다. 꼭 가보고 싶었던 '햄프스태드 히스'도 집에서 멀지 않았다. 집에서 버스나 지하철을 2번 갈아야 타고 40분 정도는 걸리는 곳인데 걸어가면 약 1시간 정도면 갈 수 있는 곳이라 산책으로 가면 되겠다 싶었다. 일단 저장. 


"또 어떤 곳이 있나." 


"어, 여긴 뭐지?" 


핀즈베리 공원에서 이어지는 녹색의 선이 눈에 띄었다. 강은 아닌 것 같은데 약 3km에 달하는 직선의 녹색지대는 '파클랜드 워크(parkland walk)'로 표시되어 있었다. 워크면 걸을 수 있는 길이라는 의미지 않은가. 파클랜드 워크 진입로가 마침 니들 슈퍼마켓 근처였기에 마트에 장 보러 가는 김에 산책도 할 겸 런던에 온 첫 주말 파클랜드 워크로 향했다. 

구글지도를 파클랜드 워크 

.

런던을 여행하는 관광객들이라면 반드시 가야 하는 수많은 런던 명소를 두고 내가 런던에서 가장 먼저 간 곳이 동네 산책코스인 '파클랜드 워크'라니 싶어 웃음이 나면서도 현지인 모드 장착이 왠지 싫지는 않았다. 마트 근처 도로변에서 숨은 듯 작은 표지판을 따라 경사진 길을 따라 언덕을 올라섰는데...


맙소사!!!! 이게 뭐야!!!!! 


갑자기 숲길이 나타났다. 그것도 너무나도 울창한 숲이다. 숲으로 난 길을 따라 안으로 걸으면 걸을수록 숲이 점점 깊어진다. 사람들은 느긋하게 길을 걸으며 숲을 만끽한다. 누군가는 걷고, 누군가는 달리고, 누군가는 자전거를 타고 또 누군가는 개를 산책시키며 각자 자신 만의 방법으로 숲을 품는다.  순간, 제주의 어느 숲을 걷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제주 곶자왈을 걷는 외국사람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 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정신 차려, 여기 제주 아니고 런던이라고!!!  


런던이 녹지가 많다는 걸 알았지만 이 정도로 깊은 숲이 동네에 있을 줄을 상상도 못 했다. 게다가 이곳은 런던 어느 가이드 북에도 나와 있지 않은 로컬 피플들의 산책코스라 더 좋았다. 마치 혼자 신세계를 발견한 듯 신이 났다. 


파클랜드 워크는 런던에서도 '시크릿 플레이스'였다. 코로나 판데믹이 있기 전까지는 동네 사람들만 주로 이용하던 곳이었는데 판데믹 기간에 런던의 유명한 공원들은 사람이 너무 많이 찾기에 다른 장소들을 찾기 시작했고 숨은 명소로 파클랜드 워크가 알려지게 됐단다. 이곳은 워낙 독특한 역사를 가진 곳이기에 세계 각국에서도 벤치마킹을 위해 많이 찾는 곳이라고 한다. 왜인고 하니 이곳은 런던에서 가장 긴 자연보호 구역이기 때문이다. 도심 한가운데 자연보호구역이 있는 런던이 너무 신기했다.  

제주도 곶자왈을 걷는 기분이 들었던 파클랜드 워크
자연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파클랜드 워크 



+ 런던에서 가장 긴 자연보호 구역, 파클랜드 워크 

파클랜드 워크는 원래 기차가 다니던 철로였다.  경의선이 다니던 옛 철로가 경의선숲길로 다시 태어난 것처럼 파클랜드 워크 역시 철도가 다니지 않게 되면서 숲길이 만들어지지게 된 것이었다. 

파클랜드 워크 안내판 


처음에는 철도가 다니던 길인줄 전혀 몰랐다. 이곳이 런던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지대가 다소 높은데 교량으로 이용됐던 구조물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굉장히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약 5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인공구조물을 점령해가고 있는 나무들과 풀들은 이제 한 몸처럼 보이기도 했다. 모르긴 몰라도 우리나라에 이런 곳이 있었다면 인스타그램에서 폭발했을 것이다. 

자연과 인공구조물이 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직선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는 길은 앞으로 나아갈수록 계속 다른 느낌이다. 때론 환경을 위한 메시지들이 걸려 있기도 했고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발라놓은 석회(?)에는 누군가 장난스러운 조각을 남겨 놓기도 했다. 기차가 다니던 시절에 있었을 인공 구조물들이 간간히 보이기도 하고 한때 멋진 아름드리나무가 생을 마감한 흔적도 그대로 남았다. 기차가 다니던 시절에 남은 흔적은 희미해졌고 그마저도 자연의 일부가 된듯한 느낌이었다. 


다시 또 교량이 나타났다. 좀전과는 또 다른 분위기다. 그라피티마저 멋스럽다. 길은 직선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기는 한데 선로가 완전히 철거되어 버려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진짜 이곳이 기찻길이 맞나 싶었다.  

