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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 Nov 17. 2019

제50회 몽트뢰재즈페스티벌 (3)

음악을 연주하는 기차, Jazz train


며칠동안 내내 꾸물꾸물하던 하늘에 해가 떴다. 오랜만에 화창한 날이었다. 햇빛이 내려쬐니 빛을 잃었던 것처럼 보이던 브베 동네가 알록달록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내리 쬔 햇빛에 색이 입혀진 이 동네를 조금 더 구경하고 싶어져 좁은 시내 길을 구석구석 탐방하러 나섰다. 좁은 골목길 안에 모여있는 상점들이 사이좋게 문을 열어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노랗게 칠해진 건물벽에 그려진 그림과 길목마다 놓인 붉은 꽃이 비에 개운하게 씻은 얼굴을 드러내었다. 갑자기 찾아온 좋은 날씨에 길가에 놓인 꽃은 꼭 잠에서 덜 깬 잠옷차림의 아이같은 모습을 하고 나른히 눈을 반쯤 감은 채 밖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날이 좋으니 시옹성에 가고 싶어졌다. 브베의 골목길을 빠져나온 나는, 버스를 타고 아직 조용한 몽트뢰를 지나 시옹으로 가고 있었다. 햇빛이 뜨거워지니 7월이구나 싶어진다.


호수에 비친 햇살이 너울거렸다. 반짝이는 호수 위로 그림처럼 세워진 시옹성은 중세 시대 모습 그대로 거기에 계속 서있었던 걸까. 호수를 걸으며 물 위에 세워진 성의 풍경을 보노라니 따뜻한 햇살에 온몸이 나른해진다. 눈을 감아도 눈꺼풀을 타고 주황색 빛이 속을 파고든다. 따사롭다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이런 기분을 말하는 거겠지,하며 호수 주변을 둘러보노라니 맛있는 점심을 먹고 싶어졌다.



근처 레스토랑에서 1인분으로는 잘 팔지 않는 퐁듀를 주문했다. 레스토랑 안으로 햇살이 들이치듯 내려쬐었다. 밖은 선선하지만 햇살만큼은 뜨거운 한여름이다. 꼭 몽트뢰만이 아니어도 스위스에서 한달을 살아도 좋지 않을까 생각한 건 꼭 날씨가 좋아서만은 아니었다. 오늘이 아니어도, 비가 와도, 이 눈 앞이 뻥 뚫린 풍경을 바라보다보면 눈은 조금 시리겠지만, 도시로 돌아가면 확 트인 이 풍경이 아른아른거릴 같았다. 어디든 눈을 돌리면 보이는 알프스와 호수의 풍경과 햇살에 취해 시간가는 줄을 모르다보니, 이제 몽트뢰로 갈 시간이다.



햇볕이 좋은만큼 다시 돌아간 몽트뢰의 프레디 머큐리 곁에는 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며칠 사이 사람이 더 많아진 것 같았다. 그는 날씨와 관계없이 마이크를 들고 호수를 바라보며 섰지만 비오던 날엔 왠지 쓸쓸하더니, 날씨를 따라 사람들도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모양이다. 그 인기의 구름처럼.



