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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 Jan 18. 2017

브렉시트, 그리고 글라스톤베리페스티벌

Brexit, 독립 혹은 고립, 그럼에도 페스티벌.


어수선한 분위기, 들려오는 라디오 소리에 잠을 깼다. 투표 결과가 나왔구나 싶어 눈을 감은 채 라디오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새로운 영국, 독립적인 국가, 새로운 총리, 그리고 환호하는 사람들의 목소리. 브렉시트의 승리다.


영국이 EU에 더 이상 잔류하지 않기로 한 다음 날의 풍경은 왠지 모르게 들떠있었다. 여기저기 라디오 뉴스가 나오고 있었고, 이 역사에 기록될 날에 나는 글라스톤베리에 와서 영국인들의 생생한 변화의 반응을, 혹은 당혹감을 접하고 있었다.

"How is independent day?"

벤더에 있던 사람이 손님을 받으며 그렇게 질문을 하는 걸 들었다. 그런 실없을 법한 뼈있는 몇 마디를 주고받는 사람들의 얼굴은 왠지 독립운동가라도 된 양 어딘가 결연해보인다.




목요일이었던 23일, 여기 글라스톤베리에도 기표소를 설치했다. 이미 철거를 해서인지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인만큼, 글라스톤베리 페스티벌고어들이 투표를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영국 내에서 할 정도로 이 곳에 모이는 사람의 수는 23만명 정도였다. 공식적인 수이기 때문에 실제와는 어느 정도 다를 순 있겠지만 큰 농장 안에서 진흙을 밟으며 캠핑을 하는 수가 6월 22일부터 26일, 5일동안 그 정도라는 이야기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꿈과 같은 숫자다. 한 페스티벌을 오는 사람이 23만명 이상이라니. 1년에 딱 한 프로젝트만 해도 되겠다고들 말하는 공연 기획자의 꿈같은 이야기는 이 페스티벌에서는 현실이 된다.



공연이 아직 채 시작되기 전이었던 목요일에 글라스톤베리로 향했다. 런던 집은 6월을 마지막으로 일단 정리를 하고 여행을 시작한 터라, 이전 여행보다도 가방이 무거웠다. 이후 행선지인 덴마크 코펜하겐으로 가기 전 런던에서 하루 정도가 남아있었지만 그 기간엔 짐만 정리하고 다시 출발해야 하기 때문에 짐을 대략 정리하면서 쌌는데도 왠지 가방이 더 무거워진 느낌이었다. 이유인즉슨, 다니면서 기록하기 위해 필요한 카메라들(보통 내가 들고 다니는 카메라는 컴팩트 하이엔드 카메라를 주 기종으로 하고,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서브로 하는데 최근엔 액션캠 하나가 더 추가되었다.)과 그걸 옮겨 보관해야 하는 노트북 때문이었다. 카메라와 노트북만 빼도 훨씬 가벼워지는 건 기분 탓만은 아니었을 거다. 거기다가 텐트, 침낭, 매트, 접이식 의자 정도가 포함되었다. 막상 가장 기본적인 준비만 했는데도 어깨가 조금 뻐근한 느낌이었다. 45리터 배낭을 들고 다시 시작된 여행은 이제 시작이었지만, 아직까진 괜찮은 것 같았다.



원래는 캠퍼밴이든, 차를 타고 갈 생각으로 주차를 할 수 있는 패스를 샀지만, 페스티벌에 차를 가져간다는 건 영국에서 전혀 익숙하지 않은 반대편으로 가는 차를 운전해야 한다는 것인데다가 렌트 비용까지 부담해야 한다는 의미여서 쉽사리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심지어 알고보니 난 주차가 가능한 티켓 중에서도 월시뷰 카팍 티켓(Worthy-view car park ticket)을 사둔 거여서 이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황이 되었다. 월시뷰 캠핑 티켓 자체가 있는 사람만 그 쪽에 진입이 가능한데, 난 일반티켓을 가지고 있던 터라 월시뷰 쪽 캠핑 티켓을 별도로 사둔 건 아니었기 때문에 사용 자체가 불가능했다. 누군가에게 양도하려고도 했지만 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상 할 수도 없어 어쩔 수 없이 티켓을 날리게 되었고 결국은 다른 교통수단을 예약해야 했다. 늘 이런 식으로 실수로부터 기분 좋지 않게 배우는 일이 즐비하지만 그 덕에 요령이 생긴다고 하면 조금은 위로가 되는 걸까.