링으로 된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 걷지 않아 Crouch Hill Bridge에 도착하니 이곳에 기차 역사가 있었던 곳이라고 바로 알 수 있을 정도로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플랫폼도 그대로고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 빛은 바랬지만 사람들이 어디로 들고났는지 흔적은 그대로다. 다만, 기차만 없을 뿐. 


기차가 다녔던 시절에 이 역사의 이름은 크라우치엔드역이었다. 

50년 전 이곳에 기차역과 플랫폼이 있었다.


너무나 내 취향이었던 파클랜드 워크의 역사가 궁금해서 내용을 찾아보니 다음과 같았다. 

1867년에 핀스버리 파크(Finsbury Park)에서 하이게이트(Highgate)까지 운행하는 본선이 개통을 했고 1873년에 하이게이트에서 알렉산드라 궁전(Alexandra Palace)까지 운행하는 지선이 개통을 했다. 알렉산드라 궁전과 새로운 철도 노선이 개통할 당시에 백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개통식에 참석할 정도로 엄청난 화제를 모았던 곳이었으나 개통 16일 만에 궁전에 화재가 발생해 운행이 중단됐다. 

1930년에 후반에 언더그라운드 노던라인(Northern Line)이 이 노선을 포함해 확장할 계획이었으나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무산이 됐다. 1950년대가 되면서 증기기관의 주연료인 석탄이 부족해졌고 버스나 지하철에 경쟁력이 밀리면서 1954년 7월 3일 마지막 여객 열차가 운행됐다.  이후 10년 동안 화물 열차가 운행되다가 1970년 9월 29일을 끝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1971년에 철로가 철거됐다.


지금은 플랫폼으로 이용됐을 것이라 짐작하는 구조물만 남아 있는데 원래 모습이 어떤지 궁금했다. 런던 사진  아카이브에서 발견한 사진을 보니 초기에는 육교 위의 작은 구조물이었는데 1930년대에 다리가 지어지면서 역사를 새로 만든 것 같았다. 기찻길이 철거된 후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크게 변하지 않은 점도 신기했다. 달라진 것은 흑백이냐 컬러이냐 그 차이일 뿐. 


크라우치엔드역의 옛 모습


이 노선의 기차를 타고 다녔던 사람들이라면 이 역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지 않을까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떤 사람이 크라우치엔드역의 옛날 모습과 지금의 모습을 합성해 놓은 사진을 찾았다. 지금 사진에 찍힌 사람들은 이제 이 세상에는 없겠지. 내가 이 기차를 탔던 사람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가슴이 뭉클했다. 

크라우치엔드역 합성 사진 


파클랜드 워크는 총길이 5km 남짓인데 본선 구간인 핀스버리 파크에서 하이게이트까지가 2.75km이고 지선 구간인 하이게이트에서 머스웰까지 2.25km다.  철도 노선이 그래도 산책로가 된 셈인데 기차가 다니지 않는다고 해서 이곳이 개발되지 않고 그대로 산책로가 된 건 런던이라서 그런 것일까 궁금했다. 


이곳도 한때는 개발이 될 뻔했다고 한다. 길이는 5km 정도지만 면적으로 치자면 꽤 넓은 곳이니 내가 걸었던 핀즈베리파크에서 이어지는 남쪽 구간은 주택으로 개발을 고려하기도 했었고 1980년대 중반 교통국에서 이곳을 6차선 고속도로 건설을 제안하기도 했었단다. 하지만 두 번 모두 녹지공간을 원하는 지역사회 주민들의 격렬한 반대가 있었다고 한다. 특히 고속도로 건설의 경우  '용납할 수 없는 환경적 영향'을 초래할 것으로 인식되어 지역사회에서 '파크랜드 워크 구하기(Save the Parkland Walk)' 캠페인이 이어졌고 결국 이곳은 시민들의 녹지공간으로 남게 됐다. 그게 1980년도 후반의 일이라니 놀랍기만 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지금에서야 주택개발이나 상업시설이 아닌 녹지공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는데 말이다. 

파클랜드워크 전체지도, 녹색구간이 내가 걸었던 산책로다. 


https://www.youtube.com/watch?v=Qh0VzfSQgd0&t=6s

파클랜드 워크 홍보 동영상 


그런데 이곳이 더 놀라운 것은 단지 산책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1990년에 이 산책로는 지역 자연보호 구역으로 지정이 됐고 런던에서는 가장 긴 보후구역이라고 한다. 어쩐지, 이 숲길에 첫 발을 디딜 때부터 느꼈지만 마치 제주도 곶자왈의 일부인 양 인공적으로 숲을 가꾼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잡풀이 거의 없고 쓰레기가 하나도 없는 것으로 봐서는 적어도 누군가가 최소한의 관리는 하고 있는 것 같긴 했는데 설마 이곳이 자연보호 구역일 줄이야.  


