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무얼 하지 않아도 좋다.
늦게 눈을 붙인 탓인가, 이유도 없이 피곤한 아침이었다. 몸을 일으켜 나갈 준비를 하고 브베 시내로 나갔다. 카페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어제보다는 조금 나아진 날씨를 구경해본다. 구름은 자욱했지만 오락가락하던 비는 그쳐있었다. 레만호에는 큰 포크를 형상화해둔 조형물이 호수 쪽으로 꽂혀있고, 포크 맞은 편 쪽으로는 찰리채플린의 동상이 있었다. 그 주변에 모여 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얼굴은 우중충한 날씨완 상관없이 환하기만 했다.
브베의 풍경을 보다보니 자연을 벗삼아 사는 스위스인의 삶에 대해 간접적으로 접하게 되는 느낌이었다. 바다가 아닌 호수가 도시의 한 가운데를 관통하는 그림은 보통 우리 주변에서 쉬이 보는 풍경은 아니지만, 여기에서는 그게 삶이고 일상일 터였다. 브베에서 몽트뢰로 가는 길에도 끝이 보이지 않도록 펼쳐진 호수가 안도감을 주는 듯 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보였다. 끝을 알 수 없다는 것은, 그만큼 막연한 것일테니.
브베에서 몽트뢰로 가는 버스는 자주 오는 편이었다. 버스를 타고 도착한 페스티벌 장소에서 어제보다 익숙해진 레만호를 끼고 있는 벤더들을 따라 호수길을 쭉 걸었다. 여기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오늘은 무슨 공연을 볼까' 같은 쓸데없는 고민을 했다. 사실 몽트뢰는 공연이 많은 것 같지만 어찌보면 많지 않았다. 한달 여 동안 진행되는 만큼 기간이 긴 대신 큰 공연장에서는 저녁에 두 개 정도의 주요 공연이 있는 게 다이고, 야외에서는 타임테이블을 따라 여러 팀의 무료 공연이 준비되어 있긴 했지만 부스마다 하루에 평균 다섯 팀 정도로 보였다. 그렇다고 무대가 그리 많은 편도 아닌 데다 공연 시간이 겹치는 경우도 많지 않아서 굳이 고르려고 애쓸 필요도 없었고, 그러다보니 더욱 단순해보였다.(순전히 기분 탓은 아니었을 거다.) 스위스의 축제니까, 어딘지 그 나라 사람들의 여유를 닮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스위스인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 하면서, 그들에 대한 성급한 일반화를 하고 있었다.
산타나와 마커스밀러가 메인 공연장에서 공연을 하는 날이었지만, 몽트뢰를 떠난 이후 들를 곳인 프랑스의 주앙재즈축제(Jazz A Juan)에 마커스밀러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고, 그 공연을 언니와 보기로 하면서 몽트뢰에서는 과감히 보지 않기로 했다. 게다가 우물쭈물 고민하는 사이에 이미 현장에서 판매하는 티켓 자체도 매진되어버려서 어쩔 수 없기도 했다. 부지런한 자에게만 연주를 들을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지리니. 그 대신 재즈랩에서 하는 공연티켓을 구매했다. 재즈랩은 오디토리움 스트라빈스키나 재즈클럽보다 좀 더 실험적이거나 대중적 아티스트가 공연을 했는데, 14일은 레드불뮤직아카데미 측의 스페셜 무대로 Floating Points, KIASMOS, Four tet의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누구의 공연을 보는 것도 중요하긴 하지만, 페스티벌이니만큼 별 것 하지 않아도 그냥 있는 그대로를 즐기면 되는 거니까. 어느 곳을 가도 이런 그럴 싸한 핑계를 들어, 최대한 게으름을 부려보고 있었다. 공연이 시작될 때까지는 시간이 더 남아있었고, 그 동안 호수 주변에서 벤더를 더 둘러보고 무료공연을 보며 시간을 더 보내기로 했다.
별 것 하지 않아도 그냥 좋았다. 푸른 잔디에 곳곳에 앉고 누운 사람들, 뛰어다니는 아이들, 버스킹을 하는 소녀. 느긋할 것만 같은 스위스 사람들을 형상화해둔다면 이 페스티벌과도 비슷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 왠지 모르게 닮았어. 스위스인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나 같은 사람의 편견 가득한 시선은 또 그 나름대로의 그 나라를 판단하는 기준을 만들고 있었다.