몽트뢰에 있는동안에 꼭 한 번 재즈보트나 재즈트레인을 타고 싶어서 티켓을 판매하는 곳인 선착장과 기차역을 매일같이 들렀다. 재즈보트는 운영하는 기간이 이미 모두 끝났고, 재즈트레인은 내가 머무는 동안 2-3개의 일정이 있었는데 모조리 매진이었다. 결국 몽트뢰에 머무는 동안 재즈트레인을 탑승할 수 없게 되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기차역에서 아쉬운 뒷맛을 다시며 다시 호수로 향하기 일쑤였다. 결국 마지막 날을 앞두고도 기차는 나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대신 뮤직비디오 감독으로도 유명하다던 우드키드(Wood Kid)의 공연티켓을 샀다. 오디토리움 스트라빈스키에서 하는 스위스 아티스트의 공연인만큼 메인공연 중 중요도가 높은 공연이었다. 잘은 몰라도 이 페스티벌에서 중요한 자국민 아티스트라면, 보는 게 예의이겠다 싶어져 뒤늦게 그의 정보를 찾아보았다. 꽤나 ‘모르고도 보는' 아티스트의 공연이 많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페스티벌에 가도 거진 반 모르는 아티스트고, 국내에서 내한을 하는 아티스트도 이름만 들어본 경우는 허다했던 것 같지만 그렇게 나는 모르고도 공연을 자주 봤다. 페스티벌도 이름만 듣고 가보기로 했던 게 이번 (자칭)유럽 페스티벌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사실 아는지 모르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알든 모르든, 그 곳에 내가 서 있음이 더 중요했고, 모르고도 새로운 것을 발견하거나, 좋아지는 것들이 생긴다는 것도 이렇듯 매력적인 경험이었으니. 그래서인지 오히려 가는 곳마다 서투른 손떼를 묻히고 있었어도, 그런 서투름을 탓하지는 않기로 했다.


우드키드 공연


하얀 옷차림을 한 콰이어로 꾸며져 있는 우드키드의 무대는 마찬가지로 하얀 옷을 입은 그의 노래를 모두 따라 부르며 환호성을 외치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공연장을 가득 채웠다. 자리에서 방방 뛰며, 나는 알아들을 수 없는 음률의 프랑스어가 그들의 입을 통해 내 귀를 타고 전해지고 있었고, 이해하지는 못할 그 소리가 천천히 마음 속으로 울려오고 있었다.






몽트뢰재즈페스티벌의 마지막 날에도 재즈트레인 일정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역시나 당일까지 티켓을 구할 수가 없었다. 혹시 몰라 재즈트레인 출발 시간 전에 몽트뢰역으로 향했고, 취소티켓도 역시나 아예 없어서 포기하려던 차에 어떤 사람이 내게 말을 걸었다. 재즈트레인 티켓을 팔려고 한다는 거다. 당연하게도 솔깃했지만, 암표 자체를 사본 적이 없었던지라 의심이 되어서 살펴보니, 일행에서 한명이 빠졌는지 티켓이 남는 모양이었다. 그들도 트레인을 곧 타러 가는 사람들이라서 속이면서 티켓을 파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았고, 바로 현금을 주고 산 티켓을 받아들고는 거의 곧 출발을 앞둔 트레인을 타기 위해 플랫폼으로 바삐 향했다.



플랫폼에는 뉴올리언스 재즈를 연주하는 연주자들도 제 각각 악기를 매고 등장했다. 유랑극단 느낌의 그들은 기차를 올라타기 전부터 연주를 시작했다. 부리나케 플랫폼으로 달리듯 올라간 나는 그 연주의 끝자락에 맞추어 기차에 탑승했다.



몽트뢰에서 마지막 남은 재즈트레인에 탑승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기분이 점점 좋아졌다. 처음엔 실감이 나지 않아 얼떨떨했지만, 금방 내 눈 앞에 멈춰서는 기차에 탑승을 하고 나니 그제야 제대로 온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타게 된 기차는 프랑스와 스위스의 접경지역까지 가는 골든패스의 경로로, 뉴올리언스 재즈를 들을 수 있는 뉴올리언스 재즈 트레인이었다.


기차를 타기 전부터 커다란 악기를 들고 플랫폼에서부터 연주를 시작한 연주자들은 기차를 타고 나서부터 본격적인 연주를 하기 시작한다. 브라스밴드의 울림이 굉음을 내며 덜컹거리는 기차 소리에 묻힐 정도였지만, 그들이 연주하는 음악은 투박하면서도 소박한 소리로 어느새 기차 안을 채우고 있었다.


기차는 점차 달려 스위스를 감싼 알프스 자락을 타고 산을 올랐다. 덜컹거리는 기차소리기 가득하던 귀가 어느새 멍멍해졌다. 멍멍해진 귓가엔 츳츳,하는 심벌소리가 맴돈다.