코치는 그래도 바로 페스티벌 사이트 앞까지 가는 경로가 있었지만 코치티켓이 너무 비싸 대신 기차 티켓을 샀다. 기차역에서는 페스티벌 사이트까지 데려다주는 무료셔틀이 운영되긴 하지만 올해는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해보고 싶었던지라 조금 아쉬웠다. 패딩턴역에서 출발하는 기차를 타기 위해서 언더그라운드를 타고 역에 도착했다. 텐트를 메고 장화를 신으며 배낭을 낑낑 들쳐메고 떠나는 길에, '글라스톤베리 가는구나' 한 마디씩 건네거나 혹은 눈짓으로 쓱 웃어주고 가는 사람들에게서 이 페스티벌 문화가 얼마나 사회 깊숙이 뿌리내려진 상태로 오랫동안 이어졌는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들도 이전에 장발을 하고 가죽자켓을 입으며 고스 스타일의 분장을 하고서 페스티벌에 온 서로를 흘기며 사랑할 누군가를 찾기 위해, 좋아하는 음악을 찾아 종횡무진했던 젊은 시절이 있었겠지. 그게 그들의 낭만이었고 방황의 흔적과도 같은 것이었을테다. 지금은 다시 그 길을, 그 때의 추억을 회상하며 사랑하는 사람을, 가족을 이끌고 이 곳을 다시 찾기도 하는 걸 거고. 그게 세대를 이어주는 매개가 되고, 마음 속의 보헤미안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 또한 되지 않을까.


패딩턴을 출발한 기차는 카슬캐리에 도착해 페스티벌에 가는 모든 사람들을 그 역에서 내려준다. 이미 가는 길에 맥주를 마시기에 여념이 없고, 중간에는 랩 배틀도 한번 벌어졌다. 라임 하나 하나에 환호하며 반응하는 사람들은 흥이 오를 데로 올라 있었다. 기차역에서는 무료 셔틀이 공연이 이루어지는 월시팜까지 데려다주는데, 주변에 정말 아무 것도 없으니 그렇지 않으면 갈 수 있는 재간이 없다. 도착하는 순간부터 푸른 잔디가 끝없이 펼쳐진다. 같은 셔틀버스에 탄 사람이 넘치는 흥을 주체하지 못해, 오는 길 내내 When I say Glaston, you say bury, Glaston-bury! 같은 추임새를 유도하거나, 질문을 하면 무조건 3개 단어로 답하기 같은 아무나에게 던지는 퀴즈 폭격을 맞아가며 정신없이 오다보니 어느새 글라스톤베리페스티벌 사이트에 도착해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나한테 던진 질문은, 이전에 글라스톤베리에 와 본 적 있냐는 질문이었고 그에 대한 내 대답은 I've been here였다. 이럴 땐 더 재미있는 사람이고 싶다.... 농에 능한 자이고 싶다. 왜 더 참신한 대답은 생각나지 않는 걸까!)



다행히 도착하는 날에는 비가 오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려 스탭들이 던져준 가방을 다시 들쳐메고 티켓을 찾기 위해 매표소로 향했다. 티켓을 찾고 가방 검사를 한 이후, 티켓을 팔찌로 교환해 빠지지 않도록 팔찌에 있는 고리를 (조금 무섭게 생긴 펀치같은 것으로) 고정시키면, 입장 게이트로 진입할 수 있다. 푸르게 있던 잔디는 입구로 오는 길목에서 이미 진흙으로 변해있었다. 이미 글라스톤베리가 시작하기 일주일 전부터 계속 비가 오기도 했고, 글라스톤베리가 얼마나 진흙탕이 되었는지가 심지어 뉴스거리일 정도였던 걸 보면 아무래도 글라스톤베리페스티벌은 매년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큰 이슈이긴 한 모양이다. 내가 떠나기 전에도 같은 집에 사는 플랏메이트도 '지금 이미 진흙투성이라던데'라며 이미 글라스톤베리 땅에 대해서 나보더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더 스테이지(Other Stage) 부근
힐링필드(Healing Field)