철도가 운행 중일 때는 선로 근처에 나무가 자라는 것이 허용되지 않아 계속 벌목을 했다고 하는데 50년이 지난 지금은 나무들이 거침없이 자라서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이곳의 나무들은 대부분 원래 있던 나무들이지만 들단풍나무, 개암나무 등은 심기도 했단다. 자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된 덕분에 이 산책로에서는 약 300종 이상의 야생화를 비롯해 22종의 나비, 200여 종이 넘는 다양한 동물들까지 관찰이 되는데 고슴도치와 여우도 살고 있다고 하니 정말 놀랍다. 


하지만 내가 가장 놀란 점은 장애인 이동권리가 당연하다는 점이었다. 5km 남짓의 구간에 진입로는 총 20개가 있는데 그중 장애인이 이용할 수 있는 구간이 어디인지 지도상에 표시가 되어 있다. 홈페이지를 살펴보니 장애인뿐만 아니라 동물에 관한 내용까지 조례에 포함이 되어 있는데 개의 경우 한 사람이 한 번에 총 6마리까지 산책이 가능하다는 내용이 조례에 담겨 있었다. 


도심 한가운데 만든 선형의 공원을 자연보호구역으로 지정하고 사회약자배려에 동물권까지 당연하게 고려하는 곳. 이런 곳이 런던이었다. 

지역 자연보호 구역인 파클랜드 워크 


다리 위쪽은 어떤 모습인지 궁금해 올라가 보니 차가 다니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 지역은 런던에서 요크와 에든버러 이어지는 도로가 지나는 곳이다. 런던이 산이 없는 곳이다보니 이곳은 상대적으로 지대가 높은 곳인데다가 가장 꼭대기에 톨게이트인 하이게이트가 있어 운전자들에게 악명 높았다고 한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로서는 런던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고 해봤자 북악팔각정보다도 높지 않은데 이런 곳이 지대가 높다고 호들갑인가 싶었다. 하긴, 도심에 산이 없는 런던으로선 충분히 이해가 된다. 

크라우치 힐(Crowch Hill) 산책로에서 바라본 풍경.


마음 같아선 알렉산드라 궁전까지 가보고 싶었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7월 말인데도 나무가 많은 숲은 약간 쌀쌀했고 한국 가을날씨 같았다. 초록이 주는 청량한 기운은 불과 이틀 전만 해도 몰타에서 35도를 오르내리는 더위로 힘들었다는 걸 순식간에 잊게 만들었다. 

손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파클랜드 워크 


새로운 그라피티 작업을 구상 중인 작가는 어떤 그림을 그릴지 생각에 잠겼다. 그라피티를 허용하기는 하지만 외설, 정치적인 그라피티의 경우 신고하면 바로 지운다고 한다. 


슬슬 걷다 보니 어느새 출발점인 핀즈버리파크에 도착했다. 어떤 아저씨가 열심히 무언가를 하고 있길래 다가가니 블랙베리를 따고 있었다. 자신의 집이 근처라 블랙베리는 늘 이곳에서 따다가 먹는다며 나 보고도 따가라고 했지만 아저씨께 양보했다. 

블랙베리 따는 중 


그냥 마트로 가기에는 아쉬워 나온 김에 핀즈버리 공원으로 향했다. 공원으로 연결되는 다리는 내 키 정도 높이였기에 기차가 지나가면 소리는 나는데 내 키로는 까치발을 들어야 겨우 기차가 보일락 말락 할 정도였다. 


서너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는 기차가 지나는 소리에 너무 신기해한다. 젊은 아빠는 아이를 번쩍 안아서 기차가 지나가는 모습을 구경시켜 준다. 한 대, 두 대, 아이는 지칠 줄 모르고 기차가 지나가는 것을 넋 놓고 바라본다. 젊은 아빠는 아이가 가자고 할 때까지 기차를 보여줄 모양인지 서두르지 않는다. 아름다운 모습이다. 

난간에 꼭 매달려 기차를 뚫어지게 보고 있는 아이.


다리를 건너니 핀즈버리파크 공원의 서쪽이다. 그런데 이건 또 뭐지? 산책코스가 또 있나 싶었는데 캐피털 링 워크(Capital Ring Walk)였다. 캐피털 링 워크는 런던 외곽을 아우르는 총 126km의 걷기 코스로 총 15개 구간인데 방금 내가 걸었던 파클랜드 워크가 12번째 코스 중 일부였다. 중간에 링으로 표시된 안내판이 무척이나 독특하다 싶었는데  바로 런던 캐피털 링 워크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핀즈버리파크의 캐피털 링 워크 


그런데 이거 어디서 많이 들었던 얘기 아닌가. 캐피털 링 워크가 말하자면 서울둘레길인셈이잖아.  

경의선 숲길과 비슷한 파클랜드 워크, 서울둘레길과  비슷한 런던 캐피털 링 워크, 어딘가 모르게 서울과 정말 비슷하게 닮은 런던이었다. 


이런 런던을 너무너무너무 사랑하게 될 줄 이때는 몰랐지만 알고 보면 첫날부터 나는 런던과 사랑에 빠진 것이었다. 

서울둘레길과 비슷한 런던 캐피털 링 워크 


+ 다음 이야기 :  런던이 좋아? 몰타가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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