유로와는 다르게 세로로 된 프랑 지폐를 이리저리 살펴보면서 세상에서 그려진 지폐 위인 중에 가장 미남이지 않을까 싶은 지폐 그림을 쳐다보노라니, MD를 구경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공연장 내부에 있는 MD판매 부스로 향했다. (사실 핑계일 뿐 그냥 돈만 보면 그렇게도 쓰고 싶은 병이 있는 게 분명하다.심각한 불치병.) MD부스 벽쪽으로 조명을 밝힌 진한 색감의 아트월이 시선을 강탈했다.
올해의 아트웍은 Leon이라는 팝 아티스트의 작품 위주였고 그의 작품이 프린팅된 MD가 비치되어 있었다. 여러 아티스트의 특성을 표현한 그림이 각기 개성 넘쳤다. 프린스의 얼굴을 그린 그림이 한 켠에 자리잡아 있었다. 나는 그의 음악을 듣고 자란 세대는 아니지만, 그의 공연을 직접 보지 못한 것은 아마 계속 아쉬움으로 남을 것이다. 마이클 잭슨에 이어 휘트니 휴스턴, 그리고 프린스, 데이빗 보위, 조지 마이클에 이르기까지 최근 팝 음악에서의 귀중한 아티스트들이 소실된다는 것은 얼마나 아깝고도 슬픈 일인가. 그와 동시에 기억 속에 아련히 남겨진 그들의 음악이 그들의 죽음으로 인해 내 추억이나 삶의 일부분을 함께 잃는 묘한 기분이기도 하다. 물론 그들의 음악은 이후로도 영원하겠지만 말이다.
에코백과 티셔츠를 사고, 티켓을 입장팔찌로 교환하고 나니 공연시간이 다가왔다. 재즈랩은 블랙박스 씨어터 형태의 작은 규모였고, 전부 스탠딩으로 공연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공연장 안 쪽에 레드불에서 운영되는 듯한 바가 자리해 있어서 공연을 보면서도 내부에서 음료를 마실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재즈랩에서는 일렉트로닉 음악을 기반으로 한 세 팀의 공연이 진행되었다. 공연을 보는 사람들의 표정이 자못 진지했다. 이 페스티벌 무대에 서는 이 신예 팀들의 성장을 함께 지켜보는 이들의 긴장감이라 해야할까. 공연에 아낌없이 박수를 보내는 몽트뢰의 관객이 나는 또 궁금해졌다.
몽트뢰'재즈'페스티벌이라고 명명하지만, 꼭 장르에 한정해서 공연의 성격을 나누기보다도 재즈가 이 페스티벌의 근간이 되고, 그 장르의 확장성을 고려하는 라인업이 페스티벌을 구성하며 새 장르를 받아들일 수 있는 관객이 지속적으로 이 페스티벌을 찾아오기 때문에 이 곳에서 50년동안을 재즈페스티벌을 개최할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저력이라고 하는 것이 기획자의 내공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닐 것이고, 이를 이을 수 있는 신예 아티스트가 그것을 꾸준히 시도함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슈즈를 집어던진 무용수들에 의해 현대무용이 탄생했듯, 기존의 틀을 벗어나고자 하는 누군가에 의해 음악도 계속 변화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공연이 끝나고 나와보니 밤이 드리워져 있었다. 곳곳에는 불이 밝혀져있었다. 사람들은 모여서 술을 마시고, 앉아서 이야기를 하기도 하면서, 이 밤이 또 지나가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도 하루하루 지날수록 매일이 아쉬운 사람이 나 뿐이겠나. 밤 12시부터 재즈클럽에서 시작되는 공연은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역시 몽트뢰도 잠을 좀 더 포기한다면, 밤을 새워서라도 더 연주를 들을 수 있는 열린 공간이었다.
나도 맥주 한 병을 주문해놓고,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의 목소리가 너무나 감미로웠다. 콘트라 베이스 소리가 공연장을 가득 메우고, 귀에 웅웅대는 베이스 소리가 탁자를 울렸다. 옆에 자리가 있는지 묻는 누군가에게 흔쾌히 앉으라고 자리를 내어주고 나니 그제서야 내가 혼자 이 곳에 와 있다는 자각이 든다. 다음에 몽트뢰를 또 찾는다면 누군가와 함께라면 더 좋겠다고, 다시 찾아와도 좋은 날에 좋은 음악과 좋은 사람과 함께 하고 싶다는 바람이 곧 현실이 될 날이 멀지 않기를 바라며, 잠시동안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