나이가 지긋한 중년의 부부들과 가족들이 많이 보였다. 그들의 어린 시절, 동네에 유랑극단이 찾아와 공연을 하면 광장에 나와 함박웃음을 짓고 구경을 하던 꼬마들이 이들이었을까. 어린 아이들처럼 기차 안의 사람들은 설렘과 웃음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날씨가 너무나 좋았다. 반짝이는 햇빛을 잔뜩 머금은 알프스 자락의 푸른 빛이 파란 하늘과 더불어 눈을 시리게 했다. 산악 열차가 더 높은 곳으로 큰 소리를 내며 움직임에 따라 음악소리는 기차소리에 가려 웅웅거리며 잘 들리지 않았지만, 스위스와 프랑스를 접한 첩첩산중에서 연주를 들을 수 있는 특권은 오롯이 이 열차 안에 있는 사람들만이 가진 것이었다.



어느 순간 기차 안에 있던 사람들이 조용해지더니, 여기저기서 탄성소리가 터져나왔다. 기차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이 장관이었다. 기차가 산으로 올라가면서 알프스 산이 감싸고 있던 호수와 숲을 가까이 볼 수 있었고, 멀리서 보던 산을 눈 앞에서 맞이하는 느낌이었다. 스위스든, 프랑스든, 그 어딘가에서 보는 절경과 시원한 바람, 햇살. 모든 것이 완벽했다.



얼마 가지 않아 기차가 서고 산등성이에 정차한 기차는 알프스 중턱에 모두를 내려주어 그 그림같은 풍경을 조금 더 실감하게 했다. 산 위의 찬 바람과 눈이 잘 떠지지 않을 정도로 따사로운 햇살이 기분 좋았다. 나는 어느새 스위스가 아닌 프랑스에 와있었다.

알싸한 찬바람과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조그만 나무판자로 되어 있는 상점에서 라끌렛과 화이트와인을 샀다. 라끌렛이 뭔지도 모르고 주문을 했는데 지글지글 큰 치즈덩어리를 데워 녹이더니 감자와 햄들 위로 삭 덮어주는 게 아닌가. 요망한 음식이었다. 당연히 맛있을 수밖에. 기차에서 음악을 연주하던 연주자들이 악기를 가지고 내려 야외에서 다시 연주를 하기 시작한다. 라끌렛과 살짝 노란 빛을 띈 화이트 와인의 조화, 그리고 풍경에, 재즈 연주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정말 이보다 좋은 곳이 또 있을까. 내가 지금 이 곳에 있는 게 너무나 자랑스러워질 지경이었다.



볕과 경치와 맛있는 음식에 곁들인 재즈 연주는, 전혀 전자음이 들어가 있지 않은 정말 '어쿠스틱'이었다. 관악기를 불고, 타악기를 치는 진짜 그 악기의 소리를 우리는 증폭제 하나 없이 고스란히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더 전자악기나 스피커를 통한 음악이 익숙한 나에게, 그 담백한 음악소리가 그토록 다르게 들렸을지도 모른다.



어느 새 다시 기차를 타고 돌아가야할 시간이 되어 내렸던 기차를 타니 기차는 왔던 반대방향으로 시내를 향해 내려갔다. 기차를 탄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좋은 곳과 좋은 음악은 이렇게도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구나 싶으면서, 나도 그 무리에서 누군가에게 그리 보이겠다는 생각이 드니 괜시리 창피하면서도 좋았다. 목 뒤가 괜히 간질간질했다.


기차는 올라갈 때보다 내려올 때가 훨씬 빠른 것 같았다. 그리고 함께 기차에서 내리는 우리 모두는 어느새 친구가 된 느낌이었다.



길지 않은 재즈트레인의 하행선을 타고 다시 몽트뢰로 향한다. 공연의 마지막 날은 'Smoke on the water'가 만들어진 배경이 된 이 곳에서 다시 딥 퍼플이 공연을 한다. 기차를 타고 다시 도착한 몽트뢰에서는 마지막 공연인 딥퍼플의 공연 티켓이 이미 매진되어 있었다. 노래의 기원이 되었던 그 곳에서 현재 진행형으로 50주년의 마지막 공연을 하는 의미는 아티스트에게도 새로운 것이지 않을까 싶었다. 재즈트레인을 타겠노라 진작에 저녁 공연은 포기하기로 했지만, 막상 내려오니 조금 아쉬운 마음이다.



