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E Oct 07. 2017

T in the Park(티 인 더 파크)2016(2)

다시 돌아온 반갑지 않은 손님, 비.

몸이 뻐근했다. 밤 사이에 내린 비가 텐트를 적셨고, 그래서인지 더 피곤한 기분이었다. 밤 사이 텐트의

천장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자장가 삼으며, 깼다 잠이 들었다 했다. 해가 완전히 숨어들 시간인 3-4시경엔 옷과 침낭을 더 여밀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추웠다. 살짝 해가 나는 순간에는 언제 추웠나 싶게도 금방 따뜻해져버리는 변덕이 심한 텐트 안은 그렇게 이랬다 저랬다 종잡을 수가 없었다.


새벽에 장대비가 내리던 험한 덴마크 로스킬레에서의 캠핑 이후 꼬박 한달 만에 다시 텐트를 쳤던 거였다. 그런데도 나는 비와 캠핑의 굴레에서 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인가.



같이 간 동생은 축축한 잔디 위에서 하루 자더니 영국에서 캠핑은 더 이상은 없을 거라고 했다. 텐트에서 비가 샌다는 둥 찡얼찡얼을 백만번은 했다.


"나도 이게 뭐 그리 좋아서 여기 와서 텐트에서 또 자고 앉았겠냐, 근데 어쩌다 보니 또 하고 있더라, 아마 너도 또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비도, 진흙도 그러려니 하는 내 면역력과 무덤덤함이 오히려 이 페스티벌 프로젝트를 어쨌든 이어나가게 하는 버팀목이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어보니 이번이 올해 들어 다섯 번째 페스티벌이었다. 아직은 한 1/3정도 와 있었지만, 텐트를 칠 페스티벌은 그리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진 않았다.


그래도 첫 날은 좀 뽀송했는데.


캠핑존에서 일으키기 힘든 몸을 이끌고 스테이지로 향한다. 캠핑존에서 스테이지로 향하는 길은 군데군데 웅덩이가 되어 있었고, 이제부터는 이 길이 점점 험난한 여정이 될 터였다. 비가 올수록 더 심해지지, 덜해지지 않을 것이므로.




티 인 더 파크에서는 비가 오면 물량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노란색 우비를 나누어준다. 티 인 더 파크의 심볼이 그려져 있는 노란 우비를 너도 나도 입고 진흙탕에서 뛴다. 노란색 우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진흙이 여기저기 튀어 원래의 빛깔을 잃어버리지만, 그래도 티팍의 상징과도 같은 느낌이다. 나도 우비를 나눠주는 스탭의 가방에서 딱 마지막으로 나온 우비를 받아들고 나니 왠지 이 무리 안에서 묘한 소속감을 가지게 되는 것 같았다.



오락가락하는 비로 인해 지금이 몇 시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흐린 하늘에 체력은 떨어지고 허기만 졌다. 페스티벌의 음식은 다양한 편이고 각각의 벤더가 독립적인 운영업체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음식은 먹을 땐 금방 배가 부르다가도 또 많이 걷다보면 금방 다시 배가 고파진다.(걸신이 들렸나)





메인 스테이지에서는 거의 올해의 모든 페스티벌에서 만나는 것만 같은 제스 글린(Jess Glynne), 바스틸(Bastille)의 공연이 진행되었고, 라디오1 스테이지에서는 랫 보이(Rat Boy), 카이저 치프(Kaiser Chief)의 공연이, 킹텃(King tut's Wah Wah)에서는 톰 오델(Tom Odell), 티팍에서 70년대에 젊은 시절을 보냈을 듯한 분들이 다 모인 것만 같은 베이 시티 롤러스(Bay City Rollers)의 공연까지 다양한 장르를 한 데 모은 듯한 공연들이 줄을 이었다.


둘째 날의 메인스테이지 헤드는 영국의 핫한 디제이, 캘빈 해리스(Calvin Harris)였다. 비는 점점 거세게 쏟아졌고, 관객들은 일렉트로닉 음악에 맞추어 이리저리 몸을 맡기며 춤을 추고 뛰었다. 스코틀랜드의 찬 바람은 그리 이들에게 중요한 것 같아보이지 않았다. 나도 캘빈 해리스보다도 피쳐링을 한 가수의 목소리로 기억하던 노래들이 그의 음악이라는 것에 놀라며 즐겁게 무대를 관람했다.