입장게이트를 들어가 프로그램, 에코백 등을 챙겨 캠핑사이트에 텐트를 치기 위해 걷고 또 걸었다. 이전에 처음 방문했을 때보다도 지리를 잘 알 거라 생각했었는데, 역시나 2년만에 많이 잊어버렸다. 그래도 이번엔 전체 사이트 중 가운데 쪽에 자리하고 어느 곳이든 접근성이 좋은 곳으로 가고 싶었다. 글라스톤베리 사이트 내에서도 인기가 좋은 캠핑존을 대략 봐두기도 했고, 또 밤엔 쿵치쿵치 소리가 덜 들리는 곳이었으면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도 텐트칠 공간이 없어 의도치 않게 더 안쪽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고, 겨우 자리 하나를 발견해서 텐트를 치려는데 옆에 있던 미국 출신으로 보이는 사람이 말을 건다.

"아마 거기 치면 옮기라고 할 걸."

모처럼 본 뽀송한 잔디인데! 어차피 내 텐트는 작아서 어디든 들어갈 수 있었는데 안 될 수도 있다니 이게 또 무슨 말이람.

"아니, 왜?"
"우리 거기 쪽에 쳤다가 저 쪽 스탭이 옮기라고 했어, 띠가 둘러져 있는 덴 치면 안 되나봐."

캠프사이트에서 텐트 하나를 치기 위해서 30분을 걸었던 지라 이젠 어깨가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일단 가방을 내려뒀지만 여기가 아니면 또 어딜 가야 하나 막막해졌다.

"가방은 뒀다가 주변에 칠만한 데가 있는지 한번 보고 와, 가방은 우리가 지켜줄게."

내가 안전불감증인 것 같긴 하지만 이런 것에 그닥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는 것도 있고, 조금 불안했어도 그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이진 않아 가방을 맡아달라고 부탁하고 주변 캠프사이트를 찾아보았다. 빼곡하게 이미 쳐진 텐트에 공간이라곤 찾기 힘들었던 데다, 또 다른 곳까지 갈 자신도 없었다. 이미 힘이 빠져버린 상태였던 나는 결국 다시 그 자리로 가 다른 자리는 못 찾겠으니 그냥 텐트를 쳐야겠다고 하니, 그 친구들도 이해하고 아마 스탭들 눈만 피하면 될 거라고 서로 동의한 뒤 텐트를 치기 시작했다.


이전에 페스티벌에 가기 전 아는 동생이 '텐트 치는 거 괜찮아요? 해 봤어요?'라고 물은 적이 있었다. 도리어 나한테서 나온 답변은 답이 아니라 질문이었는데, '왜? 못할 게 뭐 있어?'라는 거였다. 여자 혼자 배낭메고 텐트지고 가서 캠핑하는 게 뭐 별 거냐, 자리 잡고 텐트를 치기까지가 시간이 좀 걸릴 뿐 그 이후엔 오히려 머물 곳이 정해지니 이상스러울만치 편해지는 유목민스러움을 체득하게 되는 것 같았다.


문제는 텐트를 다 친 이후에는 체력이 썰물 빠져나가듯 있던 에너지까지 훅 다 가져간다는 거였다. 한 번 들어간 텐트는 누군가 뒷목을 잡아당기는 것처럼 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죽겠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난 목요일에 페스티벌에 들어갔는데 페스티벌 사이트를 여는 날은 수요일이었고, 메인 공연은 금요일부터 시작되었다. 그래서 목요일은 사실 그리 큰 공연들은 없지만 전체적인 페스티벌 사이트를 둘러보기에는 딱 좋은 날이었다.