햇빛이 약간 내려앉은 호수 근처의 천막들이 며칠 전보다 더 조용해져 있었다. 내일이면 호수를 따라 늘어선 상점들이 다 사라지겠지, 한달을 북적였던 재즈동네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호수만이 잔잔히 머물 것이다. 쓸쓸하듯 평화롭게.


마지막 날인만큼, 호수에 길게 늘어선 부스들을 좀 더 구경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공연하는 사람들도 더 오래 보고 싶어졌다. 공연이 끝나면 이 조용한 스위스 마을이 얼마나 조용해질지, 상상해보니 조금 쓸쓸해졌다.



며칠을 지내도, 하루하루가 너무나 아쉬울 수 밖에 없겠구나 싶은 곳이 몽트뢰였다. 엄청난 유명세에 비해 조금은 실망할 정도로 조촐하던 이 곳의 첫 인상에 비해, 그 잔상은 이 페스티벌을 지속해온 기간만큼이나 짙고 깊었다. 이 시간이 가기 전까지 사람들은 제 각각의 모습으로 잠시 다른 세계에 속한 기분을 만끽하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잔디에 누운 사람들과 기타를 치며 버스킹을 하는 사람들, 곳곳에 있는 식사 장소이자 공연장소인 텐트에서 연주하는 밴드들도, 그 음악에 흥겨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춤을 추는 사람들도, 이 시간이 가는 것이 아쉽지 않을만큼 지금을 살고 있었다.


한여름의 중턱의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던 레만호의 하늘에도 달빛이 뜨고, 어느새 여기저기 불빛을 밝혔다.



밤이 되자 몽트뢰재즈페스티벌로 들어오는 길에 있던 아치에 걸린 글자가 처연한 푸른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어스름한 불빛이 왠지 모르게 내 뒷목을 잡아끄는 것만 같았다. 한 달의 축제와 북적거림의 온기, 낮게 깔린 콘트라베이스의 소리도 오늘 저녁이 지나면 모두 사라질 것이었다. 몽트뢰에서의 마지막 날에도 재즈클럽의 연주는 계속되었다. 이제는 브베로 돌아가면 올해의 몽트뢰는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이다.


왜 이토록 순간의 화려함에 마음이 끌리고, 걸음이 옮겨지고, 무대를 향해 시선을 옮기게 되는 걸까. 이렇게 잠시동안의 것일 줄을 앎에도, 미련스럽도록 놓지 못하는 것을. 그래서인지 정류장에서 서성이던 발길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쓸쓸해진 몽트뢰의 밤, 꽤 오랜 시간 브베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문득, 다음 번엔 밤 늦게까지 술 한잔에 재즈 한 곡 함께 할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히 했다. 좋은 곳에서는 더 좋은 사람과 지금의 생각과 감흥, 그리고 의미를 나누고 싶어진다. 동의해주고 공감하고, 그런 시간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을 우린 동반자라 부르는 것일테다.


도착한 버스에 옮기는 발걸음이 유독 무거웠다.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을 기약하는 것이, 왠지 묘하기도 서글프기도 했던 모양이다.


이상하리만치 아름다운 동네에서, 또 다시 이 곳을 만날 수 있는 때는 언제가 될지 생각해보면 이 유럽에서 살고 있는 시기가 나에게는 어떤 기억으로 남게 될지 가늠도 잘 되지 않는다. 분명 이 시기는 그리워질테고 또 나는 그 사이 다른 시간 속에 방황 중일테니. 현재의 방랑은 행복한 시간이자 기억 속에서도 그렇게 남아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몽트뢰, 또 만나자. 꼭 다시 돌아왔을 때도 그대로이길, 또 만날 때까지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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