이름만 듣던 페스티벌과 아티스트가 내 앞에 펼쳐져 있었다. 난 벌써 두번째 날을 꼬박 이 곳에서 지내고 있었고, 런던의 길을 쏘다니며 여기 저기서 들었던 노래들을 실제로 하는 그 사람들이 내 눈 앞의 이 스테이지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다. 잡히지 않을 것 같은 신기루처럼 보였던 것이 가까스로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이 앞으로 다가온 것 같았다. 뭔지도 잘 모르고 형체가 없던 그 무언가가 내 눈 앞에 아른거렸을 때, 현실성을 조금 잊어버리고 무모하게 했던 결정은 날 여기에 데려다놓았다. 생각 속의 것은 실제가 되었고, 내 두 발은 이 벌판 위에 서 있었다.




이튿날 밤은 익숙해짐과 동시에 곧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기도 하다. 전 날보다 바람이 더 차가워져 있었다. 이제는 마른 땅을 찾기 어려워진 캠핑존에 다시 찾아간 텐트는 그 사이 비에 흠뻑 젖어있었다. 저녁에 부는 바람을 타고 진흙 내음이 났다. 옆 텐트에서 트래비스의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나도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빗소리는 텐트를 두드려 함께 그 연주에 동참하고 있었다.



세번째 날이 되니 이젠 꼭 여기 살던 사람들처럼 다들 익숙해진다. 일부러 먼 캠핑존 쪽도 둘러보고, 아침에 티를 마시며 익숙한 얼굴과 인사를 하거나 대화를 하기도 한다.



마지막 날은 이미 짐을 싸서 떠나는 사람들이 있어 텐트가 빼곡하게 들어섰던 캠핑존에 빈 공간이 생기기 시작하고, 비를 견디지 못한 텐트 폴대가 부러져 제 틀을 유지하지 못하거나 버려진 텐트들도 곳곳에 보인다. 환경 단체들이든 프로덕션들이 골머리를 앓을 텐트 쓰레기는 어느 페스티벌에든 이렇게 흩어져있다.



제임스 베이(James Bay)의 공연을 메인스테이지에서 보면서 마지막 날의 풍경을 눈에 담고 싶어진다. 왠지 마지막 날은 시간도 더 빠르게 가는 듯 하다. 라디오 1 스테이지에서 제이크 버그(Jake Bugg)와 메이저 레이저(Mazor Lazor)의 공연을 보고 나니, 레드 핫 칠리페퍼스(Red Hot Chilli Peppers)의 무대가 마지막으로 남아있었다. 킹텃에서 잠시동안 크레익 데이빗(Craig David)이 공연을 하는 것을 본 게 전부로 다른 스테이지는 거의 다니지도 못한 채 페스티벌은 마지막을 향해가고 있었다. 슬램텐트나 티 브레이크 스테이지, 여러 엔터테인먼트를 하는 스테이지들은 잠시동안 들어가본 것이 다였는데 벌써 끝나가는 거다. 참 이상한 게, 둘째 날까지는 꽤 나한테 시간이 많이 주어지는 것 같은데 그 다음 날인 마지막 날이 되면 그렇게 중간중간에 아쉬웠던 것들을 할만큼 여유가 없는 거다. 그래서 시간이 아깝고, 내가 왜 그리 마음껏 놀으라고 멍석 다 깔아준 이 페스티벌에서 왜 더 못 즐긴 것인지 그제야 아쉬워지기 시작한다. 당장 잠을 줄였어야 해, 왜 졸렸지, 왜 추웠지, 별의 별 생각이 다 든다.



뭐가 되었든, 헤드는 헤드니, 메인스테이지에서 마지막 공연을 기다리는 와중에 어떤 사람이 조명이 달린 아시바 위로 올라간다. 무대 주변에 공연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걱정반 호응반으로 소리를 질러주고, 적당히 그 스릴을 즐기던 그 사람은 다시 땅으로 내려온다.



메인스테이지 헤드가 레드핫칠리페퍼스에, 또 다시 오락가락하는 비에, 통제불가능 관객들을 합하니 생각나는 페스티벌이 있었으니, 닮은 꼴이라고 해도 전혀 위화감이 없을 로스킬레페스티벌이었다. 로스킬레만큼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가진 건 아니어도, 묘하게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이 때까지의 기시감은 이것이었나보다.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그 정체를 깨닫고 나니, 기본적인 페스티벌의 정체성은 그 뿌리를 같이 하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하위문화로 대변되는 히피로부터 소수의 문화가 한 데에 모여 페스티벌이라는 한 무리를 이루고 나니 소수가 다수가 되는 순간은 꽤나 짜릿하다.


로스킬레보다 조금 더 열정적이었던 마지막 공연이 끝나고 돌아온 캠핑존에서는 내 옆에 있는 사람들과 마지막의 아쉬운 시간을 함께 공유하며 이야기꽃을 피운다. 내일이면 이 곳을 떠날테지만, 이 곳은 내가 네가 사는 현재다.


나도 너도 지금 여기에 있으니, 그걸로도 충분한 밤이다.


이전 09화 T in the Park(티 인 더 파크)2016(1)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