바닥으로 날 잡아당기던 중력의 힘을 최대한 이기고 나와 패치워크로 만들어져있는 글라스톤베리 글자가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페스티벌 사이트에서는 그 곳이 가장 부지가 높은 쪽이어서, 언덕에 올라가면 페스티벌 사이트를 전체적으로 볼 수 있다.


내가 텐트를 친 곳은 더 파크(The Park)라는 스테이지가 있는 쪽과 기부금으로 운영되는 마사지/요가/테라피 등이 제공되는 힐링필드(Healing Field)의 중간 정도였다. 찾아갈 땐 너무 멀리 들어갔다고 생각했었는데 캠핑존이 이 정도면 좋겠다고 가기 전에 염두해두었던 장소와 거의 일치했다. 메인스테이지인 피라미드 스테이지(Pyramid Stage)와는 거리가 좀 있었지만, 페스티벌의 어디를 가더라도 너무 멀지 않은 곳에 텐트를 쳤다는 건 글라스톤베리의 넓디 넓은 부지에서 꽤나 괜찮은 장소를 골랐다는 뜻이었다.


언덕 위에 있는 해먹존 쪽에 어슬렁어슬렁 가봤더니 비어있는 해먹이 있길래 자리를 잡고 누웠다. 선선한 바람이 몸을 휘감는 느낌에 기분이 좋아졌다. 올해도 여기에 내가 오긴 왔구나, 이유도 모르고 시작했을 페스티벌 프로젝트가 이제 진짜 시작되는 것 같았다.



페스티벌이 시작되기 전 날은 고요했다. 서커스존에도 내일부터 시작될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고, 데이빗 보위를 상징하는 번개모양과 눈으로 장식된 웅장한 피라미드 스테이지도 곧 시작될 음악의 향연을 준비하듯 조용했다. 여름이라고 하기에는 저녁이 되니 또 쌀쌀해진 날씨가 텐트 안에서 웅크리며 잠을 청하게 했다. 캠핑존에서 술을 마시며 별을 벗삼아 서로를 기대어 보내는 글라스톤베리 시작 전 날 밤의 풍경은 그 큰 규모와는 사뭇 다르게 조촐하고, 대단하지만은 않았다. 일상같으면서도 일상같지 않은 곳에서 비슷하지만 너무나도 다른 사람들과 한 곳에 모여 음악으로 하나가 된다는 것 때문에, 페스티벌이라는 건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Glastonbury spirit'이라고 하는 그 말에는 너와 나, 이 곳에서 모두 하나로 모일 수 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있다. 촌스럽고, 어딘가는 시대 착오적일 수도 있는 이 생각은 이상주의자의 삶이라기보다, 일상을 지속하게 만들어주는 힘이자 이유다.



다음 날의 투표 결과 발표는 글라스톤베리 전체를 떠들썩하게 했지만, 그 술렁거림은 오래 가지 않았다. 아티스트들은 브렉시트, EU와의 결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이 곳에서 우리는 출신과 인종에 관계없이 누구나에게 관대하고 이후의 나라의 행보에 대해 겸허히 인정하는 마음을 갖자는 의미의 말들을 하며 함께 서로를 격려했다. 고립이라면 고립일 수 있을 브렉시트의 결정, 그리고 포용과 화합의 의미를 담은 페스티벌. 이 상반된 가치가 혼합된 이 장소가 외국인인 나에게는 더욱 더 혼란스러웠다. 방관자이면서 참여자일 수도 있는 내 위치가, 역사의 산증인이라도 된 것만 같은 책임감을 괜시리 느끼게 했다.



맑은 날은 첫 날이 지나면서 끝이 났다. 뻔하게도 남은 기간동안은 비가 오락가락해 잔디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진흙탕이 되었지만, 사람들은 장화를 신고 무대를 찾아 진흙밭을 걷고 또 걸었다. 곁에 있는 누군가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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